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상처로 남은 그루터기의 삶을 뒤돌아보며
- 한해를 보내며, 광릉수목원에서
한해가 저물어 간다. 저무는 시간 속에 젖어들면서 뒤돌아보면 끝내 잊을 수 없는 사람들이 많다. 산다는 것은 기쁨과 슬픔을 반반씩 버무리는 일. 그래서 뒤안길에 슬픔에 겨워 만난 얼굴, 고통 속에서, 고통 속에서 환희로 가는 길에 만난 사람, 수많은 인연들이 스친다.
한해의 끝자락, 저녁 무렵 모락모락 피어나는 산촌의 연기 아래를 거닌다. 자연을 벗 삼아 힘든 여정을 살아온 농부들은 그 들판에서 수확한 곡식으로 겨울을 보내는 중이다. 그 땀방울이 모여 장작불로 타오르고 힘든 노동의 시간들이 검게 타올라 굴뚝 연기로 빠져나간다. 훈훈한 시골길에서 노동의 농축이 만들어 낸 향기를 맡는 동안, 겨울 숲에서도 생명의 숨소리인지, 입김인지도 모를 이내들이 피어올랐다.
그렇게 시골길 따라, 오솔길을 따라 한적한 숲으로 향했다. 산다는 일은 앞으로만 나아가는 바람 같이 보이지만 실상은 뒤돌아보며 걷는 숲길이 더 많은 것을 일러주고 생각하게 한다. 숲은 그래서 인간의 삶의 표상으로 은유되고 늘상 그런 삶의 대상으로 다가온다.
제 몸 내어 숲의 근원이 된 그루터기 일생
독일 속담에 “탐욕은 밑 빠진 항아리에 물 붇기”라는 말이 있다. 나의 안일을 위해 주위의 고통을 아랑곳 하지 않는 삶은 바로 밑 빠진 독에 희망 담기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모성애라는 희생정신을 배우며 마음 다독이곤 한다. 그것도 실상은 밑 빠진 독에 사랑만 부어대는 어머니의 희생이지만.
사골 국물 우릴 대로 우려서 밥상머리에 앉은 자식들의 시장 끼를 다 채워주고 당신은 정녕 사골 뼈처럼 야위어 가던 우리네 어머니, 동구 밖 장승처럼 서서 평생 사랑으로 맞이하고 보내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네 어머니....
겨울 숲에는 그런 모성애가 남아있다. 그것은 그루터기의 일생이다. 어머니의 사랑처럼 제 몸 다 베어주고 빈 자리로 남아 마지막 작은 생명들을 키워주는 풍경이라니. 어릴 적 봄날에 소몰이 하다가 삐비꽃 뽑아 물고 머루 다래 따 물고 그 그루터기에 앉아 해바라기를 하곤 했는데, 이 겨울 숲에서도 소년과 소녀의 웃음 같은 꽃을 피어물고 있는 것이다.
이 겨울에 그루터기는 그 여정만큼 검게 탄 나이테를 두르고 있었다. 나이테 위로는 기억의 깃발만이 나부낀 채로. 그루터기의 자생력은 그런 기억의 재생산에 있는지도 모른다. 허공에 뻗어간 길이 지워졌다고 해서 지나온 길의 추억마저 지워진 것은 아닐 터. 산다는 일은 앞으로만 나아가는 것만 아니라 그렇게 과거의 흔적을 밟고 오늘과 내일로 이어간다.
버리고 비우면서 희망의 숲을 키우는 그루터기
그루터기는 인간과 자연의 생명 길, 그 중심에 있다. 그루터기는 오늘을 사는 나무들의 중심이 되어 있다. 그리고 우리네 삶을 뒤돌아보는 잣대가 되어 있다. 그래서 숲은 과거와 현재, 미래가 동시에 살아 숨쉬는 터전이다. 그루터기는 다시 과거를 읽으며 겨울을 보내고 있었다. 작은 풀꽃, 잔가지 하나에서도 지나온 길들을 읽고 있었다. 산다는 것은 그렇게 뒤돌아보면서 앞으로 가는 일이다. 행여, 그립고 고마운 얼굴들 있다면 한번쯤 나지막하게 가슴 내려놓고 고개 숙여 마음에 아로새길 일이다. 저 나이테처럼, 동글게 그리면서 말이다.
