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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강변에서 참외농사 짓는 시인 아줌마

여행과 미디어/여행길 만난 인연

by 한방울 2004. 9. 6. 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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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강변에서 참외농사 짓는 시인 아줌마

임진강, 노을, 박상건


* 분단과 농촌 동시에 체험할 수 있는 북녘 땅

통일전망대를 지나 임진각으로 이어지는 푸른 들판은 참으로 평화롭기만 했다. 드넓은 들판의 푸른 물결이 가을이 왔음을 일러주고 있었다. 북으로 북으로 더 달리자 철조망 안 푸른 잡풀더미 사이로 철새들이 군무를 추고 있었다. 임진강 북단 판문점 입구는 철새도래지.


이따금 군인들 걸음걸이만큼 긴 적막함이 허공에 흐르곤 했지만 무심한 구름 따라 새들은 북녘 땅으로 나래를 활짝 펴 보이고 있었다. (사진=분단의 아픔이 서린 임진강의 노을 풍경)


임진각 조금 못간 길목에서 참외를 파는 아낙이 있다. 그이는 파주 땅서 참외박사로 통한다. 땅 빛깔과 참외 잎 향기로만도 한해 참외 농사를 예측한다는 유해남씨(63). 그이는 남편 황정연씨(66)와 조상 대대로 남쪽 북단 마을에서 참외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


비닐하우스에 들어서자 서울에서 찾아온 가족들이 신기한 눈빛으로 참외 넝쿨을 뒤적이며 체험학습 중이었다. 참외밭 바깥 이랑에는 붉은 방울토마토가 웃고 있었다. 비닐하우스 밖 텃밭에는 채소를 재배 중이었다.


참외농사를 지어 네 자녀를 대학 졸업시키고 모두 출가시켰다는 그이는 마냥 행복해 보였다. 농사꾼으로 살아온 날들이 요즈음처럼 자부심이 생기고 행복한 적이 없었노라고 미소를 지었다.

파주 출판단지가 들어서고 판문점을 오고 가는 사람들의 발길이 참외 줄기만큼이나 이어지면서 사람 북적이는 맛이 남다르다는 것. 그만큼 농산물 판로가 늘어나고 문화 시설도 늘어나면서

예전에는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문화생활이 나아지고 생활수준도 동시에 높아졌다는 것이다.


분단과 농촌 체험을 동시에 할 수 있는 곳. 국도 1호선과 자유로 길목이 들어서 주말에도 서울에서 승용차로 1시간이면 달릴 수 있는 지척에 있다.


* 자식 농사짓는 것처럼 기른 참외를 파는 시인의 마음

그이는 올해 봄비로 인해 첫 수확한 참외에 물이 너무 많이 들어차 마음이 편치 않았단다. 물이 들어차면 참외농사는 끝장이라고 생각하는 게 농사꾼들의 공통된 생각이란다.


그러나 재배과정에서 이 난관을 잘 극복해 네 번째 수확의 기쁨을 누리고 있을 정도로 짭짤한 농사 재미를 맛보며 올 가을을 맞고 있다고 말했다.


자신이 땅방울 흘려가며 일군 참외를 임진강이나 판문점을 오고 가다가 찾는 사람들에게 팔았을 때 삶의 의미를 무척 크게 찾는다는 그이. 돈도 돈이지만 낯선 나그네들을 손님으로 맞고 그들에게 자식처럼 애지중지 키워온 참외 농사 이야기를 들려주고 자식 키우던 이야기까지를 들려주는 일들이 모두 행복할 뿐이란다. 자식 농사 지어 타지로 보내는 심정으로 참외를 판다는 그이.


참외를 깎아두고 그이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문득, 풀밭에서 볼펜이 동여맨 수첩 하나를 발견했다. 그이가 손님을 맞고 보내면서 그리고 남편과 진종일 농사를 지으며 느낀

생각들을 시로 써 놓은 것이었다.


그이는 자식들이 출가한 후로 한글을 익히고 붓글씨도 배우고 레저문화 생활도 하면서 틈틈이 참외와 함께 무르익어가는 이녁의 여생을 시로 적고 있다고 말했다. “참외 꽃 같은 손님들을 맞는다.”면서 손님들에게 자신이 달고 아름다운 참외처럼 사는 일들을 주고받고 이를 시로 쓴다는 것이다.



* 참외에 가득한 물을 빼는 생산 기술 절실

그이가 유난히 좋아한다는 참외의 노란 꽃은 열매로 수정되기 전 피는 암꽃이다. 보통 6∼7월경에 피는데 그이처럼 비닐하우스에서 속성재배를 한 농가의 경우 4월이면 꽃구경을 할 수 있다. 그리고 5월이면 벌써 맛깔스런 참외 속살을 만날 수 있다. 참외는 꽃이 핀 지 한달이면 수확한다.


그이는 물이 가득 찼던 참외 농사 이야기를 하며 아주 진지한 몸짓을 보였다. “과학이 발달했는데도 왜 물이 차지 않은 참외를 생산하지 못하는지 안타깝다”면서 무슨 방도가 없겠느냐고 반문했다. 그이의 이여기를 듣고 있노라니, 농사에 대한 전문적 지식뿐만 아니라 농업에 대한 정서적 가치가 이녁의 체험 속에 깊이 배여 나오는 것임을 알았다.


그만큼 농업과 농촌에 대한 지식의 성숙도와 희망을 동시에 느낄 수 있었다. 참외 농사를 지으며 흘린 땀방울의 노동만큼 검게 그을린 얼굴이었지만 그만큼 빛나는 청동거울이었다. 이제는 가을 앞에 돌아온 누님의 얼굴처럼. 그렇게 부드럽고 향기로운 국화꽃처럼 맑은 향기가 가을하늘과 오버랩 되어 반짝이며 다가섰다.


참외의 종류는 각양각색이다. 줄참외, 골참외, 개구리참외 등등. 갈수록 우리 농민들의 손으로 개발한 신품종이 날로 출현하고 있기도 하다. 훈몽자회, 지봉유설, 산림경제 등 옛 문헌에 벌써 참외가 등장한다.


허균이 팔도의 명물식품에 대한 기록을 해둔 도문대작에는 참외의 명산지로 의주에 대한 기록이 있고 의주참외는 매우 달았다고 쓰고 있다. 여기서 의주까지는 얼마쯤 될까? 임진강변에서 만난 참외와의 인연이 통일 후 가볼 의주를 떠올려 주고 있을 즈음에 임진강변에는 노을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참외처럼 달콤한 그런 통일의 꿈이 마침내 철조망을 걷어낸 임진강에 철썩철썩 흘렀으면 싶었다. 참외의 ‘외’는 오이를 가리키고 ‘참’은 순수 우리말로 “허름하지 않고 썩 좋다”는 뜻으로 “오이보다 맛과 향기가 썩 좋다”는 표현이다. 그러고 보니 저 석양도 참외 빛이다. 그리고 달디 단 참외만큼 참외를 기르는 농부들의 심성도 남다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노을처럼 내 마음에 다가와 맺히고 고인다.


적막한 임진강변 철조망 주위로 서치라이트 불빛이 키워지고 병사들이 강변을 걷는 저녁 무렵이 되자 서울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자유로에는 코스모스가 유난히 한들거렸다. 그렇게 가을이 무르익고 있다.


물 좋고 산세 좋은 임진각 가는 길목, 누구보다 통일의 꿈이 깊었을 이 마을 사람들 그리고 모든 우리네 농부님들이 가을 하늘 만큼 높고 푸른 행복한 결실을 거두었으면 좋겠다.


박상건(시인. 계간 섬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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