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기업인의 문화에 대한 사랑
문화와 자본, 각진 세상 휴머니즘 복원에 관한 단상
사는 길이 높고 가파르거든
바닷가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를 보아라.
아래로 아래로 흐르는 물이
하나 되어 가득히 차오르는 수평선.
스스로 자신을 낮추는 자가 얻는 평안이
거기 있다.
사는 길이 어둡고 막막하거든
바닷가
아득히 지는 일몰을 보아라
어둠 속에서 어둠 속으로 고이는 빛이
마침내 밝히는 여명.
스스로 자신을 포기하는 자가 얻는 충족이
거기있다.
- (오세영, ‘바닷가에서’ 중)
사는 길 가파르거든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를 보아라
폭염이 한바탕 지나간 신지도 노을 해변에서 오세영 시인은 숙성한 원로의 목소리로 이 시를 낭송했다. 모두들 사는 게 힘들다고들 한다. 파도치는 참 바다를 이야기해도 모자랄 판에 이상한 ‘바다 이야기’가 연일 신문을 도배하고 정치 공방이 되고 아침저녁으로 안방까지 밀려온다. 소시민들 삶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도토리 키 재고 다람쥐 쳇바퀴 도는데, 사회적 가치관은 비바람과 거센 파도로 일상의 반경을 흔들며 혼탁하게 하고 있다.
나는 그런 도심의 찌듦의 문화로부터 늘 탈출을 꿈꿔 왔다. 거창한 뜻도 없고 섬에 태어나 고즈넉한 섬으로 찾아가는 일상의 문화운동, 그것으로 섬문화 운동을 시작했다. 이제 10여년이 흘렀다. 그 중 하나로 매년 섬에서 시인들과 일반 참가들이 섬사랑시인학교를 연다. 올해로 9회를 맞는 이 행사는 해변 촛불시낭송, 해변 백일장, 경비정을 타고 항해체험, 어선을 타고 무인도 탐사 및 낚시대회 등을 한다. 시인과 가족들 모두가 어우러져 잠시나마 일상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자연에서 노닐자는 아주 소박한 취지이다.
거창한 환경운동이나 정책운동을 펴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어느새 회원들이 늘어나고 수 백 명의 회원이 함께 하는 도시민의 섬문화운동, 섬사랑운동이 되어 있었다. Eofhj 탐사도 가고 뜻 맞는 회원들끼리 마음 편히 자유인처럼 답사를 떠나지만 이 운동의 몰염치한 면이 있었으니 그것은 천혜의 섬에는 언제든 무작정 떠나서 즐기면서 그곳 섬사람들에게는 별로 해주는 것이 없더라는 점이다.
지난해 덕적도 캠프 때는 군장병과 분교 어린이 학부모들을 초청해 행사를 치렀다. 그러나 우리가 가져간 것은 출판사 지원으로 전해드린 책뿐이었다. 그것으로 섬사람들에게 기본을 한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우리는 섬 아이들을 생각해보았다. 분명 아이들은 대한민국에서 태어났음에도 문화적 혜택으로부터 멀어져 있다. 그래서 낙도분교 어린이들을 초청해 섬에 간 그 시인들과 함께 수도서울의 아름다운 문화현장을 체험하게 해주자는 생각에 이르렀다. 다행스러운 것은 회원 중에 언론인 문화예술인 교육자들이 많아 코스를 개발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언론사 견학, 문화공연, 대학 캠퍼스 체험 그리고 고궁과 서울 아이들이 자주 가는 곳을 데리고 갈 참이다.
자본주의는 문화의 장애물인가?
그러나 늘 그렇듯이 아무리 좋은 일도 자본주의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재간은 없다는 점이다. 늘 9회를 맞는 섬사랑시인학교 역시 행사가 끝나면 지인들은 “이번에는 얼마 적자야?”라고 반문하는 것이 인지상정이 되어 버렸다. 이 대목에서 스스로 묻는 말이 있다. 양극화를 해소하자면서 진정 어떻게 무슨 양극화를 해소하자는 것인가? 경제를 나누어 갖자는 것인가? 문화를 나누어 갖자는 것인가? 언뜻 마음에 다가서지 않는다. 우리 마음속에 내재한 서로에 대한 무관심, 도시와 농어촌 간 거리감 해소, 이것이 가장 빠른 양극화의 지름길이 아니겠는가?