그루터기는 위로만 치솟는 일만이 모든 삶의 꿈일 수 없음을 일러준다. 모든 사물 보다 위에 있고 깊은 것은 인간의 탐욕뿐임을 반증해준다. 위에 위치하는 사물은 불안의 상징이기도 하다. 우리는 왜, 떠오르는 일출에 환호하면서 저무는 노을에는 침묵하는가. 저물어 가는 일은 자기 가슴을 쓸어내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벅차오르던 그 새해를 맞아 숱한 시간의 여행을 해오면서 아쉬움과 안타까움, 작은 기쁨들이 어우러져 농축된 나날이었다. 이제 저무는 한 해 끝자락에서는 그 농축을 풀 때인 것이다. 버릴 것은 버리고 비울 것은 비우면서 새해 새날에게 빈 가슴을 내줄 시간인 것이다.
낮은 데로 임해 그늘진 삶을 살피는 그루터기 삶
뒤돌아보면 시지프스 신화 같은 삶이었다. 부질없고 속절없는 시간들 위에 탐욕과 개인주의가 얼룩진 돌멩이 같은 삶에 밀어 올리면서 12월의 언덕 위에 당도한 것이다. 이성의 동물은 합리적이기도 하지만 마지막에는 늘 후회하는 대상물이다. 그런 삶의 과정에서 수많은 기쁨과 슬픔, 부유함과 가난함, 희망과 절망이 메비우스 띠처럼 태엽을 감았다 풀었다가를 반복하며 예까지 온 것이다.
위로 가는 길만을 정상의 길이라고 철썩 같이 믿던 사이에 헐벗은 가지 아래는 라면박스를 아랫목 삼아 웅크리며 살아간 사람들이 있었다. 산등성이 오르며 메아리를 치고 있는 동안 그 산보다 높은 달동네 골목길의 삶을 뒤돌아보지 못했다. 휘황찬란한 중심의 삶을 살아가는 사이에 집어등과 후미진 동구 밖 희멀건 가로등 불빛을 읽지 못했다. 그 불빛 아래로 이슬비에 젖듯 땀방울 흥건히 적시며 지게지고 리어카를 밀고 가던 민초들의 삶을 헤아려보지 못했다. 세밑에는 그것이 상처로 남는다. 그것이 가슴 아픔으로 남는다. 그 아린 것들을 밑돌 삼아 이제는 서로의 눈높이로 살아가야 할 새해임을 깨닫는다.
겨울 숲을 찾아간 일은 그런 전에 삶을 반추해보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겨울, 광릉수목원에서 그루터기가 일러준 삶의 지혜를 엿듣는 일은 그래서 다행스러웠다. 새해 징검다리 건너기 전에, 언덕배기에 올라 해맞이를 하기 전에 저무는 이 숲의 그림자를 읽어보는 일은 그래서 불행 중 다행이었다.
그랬다. 오랜 세월 살아온 고목이 베어진 그 자리는 그루터기가 말없이 앉아 있었다. 그 언저리에 푸른 식물이 덩굴을 뻗어 굴러가고 있었다. 고목이 내어준 빈틈에는 버섯이 보금자리를 틀고 있었다. 나의 아픔이 나의 상처가 저렇게 누군가의 희망이 되어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그랬다. 고목은 제 살 떼어내는 일이 그냥 버려진 것이 아니라 저 보다 작은 생명에게 훈훈한 겨울나기를 마련해준 것이다. 그들의 아름다운 동행에서 우리들의 사라진 공동체 문화가 너무나 아쉬운 갈증으로 다가왔다.
큰 것과 작은 것들이 함께 사는 산림의 묘미
과거와 현재, 작은 것과 큰 것의 조화는 숲의 묘미이다. 숲의 가없는 생명력이다. 사람들은 위로만 처 올라가지만 산은 등성이 굽어 내려오는 삶을 산다. 내려오며 빈 자리를 내어준다. 여백의 삶은 그들 삶의 철칙이다. 그 빈 계곡에 새소리가 가득 차고 물소리의 하아모니가 있다.
산은 저마다를 불러보아 사계절 아름다운 협연을 연출한다. 그 산으로 들어가 만난 숲은 큰 것들은 하늘 향해 기둥이 되고 작은 것들을 불러 모아 더불어 산림을 이루고 있었다. 사함들은 나무는 보고 숲을 보지 못하곤 하지만, 숲은 가까이 있으면서 먼 곳을 함께 보는 큰 가슴의 위대함을 품고 살았다. 자랄수록 비우는 일에 익숙하고, 그 숲에서 잉태한 작은 이슬들이 지혜의 햇살을 손뼉 치면서 계곡의 물줄기를 이루는 것이었다. 그 물줄기가 이내 평야를 가로지르는 강줄기가 되는 것이었다. 자연은 그렇게 아래로 굽어가면서 세상을 나지막하게 적시는 것이었다. 그렇게 세상에 귀 기울이며 흘러가 바다에서 철썩이는 것이다.
