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을 찾아서 ⑬오세영
자연 떠돌며 고독한 삶을 관조하는 실존적 낭만주의 시인
문단 줄서기 거부하고 꿋꿋한 시쓰기와 평론가 길 걸어
*고독과 실존에 천착한 낭만주의자
오세영 시인을 만나러 가는 날, 관악 캠퍼스에 봄비가 내렸다. 교문을 들어서자 가지치기 해놓은 단당풍 나무 잎맥마다 빗방울이 영롱하게 맺혀 있었다. 저것을 봄의 혼령이라 불러도 좋을까. 새싹들은 저 빗방울 머금으며 찬란한 봄을 꿈꾸고 있을 터. 언젠가 시인의 에세이를 읽은 적이 있는데, "인간은 봄을 꿈꾸지만 그 꿈은 가을에 비로소 깬다"라고 했다.
저렇게 물오르는 봄도 어느새 갈잎으로 변해 뚝뚝 떨러진다는, 떨어지는 그 모습이 비장하기조차 하더라는. 그래서 우리네 삶도 사랑도 화려한 저 봄의 꽃들처럼 최선을 다하고 스러진다는, 그런 빈손이 아름답다고 말하던 오세영 시인. 고독을 즐길 줄 아는 시인, 그런 그이를 찾아 연구실로 가는 길목에 울긋불긋 우산을 쓰고 오가는 학생들의 모습에서 새 학기 봄 풍경은 더욱 운치 있고 활기차 보였다.
그러면서 그렇게 익어 가는 청춘을 반추해 보았다. 봄비 속에 그이는 우산을 던져 버린 채 비에 젖어 생각에 잠겼다. 호숫가에 선 그이의 뒷모습을 먼발치에서 바라보면서 영락없는 낭만주의 시인이라는 사실을 가늠할 수 있었다.
오세영 시인은 이 학교 국문과 61학번. 참 많은 세월들이 흘렀다. 이희승 선생님 등 국어학자들이 대를 이어 온 이 학교에서 문학의 끈을 놓지 않고 예까지 오기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 시절 스승들은 문학을 하려면 서라벌예대(중앙대)나 동국대를 가라했다. 세상이 이리 변할 줄 누가 알았으랴. 요즈음 대학교라는 명찰을 다는 곳마다 문예창작학과가 들어서고 있으니 말이다.
어쨌든 그이는 고답적인 국립 서울대에서 문학을 포기하지 않은 채 현대문학을 가르치며 학자로, 시인으로, 시론가로서 문단에서 그 위상을 확고히 했다. 나아가 문단권력이 팽배한 현실 속에서 줄서기를 거부하며 순수 창작에 전념한 시인 가운데 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래서 요즈음 젊은 비평가들이 영악하게 문단에 줄서는 풍토를 보면 안타깝기 그지없다.
한편 잘 나간다는 대 선배의 작품을 과감하게 비판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김수영 시인의 풀이 시인의 죽음을 예견한 시라거나 민중시라는 해석을 거부하고, 무의미의 시를 주장하는 김춘수 시인의 작품에 대해서 좀 더 긴 안목으로 관찰하고 싶다며 평가를 유보한다는 것처럼 말이다. 의미 없는 시는 시일 수는 없다는 게 그이의 생각이다.
*낯선 곳으로 여행 통해 자연을 노래하고 삶을 관조
이런 세상과의 거리를 두고 사는 그이는 산행과 여행을 즐긴다. 늘 낯선 곳으로의 여행이 그이를 유혹하지만 그이는 이 유혹만은 물리치지 못한다. 내 편 네 편 편을 가르지 않고 서로 어깨 걸고 나아가는 저 산하에서 그이는 삶과 철학을 체득한다. 관조하는 삶에서 철학의 메시지를 읽는다. 그런 탓에 해마다 여름과 겨울이면 백담사 등 산사에서 보름 정도 머물면서 시를 쓰며 보낸다.
