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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고도 경주에서 시인들 ‘뜨거운’ 시 축제 열어

섬과 문학기행/시인을 찾아서

by 한방울 2006. 11. 20.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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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록집 발간 60주년 세미나에서 인사말을 하는 오세영 한국시입협회장

 

청록집 발간 60주년과 한국 서정시의 초상


한국시입협회(회장 오세영)는 지난 18일부터 19일까지 경주에서 박목월, 조지훈, 박두진 등 청록파 시인의 청록집 발간 60주념 기념 시 축제를 열었다. 18일 서울 운현궁에서 3대의 버스를 나눠 타고 출발한 지 5시간 30분 만에 도착한 경주 보문단지 행사장에는 전국 각지에서 모인 시인들로 장사진을 이뤘다. 이날 행사에는 김종길 성찬경 유종호 허영자 이수익 정진규 유안진 윤후명 나태주 구재기 조정권 박찬 정일근 남진우 박주택 배한봉 박찬일 손택수 등 시인과 평론가 300여 명이 참가했다.


시인협회 오세영 회장 개막사에서 “청록집은 해방기 한국문학 뿐만 아니라 한국 시사에서도 매우 중요한 의의를 지녀 천년 고도 경주에서 뜻 깊은 행사를 치르게 되었다”면서 “당대의 정치논리나 사회상의 영향으로 청록파 시인들의 문학적 위상이 거의 간과되고 과소평가되어왔으나 최근 문단 외적 상황이 안정되고 문학에 대한 인식도 정치 논리를 떠나 본래성을 회복하고 순수문학에 대한 갈망도 점차 증대돼 재조명의 시간을 갖기로 했다”며 행사 취지를 설명했다.


‘청록집’은 1946년 6월 을유문화사에서 국판 반양장으로 114면으로 발행된 시집으로 박목월의 시 ‘청노루’에서 따온 것이다. 이를 계기로 세 시인을 청록파라고 불렀다. 세 시인은  ‘문장(文章)’지를 통해 정지용 시인의 추천으로 데뷔했다. 당시 좌우익으로 갈린 문학판에서 청록파들은 정치 외적 자연을 소재로 한 서정시를 지향했다. 특히 박목월은 향토적 서정을, 조지훈은 민족정서와 전통의 향수, 박두진은 시대적인 수난과 절망을 불멸의 생명력으로 초월하려는 자연융화의 시풍을 보였다.


첫 무대에서 '종소리'라는 시를 낭송 중인 서정춘 시인

이날 행사의 공식명칭은 ‘청록집 발간 60주년기념 한국시협 정기세미나’. 그래서 첫 프로그램도 세미나로 시작했다. ‘21세기에 읽은 청록집’이란 주제의 기조강연에서 유종호 평론가(연대 석좌교수)는 “서정시는 쓰기만 힘든 것이 아니라 수용과 음미도 어려운 상황”이라면서 그 이유는 “마르크스는 자본의 작동을, 프로이트는 성의 작동을, 니체는 도덕의 기원과 작동을 폭로하는 등 폭로의 모티브에 향도된 고양 체험에 감염된 현대인들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폭로의 논리와 현대인의 관계는 무엇인가? 그것은 의심과 불신의 눈초리를 자극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그는 “해방 직후의 정치적 질풍노도기에 ‘청록집’이 현실 도피라는 비판을 받은 것은 사실이나 서정시 쓰기가 힘든 시대는 역설적으로 서정시가 절실히 요구되는 시대”라고 강조했다. 또 “암흑기에 쓰인 청록집 시편들은 우리말의 세련됨을 잘 나타낸다는 점에서 한 극점(極點)을 보여주었고 세 시인 모두 언어 조탁에 힘써 높은 서정적 성취를 이뤘다는 점은 언어의 남용이 심한 우리 시대에 하나의 질타가 되어준다”고 평가했다.