낙도 행사가 봉착에 처한 가운데 한 다리 건너 일면식도 없는 한 기업인을 만날 수 있었다. 우림건설이라는 곳이다. 이 회사는 개발, 건설, 유통, 에너지 등 4개 분야를 주력산업으로 하고 있었다. 인연은 묘한 것이다. 건설인 심영섭 부회장실에 들어설 때 느낀 첫 이미지는 경영자라는 느낌 보다는 예술인의 집필실에 들어선 것 같은 것이었다. 대기업 과장급들이 차지하는 작은 업무 공간, 그곳에 들어선 대부분은 빽빽한 책들이었다.
그이도 섬을 좋아한다고 했다. 남도문화유산 답사모임도 이끌고 있었다. 한 동안 섬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리고 5분도 안 되어 섬 아이들을 위해 하는 행사에 기꺼이 도움을 주겠다고 했다. 섬은 말이 없다. 밀물과 썰물의 교감, 일출과 일몰의 교감으로 산다. 늘 수평으로 산다. 떠나야 할 때 떠날 줄 안다. 그것이 썰물이다. 비운 자리에는 새로운 물결이 들어선다. 그곳에서 역사의 패러다임을 읽을 수 있다. 자연은 말이 없지만 이처럼 무한한 상상력과 삶의 은유를 전해준다.
희노애락으로 짜여진 인생이라는 옷감
그렇게 섬을 사랑하는 사람끼리 이심전심의 대화를 나눈 것이라고 생각할 즈음에, 그이는 회장실을 나서는 나에게 두 권의 책을 건네주었다. 엘리베이터 앞까지 배웅하는 그룹 회장의 모습. 그 책 첫 장에는 그이가 읽고 난 느낌을 적은 편지가 붙어 있었다. 한 권의 책에는 편지를 아주 길게 쓴 것이었는데 그 내용을 대충 이랬다.
“당당한 개척가가 되자. 생각하는 대로 살지 못하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해외나들이를 핑계 삼아 일상이 귀찮고 싫어질 때면 책 읽고 독후감 써 내고 책 나누는 운동, 문화 만들기를 절대로 중단해서는 안 된다는 ‘신성불가침 선언’쯤을 하고 싶다. ‘이웃과 타인들 속에서 우리는 어떤 도움을 주고받으며 살 것인지’에 대하여 반성과 고민을 할 줄 아는 그런 삶이었으면 좋겠다. 인생은 좋은 일과 나쁜 일, 기쁨과 슬픔, 행복과 불행이라는 실에 의해 잘 짜여 진 한 조각의 옷감이라는 비유가 실감난다. 선택이 상황까지 바꿔주지는 않지만 선택을 통해 삶을 다하는 자세를 바꾸면 그것으로 모든 것이 바뀔 수 있다. 상처 입은 진주가 그 상처를 아물게 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 속에 영롱한 진주가 만들어지듯이, 절망을 오히려 축복으로 이끌고, 만들어가는 처절한 노력과 불굴의 의지, 그런 인간 진주 같은 사람으로...”
구구절절 가슴에 스며드는 문장들. <섬> 번역서 서문에 김화영 시인이 적은 무장론이 버쩍 스쳐 지났다.
“잠 못 이루는 밤이 아니더라도, 목적 없이 읽고 싶은 한 두 페이지를 발견하기 위하여 수 많은 책들을 꺼내서 쌓기만 하는 고독한 밤을 어떤 사람들은 알 것이다. 지식을 넓히거나 지혜를 얻거나 교훈을 찾는 목적들마저 잠재워지는 고요한 시간, 우리가 막연히 읽고 싶은 글, 천천히 되풀이하여, 그리고 문득 몽상에 잠기기도하면서, 다시 읽고 싶은 글 몇 페이지란 어떤 것일까?