"한나절 산문(山門)에 기대어/싸락눈을 맞고,/한나절은 바람벽에 기대어/먼 산을 바래고,/한나절은 활활 타오르는 화주(火酒)로,/울음을 태우"는 탈속의 시인이 되기를 꿈꾼다. 눈밭에 빠지고 미끄러지고 쉬엄쉬엄 걸으면서 사색을 즐긴다. 낙엽 밟는 소리에 놀란 산짐승 한 마리가 절벽 바위 틈에서 물끄러미 그이를 쳐다보고도 도망가지 않는 것을 보면 짐승들도 악의 없는 사람은 금방 알아보는구나 싶어진다. 한동안 그 짐승과 마음의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그렇게 그이는 산에서 산인 채로 이녁을 지우고 선시를 쓰곤 한다.
스스로 고독에 빠지고 고독에 절망한다. 어차피 삶은 소멸이다. 산정에 외로이 누운 묘지 하나가 징표로 서 있지 않던가.
그러나 소멸은 생성을 꿈꾼다. 풀이 죽어 두엄더미가 되고 두엄더미가 썩어 다시 풀뿌리를 키워내듯이 말이다. 그렇게 생각을 바꾸고 비워내고 다 비워낸 가슴에 한 폭의 산수화가 들어찬다. 시인은 그런 산수화를 그리며 노래하고 그러다 보니 어느덧 이녁이 산수화 속에 화룡정점으로 꽂혀 있기도 한다. 그렇게 자연을 노래한다는 면에서 그이는 자연주의자이기도 하다. 자연에서 삶의 절망과 번뇌를 문지르며 희망을 캐는 모더니즘적 서정시인이다.
그이는 이번 겨울방학 중에 문우들과 중국 여행을 다녀왔다. 무릉원 등 신비로운 자연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장가계의 추억이 새롭다. 무릉3협의 삼국지 유적지들은 웅대하면서도 아름답고 기이하면서도 신비스러웠다. 양자강 주변 퇴고의 생태계는 웅대하면서도 아름답고 기이하기만 해 그만 넋을 잃었다. 지난해에도 1,500년의 시간을 뛰어 넘어 실크로드 번성기 과거로 시간을 거닐었다. 시시각각 변하는 지형과 그 지형을 기반으로 삶을 이어가는 소수 민족들의 생활 양식을 살펴보면서 색다른 감동을 받았단다. 꿈틀대는 중국, 실크로드를 길은 중국 대륙의 거대함을 실감나게 해주었고, 타클라마칸 사막에서 신기루의 실체를 확인했는 데 그것은 실크로드의 관문인 광활한 사막의 양관. 그 신기루를 보고 그는 "가슴에 뜨거운 태양을 안고 궁구는 내 사랑"이라고 노래 불렀다.
사막의 열기를 뚫고 천산산맥과 곤륜산맥의 초원지대를 지나자 중국의 끝이자 중앙 아시아와 파키스탄으로 넘어가는 관문 무스타크산(Mustag. 빙산). 눈이 녹아 만들어진 빙산호 라는 호수 주변에는 태고의 암벽과 만년설이 어울려져 장관이었는데, 이 광경을 보고 파미르라는 미발표 시 열 편을 썼다. 그이는 파미르에서 시간의 배 멀미를 했다고 말했다.