육영수 여사와 박목월 시인 일화 공개로 갑론을박

다음으로 ‘청록파의 상상세계’라는 제목의 주제 발표자에 나선 남진우 시인(평론가 겸 명지대 교수). 원고에는 ‘고전으로서의 청록집’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었다. 그러나 원고 없이 단상에 오른 남진우 시인은 한 선배 시인으로부터 전해들은 박정희 대통령 시절, 비오는 날 청와대 경내를 걸으며 육영수 여사의 치마폭을 들어준 박목월 시인의 일화를 꺼내들었다. 행사장은 술렁였다. 이내 토론 시간이 다가오자 이건청 시인이 “굳이 오늘  이 자리에서 시중의 풍문을 꺼낸 이유가 뭐냐?”고 따졌다. 허영자 시인도 단상 앞으로 나와 스승 박목월 선생은 애당초 육 여사를 한 여인으로서 존경해왔고 육 여사를 사랑하는 모임까지 구상했다면서 그것은 단지 한 예술인이 갖고 있는 감성과 순수성의 일환이라고 설명했다.   


이날 해프닝은 행사진행이 지연되면서 사회자가 발제와 토론자에게 간략하게 끝내달라는 주문하면서 부터였다. 앞서 기조발제를 하던 유종호 교수 역시 “무사히 서울까지 가려면 사회자 시키는 대로 해야한다”면서 가벼운 대화체로 발제를 대신하고 단상을 내려왔다. 이어 남진우 시인 역시 원고 외적 에피소드를 소개했던 것인데 원고 내용을 거두절미한 채 직설화법으로 일화를 소개하는 데 그쳐 아직 원고를 읽어보지 못한 대부분 참석자들은 당황했던 것.


답변에 나선 남 시인은 박목월시인의 문학적 업적에 비해 부정적이고 가볍게 평가되는 풍토를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실제 행사 프로그램 책자에 실린 원고 서두에는 “청록집은 출간 즉시 당시 이념적 대립에도 불구하고 집중적인 주목을 받았고 이후 한국 현대 시문학을 대표하는 정전 가운데 하나”이고, 본문에서는 “목월이야말로 세 시인의 정신적 지향점을 가장 투명하게 증류해서 드러냈으며, 의도적이라 한만큼 외래 문명과 근대 문화에 등 돌리고 생활현장과 거리가 먼 자연세계의 풍경과 정한을 노래해 우리의 시가 잃어버린 근원적인 것을 가리켜 보이고 있다”고 평가했다.


두 번째 주제발표는 서울대 방민호 교수(평론가)의 ‘청록집에 나타난 리듬의 의미와 최근 현대시’라는 제목이었다. 방 교수는 서정주, 김소월의 리듬을 분석해가다가 시인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에 작품을 거론하며 맞춤법이나 띄어쓰기가 정교하지 않은 데 주목했다. 방교수는 “이는 리듬창출하기 위해 짜맞추는 그 어떤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하면서 정지용, 청록집에 이르는 현대시의 리듬의식을 나름대로 분석했다. 이에 대해 지정 토론자 한명희 시인(강원대 교수)은 “한용운 시인도 그렇게 시를 썼다”면서 “이는 당시 시인들이 맞춤법 등에 별 신경을 쓰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냐?”며 이의를 제기했다. 그러나 방교수는 “논쟁하고 싶지 않다”, 사회자는 “학술 세미나가 아니다”라는 이유로 토론을 자제시켰다. 


경주의 곽홍단 시인의 시낭송과 무용

 

 

여백은 사상과 사랑의 여지를 위한 서로의 완충지대이다

이러한 풍경들은 시인들의 세상에서만 볼 수 있는 진풍경이기도 하다. 원칙이 원칙 아닌 것으로 통용될 수 있으면서, 때에 따라서는 원칙 아닐 수 있는 사례가 전통 정서를 배격하기에 수용하기 곤란하다는 잣대이다. 서양의 합리성(合理性)과 동양의 통정성(通情性)의 충돌이기도 하다. 논리적으로 보면 객관성과 주관성의 충돌 혹은 혼재이다. 서로의 잣대가 틀리면 궁극적으로 공정성의 잣대도 달라진다. 누가 누구를 탓할 수 있는 풍토 자체가 곤란한 것이다. 그런 풍토에서는 입구와 통로, 대화와 토론, 열림과 닫힘의 개념이 모호해질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여백이라는 게 있다. 그런 여백을 찾아 가는 길이었을까. 세미나장에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시인들은 물 흐르듯 이날 행사의 하이라이트인 ‘축하 시 낭독 및 공연’행사장으로 이동했다. 아나운서 뺨치는 목소리의 박주택 시인(경희대 교수)이 사회를 맡아 분위기를 반전시켰다. 맨 먼저 서정춘 시인의 작품 ‘종소리’가 무대에 올랐다.