겨울 숲 속의 나무들처럼 적당한 거리에 떨어져서 이따금씩만 바람소리를 떠나보내고, 그러고는 다시 고요해지는 단정한 문장들. 그 문장이 끝나면 문득 어둠이나 무, 그리고 무에서 또 하나의 겨울나무 같은 문장이 가만히 일어선다. 그런 글속에 분명하고 단정하게 찍힌 구두점.“
책 속에 얻은 문장은 이처럼 무한한 영감과 지성을 제공한다. 그이가 전한 두 번째 책에는 루디야드 키플링의 ‘만일’이라는 시를 인용한 뒤 아주 짤막하게 적고 있었는데 “세상을 살다보면…역경과 시련이 외려 삶의 동력과 활력이 되는 그런 때, 그런 일이 있는 것이 인생…”이라고 한 편의 시를 적어 놓았다.
인생은 텍스트, 하루라는 작은 일생의 한 문장을 쓰며 산다
그이는 정말 독특한 기업인임에 분명하다. 그이는 책 속에 길이 있고 문화 안에서 한 사회와 민족의 생명력이 꿈틀거리는 것임을 잘 알고 있는 듯 했다. 생성과 생동함의 근원은 문화의 생명력이다. 한 사회의 에너지는 그 문화가 어떻게 작동하느냐에 달려 있다. 그래서 영국 수상 처칠은 “힘을 동반하지 않는 문화는 내일이라도 당장 사멸하는 문화”라고 역설했을 것이다.
문화는 어느 특정 줄기 하나로 지탱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나눔의 속성을 지닌다. 나눔은 무조건적인 사랑의 씨앗이다. 사랑 중에서 무조건적인 것은 헌신과 봉사뿐이다. 그냥 누군가를 위해 벽에 못을 박는 일이다. 왜일까? 그 다음 누군가가 그곳에 모자를 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힘을 동반하는 문화 역시 자연의 무한함과 다양성으로 얼개를 이룬다.
영혼의 음악이 되어 주는 한 편의 시가 문화일 수 있고, 기쁨과 슬픔을 반반씩 버무려 살아가는 소시민들의 삶 자체가 문화일 수 있다. 그런 삶을 은유하고 삶처럼 살아가는 무심한 꼭 한 송이 혹은 갈대도 문화이다. 갈대의 나부낌에 노래가 있고 그 노래 속에 삶의 군상이 서려 있다. 그런 노래, 이미지들을 모아 아름답게 켜내는 것이 바로 문화예술이다. 인간과 자연의 아름다움 조화에서만 작동하는 중심 키워드가 바로 문화이다. 그 작동의 힘이 오랫동안 전해질 때 유구한 전통문화를 가진 민족, 민족성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런 문화적 자산을 쌓고 창조하기 위해 인간은 하루라는 작은 일생을 산다. 하루라는 작은 일생은 긴 텍스트에 한 페이지씩 자신의 문장을 만들어가는 것과 같다. 문장이 한 사람의 생인 셈이다. 그래서 글에는 인격과 양심이 서려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책을 읽고 문화를 사랑하는 일이 영혼과 미래의 행복을 꿈꾸는 식산의 여행이라고 믿는 것이다.
각진 세상일수록 목마른 시 한편과 휴머니즘
짧지만 순간순간의 대화에서 명료하고 강렬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그이의 커뮤니케이션 방식은 시를 좋아하는 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그이는 “도전하는 사람이 역사를 만든다”고 말했다. “새로운 세계와 건강한 세상은 지성적이고 긍정적 의미의 도전을 통해 창조되는 것”이라고. 그이의 집 짓는 철학은 행복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있는 듯 했다. 집을 짓고 분양하는 일이 건설이라면 그 건설 또한 궁극적으로 행복을 위한 것이라는. 행복의 어원은 만드는 것이다. 어떻게? 행복은 두 사람이 한 마음으로 집을 짓는 것이다.