거대한 산맥을 끼고 걸으며 느꼈던 그 시간의 배멀리....나무 한 그루 없는 기이한 바위섬, 텅 빈 사막, 자연의 경이감 앞에서 삶의 덧없음을 느꼈다. 인생무상이라. 연륜이 쌓일수록 이별하는 우리네 삶. 그래서 "참다운 소유는 빈 그
릇"이라고 노래한다. 무소유의 삶을 노래한 그이를 일러 평론가 이숭원은 "소멸의 미학과 비움의 철학", 정끝별은 "역설과 모순으로 일궈낸 동양시학", 김수이는 "이성적 사유, 고독과 사랑에 대한 낭만적 열정"이라는 규정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그이는 중국 여행 때 돌아오는 길에 중국 상해를 구경했는데 10년 전에 본 광경과 너무 달라 놀라다 못해 큰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특히 황퓨장(黃浦東) 일대를 구경했는데 이곳은 중국정부가 90년 포동개발 계획 발표이후 도시 이미지며 경제적으로 놀란 변화를 거듭하고 있는 곳이다. 그이는 한국인으로서 우울한 마음을 떨치지 못했다. 중국이 우리 나라를 앞지르고 있다는 느낌 때문. 우리 조상들이 중국에 사대했던 시절이 또 오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는 현실 앞에서 마음이 참 무거웠단다. 괜스래 슬퍼졌던 그이는 상해에서 교포 유학생들과 하룻밤 묵으면서 시 낭송회를 갖고 돌아왔다.
*사랑도 삶도 함께 가자는 메시지, 인간상실 문화 강한 비판
오세영 시인은 이처럼 시에 동양사상과 실존주의적 정서를 깔고 있다. 다시금 찬찬히 들여다보면 존재와 허무 사이에서 모든 것이 노래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삶은 존재와 무. 있고 없음의 철학이란 곧 우주 생성과 소멸, 삶과 죽음이다. 그 코드에 고독이나 사랑이 걸쳐 있다. 결국 고독과 사랑은 실존을 찾아가는 도구이다. 오세영 시인의 시 방정식이란, 마치 바다의 파도처럼 뜨겁게 일어섰다가 이내 사라지는, 소멸의 장면이 파노라마로 펼쳐지는 것이다.
이를테면 그릇이라는 시에서 그릇은 흙, 불, 물로 빚어진 것이다. 이 세상 생명의 근원이 그릇의 구성요소이다. 하나의 고체에 꿈틀거리는 생명이 있다는 메시지. 그런데 그 그릇은 이내 깨지고 만다. 인간의 만남도 이별로 회귀하며 결국은 소멸하는 것. 우리가 꿈꾸는 공동체도 균열이 지면 부서지는 것. 하찮은 생활 속의 진리가 그릇이라는 소재를 통해 철학을 옷을 입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인생은 더불어 살라 말한다. "이승의 한 세상은 서로 서로가 맺는 인연의 실타래요, 또 그 결과이다. 하물며 하나의 생명을 대함에 있어서랴. 우리는 타인과 맺는 인연이 악연이 되지 않도록 항상 자신을 성찰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강조한다.
오세영식 시의 맛은 바로 이러한 쫄깃쫄깃한 화두가 함께 한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시의 가락 속에서 뛰쳐나와 우리의 영혼을 휑구어 준다고 생각하면 이 또한 즐거운 시감상의
맛이 아니겠는가. 그렇다. 오세영 시인의 시는 많은 사랑과 그리움, 절망이나 분노를 이야기하지만 그 아랫도리에는 늘 철학과 사상의 샘물이 흐른다. 사랑과 그리움이 대중가요처럼 질질 짜거나 통속적이고 천박하지 않다. 서정성이라는 시의 본류를 견지하고 있다.
그이는 눈물을 이렇게 노래한다. "정신이 말갛게 닦기 위해선/눈물이 있어야 하는 법", "사랑이 불로 타오르는 빛이라면 슬픔은 물로 타오르는 빛", "인생이란 눈물의 담금질로 정련할 무쇠, "물도 불로 타오를 수 있다는 것은 슬픔을 가져본 자만이 안다". 종교철학과 삶의 체험이 버무려진 명구들이다. 물론 어디까지나 체험이 묻어 있다는 점이다. 일반인들이 이런 시를 무작정 따라하다가는 관념시나 격언 베끼기로 빠질 가능성이 크다. 가락 없고 깊이 없는 한 구절의 단문을 시라고 우길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그것 또한 오세영 시의 함정이기도 하다.
