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 박상건씨는‘어디서 본듯한 것 같아도 가까이 들어가면 전혀 새로운 감동으로 다가오는 산을 지닌 것은 우리나라의 축복’이라고 말한다.
박상건 시인
때가 묻지 않은 맑은 동심, 꼿꼿한 기개
글 이성부|(sungboolee@hanmail.net)
사진 남영호 기자(mirr05@freechal.com)
박상건 시인.
전남 완도 출생. 1991년 <민족과 지역>으로 등단,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경인매일>에서 기자 생활을 했으며 기자 노조위원장, 기협분회장으로 언론 민주화를 위해 노력했다.
<경기도민일보> 차장과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뿌리깊은나무> <샘이깊은물> 편집부장을 역임했다. 현재 문화선교대학원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섬문화연구소‘를 운영하면서 계간 <섬> <오크노>를 펴내고 있다.
옛 사람들은 ‘시인(詩人)’을 직업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이 생업이 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글을 배운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시를 썼고, 시를 즐겼다.
시야말로 사무사(思無邪)의 경지이자, 세속에 오염될 수 없는 최고의 덕목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선비정신은 곧 시인정신이며, 시인정신은 세속과 타협하지 않고 불의를 인정하지 않는 맑음과 기개를 상징하기도 한다. 지리산 아래에 은거하면서 조정의 부름에 일절 나아가지 않았던 남명 조식, 나라가 망하자 절명시 네 수를 쓰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매천 황현의 생애에서 우리는 위대한 시인정신의 귀감을 보게 된다.
요즘은 ‘전업시인’이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시를 직업적으로 쓰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꼿꼿한 시정신이나 대쪽같은 선비 기질을 내보이는 시인들은 드물다. 물질만능의 세태와 도덕불감증의 사회 풍속 때문일까? 바로 이러한 세상일수록 시인정신과 선비정신은 더욱 필요하고 값진 것이라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시인 박상건(41세·문화선교대학원 문창과 교수)씨는 시인을 직업으로 생각하지 않는 드문 사람 가운데의 한사람이다. 그의 직업은 신문기자, 잡지 편집자, 공무원 등을 거쳐 현재는 교수와 계간 <섬>, 계간 <오크노> 발행인을 겸하고 있다. 다양한 직업을 가져 왔으면서도 그에게서는 항상 세속의 때가 묻지 않은 맑은 동심, 꼿꼿한 기개가 엿보인다. 그가 꼼짝없는 시인이며 선비라는 것을 일깨워주는 부분이다.
그는 1980년대 말부터 여러 해 동안 신문기자로 일해 왔다. 기자이면서 그는 그 신문사의 노조위원장, 기자협회 분회장 일도 맡았다. ‘노조’와 ‘기자협회’는 지금 많이 달라졌지만, 그때만 하더라도 ‘불온’하고, ‘반체제’적인 조직이었다. 제도권 신문사에서 그런 조직을 지휘했다면 당연히 ‘반골’로 찍히기 마련이었다. 그는 일부 선배, 동료, 간부들은 물론 관계 당국으로부터 ‘문제인물’로 찍혔으나 결코 자신의 뜻을 굽힌 적이 없었다. 그 바람에 결국 신문사를 떠나야 했고, 어려운 신산의 세월을 살 수 밖에 없었다.
그가 2년 전부터 만들기 시작한 <오크노>(OKNO·창(窓)이라는 의미의 폴란드 말) 역시 언론비평 교양지인데 진보적이며 개혁적인 글과 기획으로 언론학계의 긍정적인 반향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언론은 자정(自淨)되어야 하고 개혁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평소 생각이다. 박상건 시인에게서 외로운 투사, 세상이 다 그렇게 가더라도 ‘나는 나의 길을 가겠다.’는 외고집의 기개를 보게 되는 것은 나의 큰 기쁨의 하나이기도 하다.
눈썰매 타는 다섯살박이 아들 녀석이 부러운 것은 한짝 어깨로 하늘과 어깨를 겨루고 한 짝 가슴으로도 천하의 눈발을 보듬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얼면 언대로 온몸 던져 나뒹굴고, 그 누구와도 한세상 되는 순은(純銀)의 눈발 한움큼 쥐고, 순전히 아내의 젖꼭지 힘을 다 믿고서, 눈썰매장이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일랑 죽어도 하지 않기 때문인데, 산다는 것은 때로 시린 어깻죽지 어루만지며 눈발 속에 말없이 미소지을 수 있는 일, 슬리운 눈물 꾹꾹 눌러 흰 살점으로 얼음장 깔고, 날 새운 썰매에 서러운 통증 지져대며 불꽃을 긋듯이.
- 박상건, ‘눈썰매장에서’
눈썰매 타는 어린 아들을 보며 시린 어깻죽지 어루만지며 눈발 속에 말없이 미소짓는 일을 삶으로 드러내는 데서 그의 담담하고도 천진무구한 세계를 발견하게 된다.
오랜만에 박 시인과 함께 기차를 탔다. 춘천 호반에 솟은 용화산(龍華山·878m)에 오르기 위해서였다. 그의 산행 파트너인 만고산악회 회원들 10여명도 함께 했다. 남춘천역에서 내려 고성리 양통마을로 가는 시내버스를 탔다.
용화산 산행 들머리는 산 남쪽의 양통골이다.