그이에게 경영철학을 묻자 이 역시 간단한 단변이었다. “시(詩)처럼 편안하고 행복한 아파트를 짓는 것… 왠지 어울리지 않는 말과 글이 저희에게 쉽고 편안하게 어우러집니다. `문화감성 경영`이 그래서 제 경영 키워드입니다”
세상이 각질수록 사라져가는 것이 휴머니즘이다. 그런데 사실 삭막할수록 다시 인간주의로 돌아가면 이는 복원되는 일인데 그게 잘 되지 않는 세상이다. ‘휴머니즘(humanism·인본주의)’은 600년 전 권위주의에 질식되어 가던 인간성을 회복하자는 문예부흥운동이었다. 학자들은 1세기 건너 새로운 휴머니즘 연구결과를 내놓았다. ‘있는 그대로의 인간’, ‘보다 인간답게 만드는 일’, ‘인간 이상도 이하도 아닌 인간’, ‘뉴휴머니즘(Neuhumanismus)’. 세월이 흘러도 인간들이 연구한 그 범주는 ‘인간다움’이었다. 역설적으로 ‘인간다움’은 영원불변의 진리였던 셈이다.
기업도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다. 돈이 먼저냐? 사람이 먼저냐? 우리가 어느 기업인의 ‘문화사랑’에서 감동받곤 하는 것은 바로 남들이 가지 않은 후자의 길을 걷기 때문이다. 문화 키워드에서 그 가능성을 읽는 일. 그 길을 가는 기업이나 우리 소시민들은 그 희망에 가능성을 던진 것이다. 희망은 멀리 있지 않다. 키에르케고르는 “희망은 가능성에 대한 정열”이라고 말했다.
일상에서 책 나누어주기 운동을 펼치는 심영섭 회장의 조용한 문화운동이 아름다운 것은 언론사 외관사업이나 캠페인성 사업, 정부기관의 일회성 이벤트로 언론홍보용이 아닌 것 같기 때문이다. 세계 100대 대학, 100대 기업을 거론하며 세상은 경쟁을 세계화의 표준으로 치부하는 세상. 산은 굽어서 아래로 내려가는데, 한 방울의 이슬은 텅 빈 계곡에 여유롭게 새소리 물소리의 여백을 남기며 강을 이루고 바다에 이르는데 그것을 도라고 일컫는데, 사람들은 위로, 위로 피라미드 세상을 꿈꾼다.
‘책벌레 CEO’, ‘글쓰기 CEO'가 보여준 우리사회 희망
그래도 미국과 홍콩의 세계적 부호들이 조건 없이 나눔을 실천하는 모습을 보면 희망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그런 당사자들이 하나같이 삶의 밑바닥까지 내려가 본 적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낮은 데로 임해 서민과 자연과 눈높이를 맞출 줄 안다는 점이다. 심영섭 회장. 그이도 평범한 농민의 7남매 중 장남으로서 태어나 대학생 때부터 건설 현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고 한다. 고향 전북 익산 건설사를 운영한 뒤 10년째인 93년 수도권으로 진출했고 지난해는 시공능력평가 36위 기업, 매출액 1조 5천 억 원의 초우량기업으로 성장했다.
그이가 문화를 사랑하는 일도 우연인 것 같지는 않다. 중ㆍ고교 시절부터 문예부 활동을 해왔다고 한다. 문학적 감수성에 이녁이 몸소 체험한 가난과 노동현실을 글쓰기 소재로 소화할 수 있는 여유와 멋을 시골이라는 자연환경에서 체험해 왔다. 다소 추상적 캐츠프레이즈 같은 ‘인간ㆍ자연ㆍ기술의 조화로 풍요로운 미래 창조’라는 경영철학이 수긍이 가는 이유이기도 하다.
어릴 적 책벌레 소년은 결국 자신이 사랑했던 시처럼 아름다운 보금자리를 만드는 기업인이 되었다. 그리고 1년에 4만여 권이 넘는 책을 사서 읽고 편지를 붙여서 직원과 협력업체, 지인, 회사 방문객들에게 나누어주고 있다. 책 읽는 마을, 인터넷으로 멀어져 가는 편지 쓰는 세상, 그이는 행복한 휴머니즘을 복원하자는 운동을 펼치고 있었다.