체험적 시 쓰기란, 동백꽃을 바라보며 "아름다움은/항상 가슴에서 타오른다"고 표현하거나, "육신이란 사랑으로 못질해서 이루어낸/한 채의 목조가옥"이라고 사고를 확장하는 대목에서 만만찮은 시 작업이 필요함을 일깨워준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잠들지 못하는 건/파도다. 부서지며 한가지로/키워내는 외로움"이라 노래한다. 악기라는 시에서 "박수는 항상 이별을 위한 축제"라고 명명한다. 공연이 끝난 직후 그 허전하고 공허함에 빠져 본 사람이라면 이 악기의 장엄한 침묵의 파장을 이해할 것이다. 그렇다. 그이는 이처럼 흔하디 흔한 일상의 단어들, 즉 인생, 사랑, 이별, 슬픔, 그리움, 장미, 벚꽃 등을 즐겨 쓰면서 소심하고 연약한 정서에 머물지 않는다는 장점을 소유하고 있다.
체험적 메시지가 함축적이면서 날카롭다. 그래서 때로는 이 시대의 자본과 문명 이기에 대한 강한 비판을 하기도 한다. 햄버거를 먹으면서 "아메리카의 사료를 먹고 있다....음식의 독재, 자본의 길들이기"라고 단언한다. 젓가락으로 콩자반을 들어올리던 젓가락 문화의 저력. 천천히 즐기던 우리 문화, 큰 고모 작은고모 아랫목에 둘러앉아 온 식구가 정겹게 식사하던 풍경들을 앗아가 버린 햄버거의 비극. 밥이
아닌 사료더미를 씹어 먹는 이질화되고 기계화 된 문화 속에 갇힌 우리네 자화상을 몇 개 시어로 묘사하고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목에 건 핸드폰에 대해 "오늘도 외출을 하면서/개띠처럼/목에 휴대폰을 건다."라고 묘사한다. 사람 목에 건 개띠라... 그 시절 잔잔한 옛정과 정다운 문화를 상실한 증거물인 핸드폰 목거리가 왜 이리도 선명하게 부각되는 것일까. 이처럼 자본주의 부패상과 인간상실을 꼬집는 감성적 지식인이자, 시인, 학자로서 그이는 오늘도 스스로 절망하면서 실존을 터득하고 있다. 그렇게 깨진 것들은 다시 칼날이 되어 일어서
면서 말이다.
"깨진 그릇은/칼날이 된다.//절제와 균형의 중심에서/빗나간 힘,/부서진 원은 모를 세우고/이성의 차가운/눈을 뜨게 한다.//맹목의 사랑을 노리는/사금파리여,/지금 나는 맨발이다./베어지기를 기다리는/살이다./상처 깊숙이서 성숙하는 혼(魂)//깨진 그릇은/칼날이 된다./무엇이나 깨진 것은/칼이 된다." ( 그릇 1 전문)
깨지기 전의 그릇은 공동체적이고 아름다운 민족문화의 상징, 잘 빚어진 질그릇이다. 그러나 다국주의 물결이나 인간 이기주의에 의해 부서졌을 때 우리가 보듬던 사랑도, 삶도, 희망도 아픔으로 깨지고 마는 것을. 아픔은 칼이다. 가슴 깊이 처박힌 멍 자국이다. 우리는 그런 깨진 그릇이 되지 말자. 한 점 진흙이 달라붙어 한 살붙이가 되자. 낮게 낮게 물이 되고 누군가를 위해 뜨거운 불이 되자. 소멸하는 그 순간까지 말이다. 그런 메시지를 나즈막히 던져준다. 부서지는 절망이 절망으로 끝나지 않는 것도 시의 매력이다. 버려진 유리병에서 생명을 찾고 희망을 노래한다. "버려진 것이 아니다./뒹구는 유리병,/그 공간에도 별은 뜨고/가슴은 비어"있다고 노래한다. 하찮은 유리병에 별이 뜬다? 유리병은 곧 우주이다. 버려진 것이 아니라 유를 창조한다. 닫힘이 아니라 열림의 세계이다. 그것은 우리들이 가야할, 우리들이 꿈꾸어야 할 세상이기도 하다.
