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워지는 닭 울음소리
- 제가족 철저히 지키며 어둠 헤치는 길조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중략)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이육사 시인의 '광야'라는 시이다.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는" 것은 천지개벽이다. 그 천지개벽을 알리는 매개물이 닭 울음이다.
닭 울음은 실제로 오래 전부터 고향집 꼭두새벽을 알리는 신호였다. 그래서 이 시에서도 닭 울음은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감동으로 다가선다. 닭은 꿩과에 속하는 조류이다. 조류인 까닭에 조류독감으로부터 혹독한 홍역을 치러야했던 것.
닭은 사람들이 달걀과 고기를 얻기 위해 기르는 가축이지만 본디 3000∼4000년 전 미얀마·말레이시아·인도 등지에서 야생닭에서 그 유래를 찾고 있다. 그러다 사람들이 기르게 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 어릴 적 새벽 자명종 역할을 하던 닭 울음
그랬다. 어릴 적 할머니 어머니 그리고 작은고모 큰 고모 등은 이 닭 울음에 곤한 잠자리에서 반사적으로 일어나 기지개를 펴면서 문지방 건너 부엌으로 향했었다. 닭 울음은 그대로 자명종 역할을 했던 셈.
그 닭 울음은 그냥 "꼬끼오∼"하고 끝났던 데만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유년시절 닭 쫓던 추억이며 시골 서민들의 야무진 삶의 흔적들이 묻어 있다. 닭이 울면 아낙들은 부엌과 나무가 쌓인 장독대 뒤를 오고가며 장작더미를 날라 아궁이에 쑤셔 넣고, 서로 어깨 기대 불꽃을 문 장작더미는 할아버지 아버지 드러누운 아랫목 구들장에서 활활 타올랐던 것이다.
그렇게 닭은 아침으로 가는 길목에서 시골 사람의 삶과 동행하는 울림이었다. 그런 닭 울음이 최근에는 비명이 되어 처절한 닭의 역사를 다시 써야 했다. 농민들도 도시 사람도 진저리날 정도로 조류독감을 들먹이면서 닭도리탕, 닭꼬치의 원조라는 지난날 닭의 명성을 하룻밤 사이에 물거품이 되었던 것.
* 닭은 빛의 도래, 새로운 창조의 상징
그러나 대단한 생명력으로 부활했던 닭은 또 다시 때아닌 폭설로 설상가상의 운명을 맞았다. 그러나 닭의 울음은 결코 멈출 수 없었고 사람들도 자신들이 너무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언론이 그랬다. 그렇게 닭 울음은 영원히 묻힐 수 없었고 그 저력은 어쩜 태초에 하늘이 부여한 신성한 길조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새벽 닭 울음은 빛의 도래를 상징한다. 아침이 밝아오고 있음을 예고하는 것이다. 그래서 닭을 태양의 새라고 부른다. 닭은 날개를 가졌으면서도 하늘로 날아가지 않고 인간과 한울타리에서 생활한다. 그 이중성에서 닭은 어둠과 밝음을 경계를 상징임을 알 수 있다.
제주도 무속 신화에 천지왕이라는 것이 있다. 천황, 지황, 인황 닭들을 말한다. 닭의 울음과 함께 개벽이 왔고 그 닭을 우주 질서의 배경으로 보았던 것. 즉 "천황닭이 목을 들고, 지황닭이 날개를 치고, 인황닭이 꼬리를 쳐 크게 우니 갑을 동방에서 먼동이 트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나오는 김알지 신화에서는 흰닭을 나라를 통치할 인물이 탄생했음을 상징하고 있다. 그러니 닭은 그저 가축이 아니라 태양의 신이었으며 신성스러운 상징이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닭 울음은 좋은 일을 예감하고 새로운 창조를 의미한 것이다.
* 닭 울음은 영역확보와 그리움, 희망의 상징
닭이 울어 신 새벽을 알리지만 한 편으로는 자신의 힘을 과시하기 위한 방편이기도 하다. 동남아 밀림지대 야생닭은 다른 수컷에게 자신의 영역을 확보했음을 선전포고하기 위해 길게 울음을 울었다는 것이다. "꼬끼요∼" 하고 말이다.
