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기농 ‘오리쌀’ 농법 전도사 이덕규 시인
"미생물 가득한 땅은 나의 이념이자 희망"
승용차를 몰고 화성으로 향했다. 유난히 배꽃이 하얗던 도로를 달려 강태공들이 입질을 기다리던 그 아름다운 호수에 이르렀다. 이름하여 보통 저수지. 보통리에 있는 방죽이라서 그리 부른단다. 물오리와 물새들이 노닐던 참으로 평화스러운 호수였다. 서울에서 출발할 때 그이는 “과천의왕 고속도로를 타고 쭉 오다가 마지막 지점에서 좌회전하여 직진하면 보통저수지가 나오는데 그곳에서 전화를 주세요”라고 했다. 그이를 기다리며 방죽을 구경하는데 산벚꽃나무가 호수에 그림자를 드리우며 출렁였고 둑길에는 여름으로 향하는 제비꽃 민들레들이 색색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마중 온 그이와 밭두렁을 가로질러 가 닿은 괘량리는 소규모 제조업체와 넓은 농업지역이 공존하고 있었다. 길가에는 배꽃이 흐드러지게 피었고 푸른 보리밭 물결이 이채로웠다. 보리밭 물결 아래는 아름다운 들꽃들 행렬이 길게 이어져 봄바람과 어깨춤을 추고 있었다.
그이는 토목업을 했던 시인 농사꾼이다. 3대째 이곳에서 농민의 아들로 살아온 토박이다. 그이가 직접 지은 목조 건축은 흡사 영화 속의 이국적인 전원주택을 떠올려 주었다. 친구 둘과 함께 1년 넘게 자기 손으로 만들었다는 아름다운 집. 부모와 함께 일곱 가족이 함께 사는 단란한 대가족제도와 마을 공동체 생활을 동시에 일구어 가는 요즈음 보기 드문 상록수 농사꾼이었다.
황무지 개간하고 직접 집 지어 보람 찾는 전원생활
본디 그이의 아버지는 농사도 안 되고 산언덕 아래 비탈길을 깎아 집을 짓고 돌을 골라내어 황무지를 개간하며 살아왔었다. 그래서 어릴 적부터 기름진 땅에서 농사짓고 번듯한 집 한 채 장만하는 것이 소망이었다. 이윽고 자기 손으로 집을 짓고 이제는 이 마을에서 처음으로 유기농 농사를 시작한 첨단 농법을 체질화 하고 마을마다 전파하는 농업 전도사가 되었다.
그이 역시 얼마 전까지 만도 분무기를 지고 수천 평의 논에 농약을 뿌려가며 농사를 지었다. 들에 나가 돌아와 온몸에 농약이 살갗을 파고들어 쓰러진 적도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구닥다리 농업이었고 유해한 농업인의 길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그이가 유기농에 눈을 뜨기 시작한 것은 10여 년 전의 일이다. 이제는 농사도 친환경적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던 것.
풀을 무서워하던 마을 어른들과는 달리 그는 시나브로 논두렁을 거닐며 풀을 뽑아주었다. 그러면서 자연과 친해지기 시작했다. 그물을 쳐놓고 오리를 풀어 쌀농사를 짓는 그이에게는 예초기로 풀을 벨 수는 없었다. 그리고 농약에 오염된 도랑물 보다는 직접 지하수를 파서 깨끗한 농업용수를 이용키로 했다.
해충약, 제초제 등은 절대 사용하지 않았다. 흙 속에 있는 유기물의 성질을 잘 이용해 나갔다. 유기농 농사를 지으며 생물학 등 여러 공부를 병행해야 함을 깨닫기 시작했다. 흙 속의 박테리아와 곰팡이, 벌레, 식물 등의 활동에 의해 영양분이 생성되므로, 건강한 흙이란 살아있는 흙이고 건강한 흙이 작물과 사람에게 저항력을 길러준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검은 땅 황토빛으로 바꿔 유기농 ‘오리쌀’ 재배 성공한 농사꾼
땅을 비옥하게 만들기 위해 일단 짚으로 퇴비를 만들고, 그만이 터득한 농법에 따라 삭아드는 거름을 만들고 그 거름을 땅에 주고, 축사에서 걷어낸 분뇨로 만든 퇴비를 다시 땅에 뿌렸다. 그렇게 대대로 자연 속에서 살아오면서 잊고 살았던 자연의 소중함과 자연을 이용한 농업 개발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이제는 알 것 같다. 유기농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우리 땅과 자연의 생태를 보전하면서 서로가 함께 공존하는 미생물의 먹이사슬과 함께 호흡하며 사는 길이라는 것을. 그래서 그이는 이 지역 환경운동도 병행하면서 중소업체의 오염원을 제거하는 일도 함께 하고 있다. 마을 단위로 동식물 사랑하기 운동도 벌이고 있다. 어쩌다 그물에 걸린 너구리를 발견하고 농사를 망친 것으로 보아 믿지만 능 산으로 되돌려 보내준다.