*메뚜기 잡고 강에서 헤엄치고 이국의 소녀와 펜팔하던 어린 시절
오세영 시인은 전남 영광 출생에서 출생했다. 출산 후 100일까지 선친의 고향에서 머물렀다. 나머지는 외가인 장성에서 월평초등학교 3학년까지 살았다. 외가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된 데는 아버지의 죽음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서울 경성공전 재학생으로 졸업 때까지 어머니를 친정에서 머무르게 했다. 며느리 시집살이를 안타까워하는 외조모의 배려이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는 어머니가 23세 때 전염병으로 돌아가셨다. 어머니에게는 결혼 2년만의 슬픔이었다. 어머니는 그 후 오랫동안 심장판막증을 앓으며 고생하시다가 시인이 아직 결혼을 못한 30세 때 5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지금 생각하면 어머니 수발 한번 못해 드리고 이승을 떠나게 한 것이 깊은 한으로 남아 있다. 어릴 적 시골에서 벼밭에서 메뚜기 잡는 일을 즐겨 했다. 그 논둑 길을 달리던 상쾌한 날들이 잊을 수 없다. 어느 날에는 조무래기 사내들이 뱀을 돌팔매질로 잔인하게 때려 죽였던 모습을 본 후 그날 밤 악몽에 시달리기도 했다.
할머니는 하찮은 미물이라도 죽이면 안된다고 소년 세영을 타일렀고 그 이후로 어린 자식들은 아버지 영향을 받아 생명을 소중히 하는 삶의 태도를 가지게 되었다. 성묘 때 방아깨비를 잡아 가지고 놀다가 아버지로부터 호되게 꾸지람을 들은 뒤 날려보낸 일도 있었다. 이런 일도 있었다. 그이는 어릴 적부터 나룻배로 영상강 지류인 황룡강을 건널 때마다 시퍼런 물굽이를 보며 죽음의 유혹이나 저승을 떠올릴 정도로 물을 무서워했다.
지금도 해수욕장을 가면 이녁 가슴보다 깊지 않은 안전지대를 알아 놓은 후 물장난을 할 정도이다. 이런 고질병이 생긴 것은 초등학교 3학년 무렵 강물에 빠져 익사 직전에 구출된 사건 탓. 마을 앞에는 일반인 출입이 봉쇄된 나환자들만이 사는 섬이 있었다. 황룡강의 장진도가 만든 강속의 강변 모래 언덕에 무성한 아카시아 숲을 이룬 아름다운 섬이었다. 어느 날 이 섬에 호기심이 발동해 친구와 헤엄쳐 건너려는 순간에 숲 속에서 험상궂은 두 사나이가 불쑥 나타났다. 문둥이가 사람 잡아 먹는다는 말을 떠돌던 시절이라 공포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필사적으로 물 속으로 뛰어들었는데 결국 정신을 잃고 말았다. 다행히 거룻배로 고기를 잡던 어부에 의해 목숨을 건졌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읍에서 동냥질하고 돌아오는 불쌍
한 문둥이들이었는데 왜 그렇게 놀랐던지 웃음이 절로 난다. 이 익사체험으로 인해 그이는 요즈음에도 냉수를 마시거나, 머리를 감거나 할 때 질식할 것 같은 공포감에 사로잡히곤 한단다. 생각해보면, 대개 좌절감이나 우울증에 빠져 있을 때, 사색에 몰두하거나 시 창작에 고심할 때인 것 같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래도 작품에는 물과 불이 자주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그이는 전쟁 때 광주로 피신, 광주 수창초등학교를 다녔다. 어린 시절을 비교적 유복하게 보냈지만 전쟁 중에 외가가 철저히 몰락했다. 이는 소년 오세영이 가난과 싸워 나가야 하는 운명의 예고편인 셈. 호남에서 기독 명문사학으로 불리는 전주 신흥중고등학교를 다녔다. 중2 때 양영옥 선생님을 통해 김소월을 알게 되고 모파상과 하이네를 접했다. 그것이 문학을 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선생님은 사회과목 전공이었는데 다른 과목 선생님이 결강하면 의례 보강을 도맡았는데 자습보다는 책을 읽어주었다. 늘 가정 문제를 물으며 학생들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소년 세영과 친구들이 대충 대충 청소해 놓고 가면 다음 날 제일 일찍 나와서 청소를 하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그 선생님은 후에 지금 모교의 교장을 하시다가 지금은 은퇴하신 후 사회교육에 열중하신다고 했다.