하여간 닭 울음으로부터 그렇게 새벽이 왔다. 그 새벽의 끝자락에서 태양이 떠올랐다. 닭 울음이 태양의 빛 여울을 끌어온 것. 홰치는 소리는 그렇게 닭이 인간 세계에 밝음을 알려주는 순간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밝음의 상징하면서 한 편으로는 어둠 속에서 잡귀(음귀)를 쫓아내는 상징이기도 했다. 닭 울음의 상서로움이나 산모의 진통이 끝나면 새 생명의 잉태를 울음으로 알렸던 사람들이나 그 생태며 운명이 닮은 구석이 있다. 닭이나 사람이나 희망의 시작을 울음으로 알렸으니 말이다.
이런 전설도 있다. 어느 날 포수에게 쫓기던 노루의 목숨을 구해준 나무꾼이 선녀를 아내로 맞았으나 아내가 하늘나라로 올라가 버린 것이다. 그 후 나무꾼은 고독하게 살다 죽어 수탉이 되어 울었다는 것. 그래서일까? 수탉은 담장이나 지붕 등 높은 곳에 올라가 하늘을 향해 목을 길게 빼고 우니 말이다. 아내를 못 잊어서, 아내가 못내 그리워서 우는 것일까......
* 처자에게 먼저 먹이를 먹이고 적을 물리치는 닭의 일생
수탉 또한 먹이를 발견하면 먼저 처자를 불러모아 먹게 한다. 그리고 자신은 새 먹이를 찾아 나선다. 또 적을 만나면 처자를 보호하며 필사적으로 싸운다. 이처럼 수탉은 가장의 역할을 하면서 새벽 울음을 제 시간에 알리는 감각적이고 주기적인 지혜를 지녔다. 그러니 머리에 솟은 벼슬을 보면 수탉의 용기며 슬기로운 상징이 예사롭지 않을 수밖에.
그러니 사람들이여. 이제 "꿩 대신 닭",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 "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본다", " 닭의 볏은 될지언정 소의 꼬리는 되지 마라", "닭 소 보듯, 소 닭 보듯 한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둥 닭의 자존심을 팽개치게 하는 그런 불경죄는 짓지 말일이다.
아직도 처갓집 가면 장인 장모는 씨암탉을 잡아 준다. 씨암탉은 귀한 손님을 대접하기 위한 마음의 손길을 상징한다. 그 닭이 여지껏 한번도 인간의 삶에 훼방 놓지 않았거늘 우리는 너무 홀대해왔던 것은 아니었을까. 어릴 적 도시락 반찬은 그가 낳아준 계란 반쪽이었거늘. 잔치나 혼례 때도 닭이나 계란을 사용했고 설날이면 떡국에 닭을 집어넣어 손님을 대접했거늘.
요즈음 들어 닭에게 이만 저만 미안한 게 아니었다. 그래서 며칠 전 조류독감이 휩쓸고 간 양계장 풍경을 돌아보러 갔다. 양계장 안에 들어서니 수 천 마리의 닭들이 예사롭지 않는 눈초리로 이방인을 쳐다보았다. 저 닭들은 이제 인간들을 악의 천사로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미안한 마음 감출 길 없었다. 그렇게 닭의 운명, 닭의 일생을 생각해보았다.
*길조지만 먹어야 상부상조하는 아이러닉한 가축과 사람의 운명
한 편으로는 그런 닭의 사랑 탓에 잡아먹어야 한다는 가축과 인간의 운명적인 아이러니를 생각해보았다.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 인삼 가득 집어넣고 대추, 찹쌀을 놓고 통째로 고아 삼계탕 한 그릇을 봄날 보신용으로 먹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래도 마음은 편했다. 닭을 찾는 소비자들이 늘어나고 있었으니... 그토록 많은 날을 울어 제 값을 받은 닭의 몸값. 그 닭 울음이 울고 울어 100년만의 폭설이 내렸던 것은 아닐까. 더 갈 때까지 갈 수 없는 절망의 늪에서 희망의 울음을 들려주고자 처절하게 무너진 닭장에서 인간을 응시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답답하면 길거리로 나와 아우성치는 인간이나 긴 밤을 볏단이나 담벼락 아래서 보내고 허공을 향해 신새벽을 알리는 닭 울음의 의미가 남다르게 느껴오는 것은 왜일까. 그래서 더 이상 닭에게 미안할 닭타령 대신에 우리 민요 '닭타령' 한 곡조 불러제끼며 한 세상 어깨 들썩이는 춤판 한번 벌이고 싶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