산 북쪽의 강원도 화천군 하남면 유천리에서도 오를 수 있으나 교통이 불편한 탓인지 대부분의 산행인들이 양통골로 들어선다. 양통마을 북쪽 멀리 용화산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다. 왼쪽으로 솟아있는 만장봉과 새남바위의 희고 깨끗한 피부가 어서 오라 어서 오라고 손짓하는 것만 같다. 오른쪽으로는 산 정상으로 어림되는 바위들이 뾰족뾰족하고 칼세봉이라는 바위도 짐작된다.
‘참 아름다운 산’이라고 박 시인은 놀라워한다.
산의 규모가 그다지 큰 편은 아니지만 산의 앉음새나 바위들의 형상에서 예사로운 산이 아님을 느끼게 한다.
“우리나라 산들은 저마다 각각 다른 모양새와 성격을 지닌 것 같아요. 어디서 본듯한 것 같아도 가까이 들어가면 전혀 새로운 감동으로 다가오지요. 이렇게 산에 오를 때마다 신선하고 황홀한 정서에 젖을 수 있다는 것, 우리나라 사람들의 축복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박상건 시인은 전남 완도 출신이다. 어린 시절을 사면이 바다인 섬에서 성장하고 철이 들면서 뭍으로 올라와 고교와 대학을 다녔다. 따라서 그는 많은 세월을 부모와 떨어져 살아야만 했는데, 산과 섬과 삶의 등식은 묘하게도 외로움으로 귀결되는 것 같았다. 그는 외로움을 인간 존재의 본질 하나로 인식할 수 있었으며, 외로움이라는 창을 통해 바라보는 세계야말로 성찰과 발견이 따르는 세계라고 생각한다. 산과 섬은 그러므로 외로움이 농축된 덩어리이기도하다.
용화산 주능선상의 큰 고개에 오르는 길은 온통 큰 돌밭길이다.
넓은 길이 올라갈수록 좁아진다 6·25때 북한군의 탱크가 넘어왔다는 길이, 휴전 후 인적이 드물었기 때문인지 잡초가 우거져 좁은 길이 되었다. 큰 고개에 올라 북쪽 너머를 내려다보니 잘 닦여진 아스팔트 도로가 바로 고개 아래에까지 올라와 있다. 화천군 경내에까지만 닦여진 도로다. 조만간 고개 남쪽의 양통마을까지 도로가 된다면 용화산은 이제 본디의 신비감을 잃어버릴 게 뻔하다.
고개 마루에서 오른쪽으로 능선길을 잡는다. 거의 직벽에 가까운 바위에 고정 로프가 매어져 있다. 박 시인은 제비처럼 날렵하게 로프를 잡고 오른다.
어린 시절부터 갯바위에 익숙해진 그가 산바위라고 해서 어찌 두려움을 갖겠는가. 만장봉에서 잠시 숨을 돌린 다음, 우리는 새남바위 위 널찍한 암반에서 과일과 초콜릿 등으로 간식을 취한다. 오른쪽은 수십 미터의 낭떠러지, 내려다보는 것이 오히려 무섭다.
이 바위벽은 오랫동안 춘천과 인근에 사는 클라이머들의 훈련장이기도 하다. 용화산성 터를 지나 헬기장을 거치고 북쪽으로 휘어지면 곧 정상이다. 용화산 정상임을 알리는 깨끗한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그러나 이 비석은 전기 돌톱으로 너무 각지고 매끈하게 돌을 깎아 세웠음인지 자연과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는 느낌이다.
차갑고 냉정하다. 지리산이나 설악산 정상에서의 그 사람 내음 나는 투박한 표지석과는 전혀 다르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정서는 네모 반듯하고 매끄러운 것보다는 부드러운 곡선과 우둘투둘한 질감이 훨씬 더 어울린다는 생각이다. 정상 부근에서 점심을 먹고 하산길로 들어선다.
태풍 ‘루사’가 할퀴고 간 계곡은 그야말로 폐허 그것이다. ‘참혹하다’라는 말은 사람들의 삶의 현장에서만 나오는 소리가 아니다. 수많은 나뭇가지들이 부러져 길을 메우고 있다. 수 백년은 살았음직한 소나무, 참나무가 뿌리째 뽑혀 그 거대한 동체를 흙에 뉘였다. 큰 나무에서 꺾여진 큰 가지가 마치 목매달아 죽은 사람처럼 피를 흘리며 늘어져 있다. ‘루사’는 아름다운 산길마저 없애 버렸다.
“도토리가 이렇게 지천인데도 줍고 싶은 마음이 없네요.”
박 시인의 말이다 산이 황폐된 것을 왜 인간의 마음이 아파할까. 사람이 그 산에 기대어 살고, 그 산에서 정신의 풍요를 얻어왔기 때문이다. 산이야말로 우리나라 사람들의 생명의 탯줄이기 때문이다.
박 시인은 3년 전에 섬문화연구소를 만들고 해마다 여름·겨울에 ‘섬사랑시인학교’를 열어 오고 있다. 계간지 <섬>도 발행한다. 섬은 곧 산이며 삶이며 시라는 인식이 그의 가슴을 불타오르게 한다.
나, 배낭에 햇살 눌러 매고 콸콸콸 밀어올리는 맨살의 숲길 다독이며 너무 깊도록 잊혀진 산중(山中)을 찾아간다네.
- 박상건의 시 ‘물줄기 따라가는 산길을 오르며’ 중에서
그의 시정신은 옛 사람들의 선비정신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 결코 옳지 않는 것과는 타협하지 않는 굳센 정신력과, 그러면서도 여리고 순한 동심이 그에게 함께 있다. 산·섬·시·삶이 동의어가 되는 인간형을 그에게서 읽게 되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2002.10월호. 월간 MOUNT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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