그이는 유기농만이 우리 농업이 살아남는 길이라고 믿고 있다. 그런 농업만이 세계적인 경쟁력을 기르는 길이며 멀지 않아 우리 농촌도 그런 경쟁력을 갖춘 농민들만이 살아남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러면서 유기농 농사가 다소 늦었다는 생각도 들지만 이제부터 모든 농민들이 이 부분에 동참한다면 절망할 일만도 아니라고 강조했다.
그이가 그의 논에서 흙의 성질을 설명하는 동안 미생물이 번식한 그이의 논과 바로 옆 논을 비교해보자 확연하게 흙 색깔이 비교됨을 알 수 있었다. 그이의 논은 황토빛이었으나 옆으로 논들은 갈색으로 죽은 흙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렇게 재배한 유기 농산물은 다른 농산물에 비해 6배가량 비싼 가격을 받고 있다고 했다. 다소 비싸지만 소비자들은 회원제 형태로 예약을 하고 있단다. 다른 소비재 가격에 비해 그래도 쌀값이 싼 편이고 건강에 좋고 안전한 농산물에 대해서는 비싸도 사먹는 다는 게 회원들의 반응이란다.
농사지으며 그이가 아끼는 농기계는 많지만 그 가운데 트랙터는 17년 동안 비 한 방울 안 맞히고 애지중지해온 것이다. 그 트랙터와 한 몸 되어 땅을 갈아엎는 재미. 그런 일 속에서 일하는 행복을 맛본다고 했다. 묵은 땅을 갈아엎고 새 땅에 새 꿈을 피우면서 논갈이를 한다는 것이다.
미생물 가득한 땅은 나의 이념이자 희망이다
그이 시집에 보면 이런 땅을 갈아엎으며 느낀 마음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논을 간다. 논을 간다는 것은 단단하게 뭉쳐 있던 흙의 조직을 와해시키는 것이다/그 치밀했던 조직망을 잘게 부수고 부수어/다시 작은 토입자 하나하나의 위치를 새롭게 개편하는 것이다 이제/느슨해진 조직 사이사이로/신품종 이념들이 뿌리를 내리고 재편성된 조직은 그 뿌리를 통해/또다시 일 년 동안 결연한 의지를 키우며 지상에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것이다”
땅은 그이에게 하나의 이념이며 새로운 길로 가는 삶의 이정표이다. 어쩜 땅은 그이에게 모든 정신의 바로미터인 것이다. 그렇게 보듬고 사는 땅에서 열매 맺는 것들에 대해 소비자들 또한 더욱 큰 믿음으로 화답해주고 있고 그런 믿음에 그이는 농사꾼의 자부심과 희망을 느낀다.
“요즈음 소비자들 의식이 많아 높아졌어요. 값을 더 올려도 좋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해요. 이는 모든 농산물이 유기농업으로 가야한다는 바람의 표시죠. 그리고 보다 좋은 환경의 유지를 위해서는 비용을 더 지불해도 좋다는 생각인 것이죠. 이러한 소비자 회원들을 위해 인터넷을 통해 오리를 몰면서 쌀을 키우는 과정을 직접 체험할 수 있도록 프로그램도 만들어 진행하죠. 도시민 가족들이 유기농 농사체험 프로그램을 통해 자연도 배우고 우리 농업에 대한 믿음도 깊게 쌓게 되는 거죠”
가족단위로 논을 찾아온 소비자들은 실제로 미생물이 풍부한 땅은 딱딱하지 않고 스폰지처럼 푹신푹신하다는 사실을 느끼며 매우 신기해한단다. 이 대목에서 그이는 이렇게 말했다.“어느 시인이 그랬잖습니까? ‘내가 딛은 발자국 아래 수 많은 미생물이 있으니 나는 그 미생물에 의해 들어 올려져 있는 것’이라고 말이죠. 실제 땅 질이 좋아 감촉이 참 좋아요”라고 말했다.
