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봄'의 시인 이성부, 봄에 떠나다

섬과 문학기행/시인을 찾아서

by 한방울 2012. 2. 28. 18:09

본문

봄의 시인, 이성부 봄에 떠나다

7년 동안 암 투병, 28일 별세 향년 70세

 

  겨울 불암산을 등반 중인 생전의 이성부 시인

 

이성부 시인이 28일 별세했다. 향년 70세. 7년 동안 암 투병을 해왔던 그는 지난 17일 서울대 암 병동에서 재활치료를 위해 퇴원해 집으로 거처를 옮겼으나 1주일을 더 버티지 못하고 세상과 등졌다.

 

15일 병 문환을 갔을 때 이성부 시인은 “7년 동안 많이 살았다....술 좀 아껴 먹어라”라며 진담 반 농담 반의 대화를 나눴다. 그의 죽음에 대해 송수권 시인은“아까운 시인 한 분 사라졌다”고 애석했다.

 

산(山) 시인으로 유명했던 그는 대부분 산을 주제로 삼아왔으면서도 섬을 아주 좋아했다. 이따금 시인들이“산 시인이 왜 섬에 다니느냐”고 물으면“섬도 산이다”라고 말하곤 했다. 그는 섬문화연구소 상임고문으로 오세영 송수권 시인 등과 섬사랑시인학교 캠프를 매년 열면서 일반 참가자들과 함께 늘 격의 없이 어울리곤 했다.

 

한국의 전형적 사내인 이성부 시인에게 그렇게 산은 시작활동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무대였다. 북한산을 한 달에 세 번 이상씩 오르내릴 정도였다. 25여 년 동안 북한산 등반만 1,000여 회의 기록을 갖고 있다. 등반 후 반드시 하산주를 들이켰던 그. 모래내 시장 근처 마포구 중동에 사는 그는 시장통에서 막걸리도 한잔하고 취해서 세상도 한판 흔들어 보곤 했다. 왁자지껄 시장 사람들 속에서 술잔을 기울였다.

 

강골 애주가였던 그는 한 편의 작품은 바로 완결하지 않고, 생각이 익어야 원고지에 작품을 옮기는 집필 활동을 해왔다. 보통 원고청탁서가 날라 올 즈음에 무르익어 다듬질이 되곤 한다. 원고 마감이 임박하면 가필 없이 작품을 갈무리한다. 자택 1층에 집필실이 있고, 지하실엔 1만여 권의 책들이 가득 쌓여 있다. 집필실 서재는 누리끼리한 통나무, 초등학교 시절 복도 바닥 같은 황토빛깔에 책 빛깔까지 일체감을 이루고 있다. 누런 표지의 <창작과 비평>, <문학예술>, <문학과 지성>, <자유문학> 초창기 문예지들이 꽂혀있고, 염상섭의 3대, 박성용, 박이도 시인 등 60년대 문고판 시집들도 정감 어린 표정으로 빼곡히 들어차 있다.

 

 

     그 해 봄 북한산에서 잡지 인터뷰하며 포즈를 취하는 이성부시인

                                

마지막 병상에서도 집필 의욕 불태워

그는 거기서 마지막 세상과 작별했다. 마지막 병상에서 “산문 엮어낼 것이 많은데...”라면서 마지막까지 집필 의욕이 뜨거웠었다. 그에게 산은 늘 삶 그 자체였다. 바위 틈새를 보면서 그는“빛나는 슬픔덩어리…몸뚱어리 엉켜 또아리진 상처”(바위타기·5)라고 표현했다. 산은 그게 슬픔이요 기쁨의 대상이다. 기쁨과 환희의 분신이다. 산은 또 다른 삶의 전형이다. 또 하나의 혈맥이다.

 

“그대 몸 출렁이는 그리움에 매달려/내 가쁜 숨 몰아쉬고/그대 오랜 생채기에 내 발 가 디뎌“(바위타기)처럼 그는 바위 홈을 생채기라고 의미부여 한다. 바위에도 생명이 있다. 서로가 한 몸이다.

 

그가 처음부터 산행시를 썼던 것은 아니다. 그의 시의 출발점은 전라도·백제·광주이다. 중심으로부터의 소외, 유배와 억압의 공간의 의미이다. 질곡의 역사를 삽질하는 무대였다. 그는 광주에서 1942년에 태어났다. 광주역에서 300여 미터 떨어진 초가집이었다.

 

당시 광주는 시골 읍내 변두리 정도였다. 그는 그 곳에서 고등학교까지 다녔다. 철길 너머로 바로 들판이 펼쳐져 있었다. 논길을 따라가다가 보면 저수지가 있고 둑길에는 팽나무 고목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들판으로 메뚜기와 물고기를 잡으러 다녔다. 신작로에서 돼지 창자로 만든 공을 차곤 했다. 삼촌과 함께 팽이도 치고 제기도 찼다. 이 들판이 훗날 벼를 쓴 무대가 됐다.