그 바다의 원천인 숲이다. 숲에 어스름이 지고 있는데, 그루터기는 탐욕의 도끼자국에 찍힌 채로 여전히 생명의 햇살을 흔들어댔다. 쪼개지고 부서진 나무 조각이 노을빛을 받을 때는 너무나 찬란했다. 제 살빛을 우려내 힘껏 어두운 숲을 향해 비추어대는 저 위대한 에너지의 근원은 무엇인가. 봄이면 햇살을 불러보아 수많은 엽록체의 기운을 숲으로 뿌리고, 여름이면 햇살을 가리며 숲의 청량제 역할을 하며, 그리고 겨울이면 죽어서도 저토록 뜨거운 햇살을 온몸으로 흔들어 뿌리다니. 그것은 참으로 경이로운 일이었다.
부서지고 아픈 그루터기가 어둠을 찬란하게 비추고
산등성이로 해가 뚝, 지고 밤이 왔다. 그루터기가 뿜어대는 빛은 더욱 선명하고 따뜻하게 숲으로 스며들었다. 사람의 살결마냥 생목의 속살을 드러내며 저력의 지난날을 확인시켜주던 그루터기의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그것은 어둠 속에서 피어 문 한줄기 생명의 환희였다. 벌어지고 찢겨진 채로 두 팔을 번쩍 들아 하늘 높이 처 올리던 잊을 수 없는 그 신비의 자태에서 많은 상념에 잠길 수밖에 없었다. 그 소리 없는 메아리는 아직도 귓전에 쟁쟁하고 찬란한 세밑의 귀한 말씀으로 육신에 차고 넘친다.
그랬다. 그루터기는 잘려나간 흔적을 통해 우리에게 버리고 비우는 삶을 일러주었다. 겨울 숲을 더욱 단단한 신념과 희생으로 빚어낸 희망의 끈을 동여매주던 그루터기. 그루터기 주위에는 늦가을 내내 빈혈을 앓던 나무들이 털어낸 녹 슬은 잎들이 수북했다. 서로를 보듬어 침묵으로 울타리를 두른 낙엽들은 봄으로 가는 희망의 어깨동무 중이다. 제 종족인 나무들의 밑거름으로써 속울음 울며 울음을 울며 썩어가는 것이다. 삶도 자연도 울어 썩어야 생명의 밑거름이 되는 것을. 그렇게 새봄의 찬란한 잎새의 나부낌이 오는 것임은 그들은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렇게 낮게 엎드려 사는 일은 숲의 일상이다. 위로만 처 올라가는 듯한 나무들이지만 제 키를 키우기 위해 땅 속의 넓이를 탐하지 않는다. 크면 큰 대로 작으면 작은 대로 그만큼의 뿌리를 내려 살아간다. 안분지족은 나무들이 살아가는 원리이다. 그렇게 숲은 자신을 뒤돌아보며 겨울나기를 하는 중이다. 걸어온 사계절의 발자취를 되새김질하는 중이다.
그 숲길로 노스님이 걸어가고 있었다. 뒤돌아보지 않고 떠나는 것은 이미 묵은 과거의 흔적을 지나왔음을 말해주는 것일 터. 걸어온 뒤안길을 안으로 썩혀 발효하며 무심으로 나아가고 있을 터. 그 그림자만이 뒷덜미에 남아 현세를 지나 미래로 향하는 길이 얼마나 장엄한 일인지를 웅변해주고 있을 뿐이다. 그 무심은 그루터기의 삶의 흔적과 너무 흡사했다. 그 삶의 잔영들은 외롭고 그리운 길들을 안으로 삼키는 선명한 나이테 같은 것이리라.
침묵과 빈손으로 사는 의미를 일러주는 풍경소리
오랫동안 비어 둔 암자에 온기가 돋았다. 그루터기의 잔영이자 살붙이인 장작불이 타닥, 탁탁 타올랐다. 살아생전 그루터기의 마지막 열정이 암자의 아궁이에서 불꽃 튀고 있다. 그 불꽃이 아랫목을 데핀다. 제 살결을 떠나간 나무 조각마저 타인의 아랫목을 데피는 삶이라니. 이 숲의 가장 아래를 차지한 그루터기가 끝내, 아랫목의 훈훈함으로 제 삶의 리얼리티를 저렇게 보여줄 주리야. 그 아랫목에서 가부좌를 틀 노스님을 그려보는 사이에 대웅전 처마 끝 풍경 소리가 들려왔다.