한 번을 울어서

여러 산 너머

가루가루 울어서

여러 산 너머

돌아오지 말아라

돌아오지 말아라

어디 거기 앉아서

둥근 괄호 열고

둥근 괄호 닫고

항아리 되어 있어라

종소리들아      

- (서정춘, ‘종소리’ 전문)


68년 <신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서정춘 시인의 시는 늘 짧다. 말은 짧아서 문제가 되기도 하지만 시는 짧아서 더욱 아름다웠다. “여기서부터, -멀다/칸칸마다 밤이 깊은/푸른 기차를 타고/대꽃이 피는 마을까지/백년이 걸린다” ‘죽편1-여행’이란 시도 그렇거니와 그의 시는 늘 깊은 울림으로 묻어두게 하는 마력이 있다. 시는 짧지만 읽고 나면 더 할 말마저 없게 만든다.


파문은 늘 가슴 깊은 곳에서 홀로 길게 일렁인다. 그가 30년 만에 첫 시집 냈을 때, 신경림 시인은 “30년에 34편의 시라니. 참 놀랍고 나로서는 부끄럽기 짝이 없다”면서 “한 편 한 편 뼈를 깎듯이 새겨놓은 그 공력 앞에 우선 경의를 표한다”고 말했었다. 청록집이 담고 있는 침묵의 언어 속에는 ‘화해와 초월’, ‘영혼과 자연’의 만남이 맞닥치고 있다. 짧은 시낭송 에서 오늘 우리네 모든 언어는 그냥 항아리 속에서 울게 하자는 말로 들렸다. 오염되지 않은 채 영원히 저 혼자 삭히고 익어서 가루가 되고 향기가 되라고.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이데올로기와 문학, 순수와 참여 등 ‘경계’라는 그 단어마저 ‘경계 없음’이라는 산 너머에 신기루로 흩어지게 하라고.

 

오은명 과천시 민속에술단장의 '승무' 춤사위 장면 

 

 

이어 노향림 시인의 ‘종이학’, 이영춘 시인의 ‘태를 찾아가는 길’, 서지월 시인 ‘신라의 하늘이 숨쉬고 있는 증거’, 배한봉 시인의 ‘비 맞는 무화과 나무’, 손택수 시인의 ‘불국사 대웅전 마루에서’ 송반달의 ‘햐, 붉다’ 등 17명 시인이 릴레이로 시를 낭송했다. 그리고 박영국 교수의 명징한 바리톤으로 그리움, 이별의 노래를 들었고, 오은명(과천시 민속예술단장)의 승무 공연 때 참석자들의 호흡소리마저 끊길 정도로 빨려 들어가는 듯 했으며, 북채소리가 연이어질 때는 두 번에 걸쳐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이날 공식 행사는 울산 시노래패 푸른고래의 박두진 시인의 ‘해야 솟아라’ 공연과 백상승 경주시인, 원로시인들의 인사말로 행사를 갈무리했다.


밤이 깊어가자 시인들은 삼삼오오 모여 친목을 다지며 시와 노래를 불렀다. 이 자리에서 많은 이야기가 쏟아져 나왔다. 남진우 시인의 강연 후유증 탓인지 빨리빨리 풍토와 직설적  어법과 느릿느릿과 은유적 어법 등 젊은 층과 노장년층 정서적 차이에 대한 허심탄회한 대화들이 많았다. 폄하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었다는 측과 첨예와 대립을 몰고 온 것은 잘못이라는 양비론도 소주잔의 안주거리였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경주에 모인 모든 시인들은 젊거나 원로이거나 중진이거나 문학의 본령을 지키자는 데는 한 뜻이었고 시인협회가 더욱 젊어지도록 젊은 시인들이 많이 참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많았다. 이념과 세대를 넘어 문학의 한마당으로 가자는 데는 모두가 양시론이었다. 그런 마음을 안고 둘째 날 시인들은 보문단지 세미나장을 나와 목월문학관 등 천년고도 경주의 문학과 역사를 찾아 아름다운 동행에 나섰다. 


 글, 사진: 박상건(시인. 계간 섬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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