 

 


  만고산악회 회원들과 기념촬영한 모습

 

고등학교 때 등단, 5월 광주 때 절필

“벼는 서로 어우러져/기대고 산다./햇살 따가워질수록/깊이 익어 스스로를 아끼고/이웃들에게 저를 맡긴다.”(벼) 서로 어우러져 사는 민중들의 끈끈한 연대의식과 그이들의 삶의 모습을 고개 숙여 사는 벼에 빗대어 노래한 작품이다.

그 시절 플라타나스, 눈물 등 명시로 널리 알려진 김현승 선생을 만났다. 스승을 찾는 것이 큰 행사이자 즐거움이었다. 대학노트에 써놓은 시를 갖고 가면 간단한 작품평을 해주고 손수 커피를 끓여 찻잔에 따라 주곤 했다. 그 때 그 손길이 지금도 퍽 인상적이란다. 그는 고교 3학년 때 전국 규모 학생작품 공모, 백일장 최고상을 휩쓸었다. <전남일보> 신춘문예에도 당선됐다. 이런 글재주로 경희대 국문과에 특기생으로 입학했다. 입학 후 학보사 기자를 했고 경희문학상도 수상했다. 2학년 때 <현대문학>에 추천을 받아 재등단했다.

 

친구들 자취방을 전전하며 지내던 그는 더 버틸만한 경제적 능력이 없자 입대를 택했다. 제대 후 광주 집에서 틀어박혀 지낼 때 공사장 근처 오센집이라는 술집에서 막걸리에 마시는 일은 하루 중요한(?) 일과 중의 하나였다. 이곳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인텔리 노동자들과 친해졌고 훗날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인 우리들의 양식의 주인공이자 작품의 무대가 됐다. 그렇게 그는 세 번째 등단을 했다.

 

그런 그가 5월 광주 그 현장에 없었다는 이유로 10여 년간 시를 쓰지 않았던 일화는 문단의 화제이다. 그는 유배시집·5에서 이렇게 고백했다. “나는 싸우지도 않았고 피흘리지도 않았다./죽음을 그토록 노래했음에도 죽지 않았다./나는 그것들을 멀리서 바라보고만 있었다./비겁하게도 나는 살아남아서/불을 밝힐 수가 없었다. 화살이 되지도 못했다./고향이 꿈틀거리고 있었을 때,/고향이 모두 무너지고 있었을 때,/아니 고향이 새로 태어나고 있었을 때,/나는 아무 것도 손쓸 수가 없었다.” 죄책감 때문에 5월과 광주라는 단어 대신에 고향이라는 단어로 나즈막히 노래하고 있을 정도이다. 가슴 뭉클한 사내의 솔직한 속내가 보였다.

 

 

여름 용화산에서 박상건시인과 함께

 

언론사 문화부장 끝으로 언론계 떠나 등산 즐겨

근무하던 출판사의 열악한 근무조건과 저임금에 시달리던 그는 어느 날 <한국일보>에 기자모집 사고(社告)를 보고 출판사에서 남모르게 시험공부를 했고, 69년 봄 신문사에 입사 후 <일간스포츠>부국장대우 문화부장에 이르기까지 근 30여 년을 근무했다.

 

시집으로《이성부 시집》,《우리들의 양식》,《백제행》,《전야》,《빈 산 뒤에 두고》 등이 있고, 대산문학상, 영랑시문학상, 가천환경문학상, 한국문학작가상, 현대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20년째 예술인·언론인·회사원·자영업자 등이 총망라된 만고산악회를 이끌었고 금수강산을 헤집고 다니는 산사람으로서, 스스럼없이 막걸리 잔을 돌리는 넉넉하고 여유로운 시인이었다. 결국 그 술로 인해 마지막을 고했지만 역사가 공존하는 한 시대 한복판에서 늘 서민과 함께 호흡해왔다. 어째튼 봄은 왔다. 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 왔다.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어디 뻘밭 구석이거나/썩은 물 웅덩이 같은 데를 기웃거리다가/한눈 좀 팔고, 싸움도 한판 하고,/지쳐 나자빠져 있다가/다급한 사연 들고 달려간 바람이/흔들어 깨우면/눈 비비며 너는 더디게 온다./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 온다.”(‘봄’)

 

그렇게 봄은 오고 봄의 전령사로 빛나던 시인은 갔다. 자신이 쓴 ‘봄’처럼 7년 간 “싸움도 한 판 하고/지쳐 나자빠져 있다가//먼 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 그가 묻힌 대지에서 그의 시들은 세상 사람들의 영혼을 흔들어 깨우며 오래도록 봄 햇살처럼 빛날 것이다.

 

글: 박상건(시인. 섬문화연구소장)

 

*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도 실렸습니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703075&PAGE_CD=15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