‘책벌레 CEO’, ‘글쓰기 CEO'라는 별명을 달고 있는 그이는 월례조회 때는 시를 낭송한다. 자기 마음이 실려 있는 한 편의 시를 낭송하는 일은 사람을 평안하게 하고 하나로 동화시킨다고 믿는다. 직원들에게 매달 독후감을 받는다. 책을 통해 세상을 간접체험하며 안목을 넓히고 자기를 뒤돌아보게 함이다. 글은 영혼의 솔직한 대화이다. 그래서 독후감은 자필로 쓰게 한다. 독후감을 통해 직원의 가정 이력과 현재의 아픔, 고민, 가치관을 읽어낸다. 이를 통해 대화 모티브를 마련하고 함께 고민하고 동행하는 경영자의 길을 걷고 있다.
저 바다처럼 비우며 살 일이다
섬을 찾아 떠나며 늘 자유인처럼 살고 싶다는 그이는 직원들에게도 늘 자율적이고 창조적인 생각을 갖도록 한다. 그래서 일주일에 한번은. ‘지각의 날’을 통해 찌든 도시생활로부터 일탈과 자유를 체험하게 한다. 1년 이상 재직한 직원들은 여행을 떠나도록 권한다. 여행처럼 살아있는 인생 공부는 없다는 것이다. 또한 한 달에 한번 공연 관람과 레저를 즐기도록 한다. 월 2회 이상 문화예술인 초청 특강과 시낭송회 등을 연다.
그이는 지금까지 시낭송, 책 나눔, 공연지원, 환경운동, 장애우 돕기, 대학 장학금, 소년소녀가장돕기 등 각종 문화운동 소외집단 돕기를 해왔지만 ‘기부문화’로 표현되는 것을 꺼린다. 보다 건강한 사회를 위해 서로 벽 없이 만나는 소통의 문화를 꿈꿀 뿐이란다. 올바르게 벌어서 다시 올바른 사회를 위해 환원하는 것일 뿐이란다.
자본과 문화, 산업과 정신, 이성과 감성이 같은 무게로 저울질 될 수 있는 세상. 극단과 대립, 양극화가 팽배한 사회보다는 아름다운 동행이 사회와 국가를 위해서도 바람직한 길이라는 것을 강조해서 무엇 하랴. 그이의 ‘문화사랑’처럼 우리 사회 전반에 이러한 희망의 항해가 파도쳤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이가 선장인 우림가족들의 꿈꾸는 항해가 지속되길 진심으로 바라고 우리사회가 좀 더 낮은 곳을 항해 조금씩만 비우며 사는 법을 배웠으면 좋겠다.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는 말. 저 바다에 나가 보면 깨달으리라. 태양은 꼭 한번 떠올라 꼭 한번은 수평선으로 진다. 그러나 뜨겁게 온 바다 달구며 뜨고 끝까지 이 바다 풀무질 하며 진다. 우리 그렇게 서로 뜨거운 가슴으로 만나 아름답게 “마지막 이 바닷가에서/캄캄하게 저물 일이다.”
더러는 비워 놓고 살 일이다.
하루에 한 번씩
저 뻘밭이 갯물을 비우듯이
더러는 그리워하며 살 일이다.
하루에 한 번씩
저 뻘밭이 밀물을 쳐 보내듯이
갈밭머리 해 어스름녘
마른 물꼬를 치려는지 돌아갈 줄 모르는
한 마리 해오라기처럼
먼 산 바래서서
아, 우리들의 적막한 마음도
그리움으로 빛날 때까지는
또는 바삐바삐 서녁 하늘을 깨워가는
갈바람소리에
우리 으스러지도록 온몸을 태우며
마지막 이 바닷가에서
캄캄하게 저물 일이다.
-(송수권, '적막한 바닷가' 전문)
글․사진: 박상건(시인. 계간 섬 발행인)
* 이 글은 섬과문화(www.summunwha.com)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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