딸랑거리는 소리마다 생각은 과거로부터 미래로 가는 길목임을 느꼈다. 생목이 잘리어도 뿌리는 남아 생명의 심연을 이루듯, 삶은 떠나고 비우는 일에서 다시 또 다른 길을 향하는 거울을 삼는 것. 그 이정표에 소망을 비는 것. 풍경 소리 아래로 살금살금 내려온 어둠이 지상에 그림자 멍석을 깔고 있다. 암자에는 기침소리 몇 번 들리더니만 문지방 아래까지 대나무발이 내려졌다. 이내, 작은 불빛 하나마저 그림자의 빗장을 잠그고, 먼 길 돌아온 달빛이 나그네 발끝에 팔베개를 하고 있다.
그가 동안거에 들어가고 긴 시간의 여행을 떠난 사이에 이방인의 가슴에는 한 해 끝자락에 홀로 선 외로움, 불안감, 서운함, 삶의 원죄 같은 것들이 바윗돌처럼 도드라졌다. 뇌리와 가슴에는 쉴 새 없이 파도가 쳐대고. 묵언침묵이 흐르는 세상은 적막하고. 허공에서 밤기운을 털어내는 산새와 암자 빈 의자 아래로 바삐 사라지는 다람쥐의 움직임이 생명의 영상을 시나브로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모든 것은 생명의 일깨움을 잠시 보여주고 그것을 체득하며 사는 지혜의 여정인지도 모른다. 그 순간의 만남과 이별에서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소중함을 느끼는 것이 인지상정인지 모른다. 그런 자연의 일깨움에서 한 해 동안 수없이 뱉어내고 쏘아댄 말들이 풍경 소리에 털려나가고 남은 것은 빈손이다.
새해는 자연의 침묵과 빈손의 의미를 배워야겠다. 꽃피고 열매 맺어 다시 지상에 떨구고 가는 바람에 흔들리는 삶, 바람처럼 빈손의 삶을 살아야겠다. 다가온 새해에는 어둠이 짙어가는 산사에 물소리와 대숲만 스치듯이 가볍게 저물어 한해에 동행할 수 있어야겠다. 정녕 부드럽게 세상을 굽어보고 흘러가는 곡선의 생명 줄기여야 하겠다.
죽순의 삶 잊지 않고 부드럽게 휘어지는 대나무의 일생처럼
대나무처럼 서 있는 나그네에게 대숲이 그런다. 삶의 에너지를 키워준 죽순의 세월을 잊지 못한다고. 수많은 세월을 살아오면서 죽순의 삶을 생각하며 스스로 휘어지는 것을 배웠노라고. 대나무는 한 매듭, 한 매듭에 충실하며 살아온 단순한 듯 한 길의 일생을 살아왔다. 위로 쳐 올라갈수록 육신을 가느다랗게 다듬어 선명한 눈빛을 키워왔다. 마음 비워서 맺은 삶의 지혜들이 푸른 생명력이의원천이다. 갑자기 바람이 휘어진다. 대나무가 바람에 채찍소리를 냈다. 내 등허리를 치는 죽비소리로 들렸다.
삶의 편린들이 댓잎이 서걱인다. 대숲이 일제히 출렁인다. 마지막까지 숲을 빗질하는 저 대숲의 풍경을 바라보노라면 이제는, 누군가에게 먼저 빈 가슴을 내어줄 일이다. 그래서 타인의 옹골찬 삶을 보듬고 아름다운 동행을 할 일이다. 할 수만 있다면 나날이 그 삶의 여백을 넓혀갈 일이다. 풍경 소리만이 밤물결을 헤치면서 그루터기가 일러준 삶의 의미를 되새겨보면서 되돌아오는 길은 시종 “아무 말 없음”, “말이 필요 없음”이었다. 이 적멸하는 시간 속에 그저 젖어들고 있을 뿐이었다.
어쩜, 이 뒤안길에도 눈이 내릴 것이고, 눈이 내리면 그 길마저 지울 것이다. 눈마저 쉼 없는 느낌표로 내려 지상을 다 덮고 나면, 무욕의 땅은 아름다운 여백으로 남을 것이다. 그렇게 그 빈자리에 신새벽이 열릴 것이다.
박상건(시인.계간 섬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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