이렇게 황구지천 가 찰진 땅에서 벼가 생산된다. 그이가 명명한 ‘오리쌀’은 일조시간이 길고 서리가 늦게 오는 자연 입지 조건이 좋은데서 재배되고 마그네슘, 알칼리성분이 타 지역보다는 3배 정도 많으며 규산도 아주 풍부하다는 것이다.
친환경 농사로 수확하는 기쁨, 자연과 호흡하는 삶의 행복
옛날 임금에게 바치는 수라상의 쌀이 이렇게 청정 화성 농업지역에서 만들어져 바쳤다고 자랑하던 그이는 특히 이렇게 생산된 쌀은 크기가 고르고 싸래기가 없어 모양도 좋고 밥맛이 좋은 게 특징라고 했다.
유통이 다소 문제라고는 하나 지금은 없어서 못 팔정도로 주문이 몰려오고 특히 화성한과 공장이 설립돼 이 지역 유기농 쌀을 모두 사가고 있다고 했다. 이곳 한과는 설탕을 사용하지 않고 순수 유기농 쌀로만 만든 국산 한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이는 자기 집 뒷산 노송 군락지에 유기농 채소도 기르고 있었다. 가족의 식탁, 친지들의 식탁에 유기농 농산물을 배달해주고 다른 곳에 소비도 하고 있다. 그러면서 인근 마을 사람들과 작목반을 운영하며 공동체 유기농 농사를 짓고 틈틈이 농사꾼 시인 화가들을 중심으로 순회 시화전을 하면서 환경운동을 병행하고 있다. 참으로 열정적 지식인 농부였다.
조만간 농사지으며 느낀 환경 농업에 대한 에세이도 펴낼 계획이라는 그이는 화성 신도시가 건설되고 기업들이 우리 마을 근처로 들어서기 시작하면서 환경 농업의 지킴이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더욱 굳어졌고 진정한 농자천하지대본이라는 말을 자신부터 실천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친환경 안전 농산물이 살아남을 수 있는 농업 풍토 만들어야
그러면서 영농일지의 기록, 사용이 금지된 물질의 배척 등 엄격한 기준을 준수한 농업을 통해 인증 받은 유기 농산물만을 슈퍼마켓, 백화점 등에서 유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런 제도가 진즉 정착됐어야 외국 농산물 개방을 대비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도 털어놨다.
“연간 수천 톤의 표토가 유실되고 있어요. 유기농은 토양을 신성시 하는 농업이며 소비자 식품과 연결된 제도화되고 양심적인 농업인의 기본자세라는 인식을 가질 때 진정한 농업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작지만 저의 길이 우리 농업의 작은 밀알이 될 것으로 확신합니다”
그러면서 그이는 진정 땅에 미치고 농업에 희망을 걸며 사는 농업인들이 대대로 후손들에게 땅을 물려주고 농자천하지대본이라는 믿음을 확신할 수 있도록 제도적 장치를 보장해줄 수 있어야 한다는 바람도 강하게 피력했다.
또한 유기농 농사법은 처음부터 쉬운 일은 아니라면서 제대로 된 유기농으로 가는 과정이랄 수 있는 처음 농사짓는 3년 정도를 전환기 유기농이라고 부르는데 이 과정을 잘 극복해야 한다면서 이 과정에 풀도 잘 뽑고, 피가 자라나는 시기를 피해 곡식이 저항력을 발휘하는 시기를 포착해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체험을 쌓아가야 한다면서 무엇보다도 부지런한 농사꾼만이 삼아 남는다고 강조했다.
누구보다도 자연의 숨결에 귀 기울이고 그 호흡에 맞춰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하고 있던 친환경 농사꾼 시인 이덕규. 그이는 참 멋있게 자연을 즐길 줄 알고 노동의 행복을 스스로 만들고 즐길줄 아는 지식인이면서 자연에 가슴 내려 놓고 사는 겸손을 미덕으로 아는 농사꾼이었다.
그이 같은 농민들의 농사짓기가 전국적으로 불길처럼 번져갈 때 우리 농업의 미래도 굳이 걱정에만 머무를 필요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모습들이 방방곡곡 들녘에 신바람이 가득할 날이 멀지 않았다고 말해버리는 것은 너무 성급한 일일까... 분명한 것은 희망이란 그저 오는 것이 아니라 그 가능성을 믿고 그 가능성에 대한 정열을 쏟는 것이리라.
* 화가 한상업(오리쌀 작목반 회장)과 유기농 농사 전도사 이덕규 시인(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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