중 3 때는 미국인 선교사 소개로 해외펜팔을 했다. 미국 위스컨신 주 라이스레이크라는 소읍에서 아버지는 조그마한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금박의 이국 소녀였다. 어느 날 f 그녀는 소년 세영의 모습이 궁금하니 사진 한 장을 보내달라고 했다. 세영은 시내 사진관을 찾아가 사진사에게 가급적이면 잘생긴 모습으로 찍어 달라고 신신당부했다. 그리고 봉투에 사진을 넣으려는 데, 웬일인지 불안감이 엄습했다. 행여 내 얼굴에 실망하지나 않을까 하는. 흑백 독사진을 꺼내 유심히 들여다보던 그이는 이녁이 생각하는 아름답고 해맑은 소년의 모습이 결코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두 눈이 짝짝인 점에 더욱 충격을 받았다. 오른쪽 눈은 큰 데 비해 왼쪽 눈은 작게 찍혀 있었다. 세영은 카메라에 이상이 있거나 사진사가 수정을 잘못했다는 결론을 내리고 사진사에게 불만을 토로했다.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실수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사진사는 슬며시 웃으며 사진은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세상 사람 가운데 동일한 크기의 두 눈을 가진 자는 드물며 세영의 두 눈 역시 짝눈이 사실이라고 덧붙였다. 이국의 소녀로부터 퇴짜 맞지는 않았지만 이 일이 있고 나서부터 이녁 얼굴이 잘생긴 편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할 줄 알고 보다 겸손하고 자기를 객관적으로 성찰케 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회고하는 오세영 시인. 그 이후 소녀는 대학에 진학할 무렵 소식이 끊겼는데 몇 년 전 교환교수로 미국에 체류할 때 그녀의 집을 방문하였다고 한다.
고교 때는 전주시내에서 문학동인을 만들어 활발한 문학활동을 했다. 그 때 시인이 되고자 마음먹었다. 고교 1학년 때 교내 백일장에서 아카시아라는 작품이 장원이 된 것. 그러나 돌이켜 보면 천성적으로 내성적이었고 그래서 노트에 그림이나 낙서를 하며 지냈었다. 문장을 숭상하던 집안 분위기도 한몫을 했다. 호남의 명유인 하서 김인후 선생의 직계 후손인 외조부의 책 읽는 소리는 참 낭낭하기만 했고 송강 정철 선생의 후손인 외조모의 가르침과 별당 마루에 앉으면 들려오던 대숲 바람 스치우던 소리, 황룡강을 돌고 돌아가던 기적소리, 강촌의 저녁 냉갈, 학교 빨간 담장을 에워싸던 아카시아꽃 풍경 등등.
그이는 고 3이 되어야 비로소 서울대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외가 집안인 고려대학교를 가고 싶어했지만 워낙 가난해서 호롱불을 켜고 희미한 불빛 아래서 책을 읽으면 시커먼 끄스름이 맺히고 눈은 충혈돼 감겨지던 시절. 가난 탓에 원광대와 국학대(우석대) 장학 선발시험을 치루어 장학생으로 선발됐다. 그러나 국학대에 등록한 날, 친구와 함께 가서 본 연세대 모습은 꿈 같은 학교였다. 이미 원서를 낸 학교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벤치에서 그이는 원서를 찢어버리고 갖은 고생을 하며 재수를 했고 이윽고 서울대 국문과에 입학했다.
(이하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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