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그립고 아름다운 것은 학창시절이다. 햇살 눈부신 목련꽃 아래서 문예반 선생님과 만들던 교지에 대한 추억이 이따금 그리움의 물결로 여울져오곤 한다. 친구들이 정성껏 쓴 글에 삽화를 집어넣고 서투른 시를 축시랍시고 책머리에 올이던 시절. 그렇게 만든 교지는 졸업과 함께 마지막 선물이었다.
나의 시골 초등학교 시절에는 교지는 없었다. 대신 봄방학이면 산딸기 따먹고 바닷가에 나가 게를 잡고 삼촌의 배낚시를 따라 나가 다 잡아 올린 물고기를 이리 저리 바다에 휘젓다가 놓치고 군밤 먹던 일들이다. 웃기는 것은 그렇게 한 무더기 고기를 바다에 놓였는데 그 가운데 한 놈이 다시 낚시 바늘을 물어 통째로 잃어버린 물고기를 잡아 올린 기억이다.
하여간 시골의 봄방학은 그랬다. 그러니 서울아이들이 아파트촌에서 다람쥐 쳇바퀴 돌듯 학교를 오가는 모습을 늘 안타깝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것도 기우였다. 뜻밖에도 시골추억을 아련하게 떠올려주는 한 초등하교 봄방학을 구경하게 된 것이다. 환경은 길들여지는 것만은 아니다. 역시 환경은 만들어지고 다듬어 창조할 수 있는 것이었다.
*초등학교 1학년생들이 만든 학급문고
맨 처음 학교라는 곳에 발 딛었던 그 아이들이 학교에서 맨 처음 작별을 경험하는 1학년 1반 교실 책상에는 글과 그림을 모아 복사판 한정 학급문고가 몇 권 쌓여 있었다. 학급문고 이름은 "천사의 미소를 닮은 아이들".
한 권의 학급문고에는 선생님이 그 동안 아이들에 대해 느낀 점을 글로 쓴 그림 엽서 한 장씩이 끼워져 있었다. 선생님의 다정한 엽서 한 장과 자기 얼굴과 글이 실린 책을 펼치며 아이들은 일제히 와∼와∼ 함성을 터뜨렸다.
학급문고 첫 장에는 담임 선생님이 직접 찍고 일일이 딱풀로 붙인 아이들 사진 한 장이 붙어 있었고, 친구들 소개난을 펼치자 각자 자기 얼굴을 그리고 자기가 직접 쓴 비틀비틀 활자가 넘어져 있는 천진스런 글들이 실려 있다.
*태어나서 학교에서 맺은 첫 만남과 이별의 흔적들
"나의 이름은 박균우 입니다. 나의 이름은 할아버지가 지어주셨습니다. 나의 꿈은 외교관입니다. 그래서 나는 지금 키즈헤럴드 영어학원에 다니고 있습니다. 나는 영어를 잘해서 독일에 있는 클로제 축구왕을 만날래요. 그 다음에 브라질에 가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호나우두를 만나서 어떻게 축구를 잘하는지 영어로 말할래요....."
"저는 홍성보입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컴퓨터에서 크레이지아케이드를 좋아합니다. 그리고 제가 싫어하는 것은 학습지입니다", "성현아! 토요일마다 줄넘기를 안 가지고 올 때 빌려주어서 고마워 너도 안 가지고 오면 내가 빌려줄게. 넌 짜증도 안내서 참 고마운 친구야. 2학년이 돼서 같은 반이 되자", "안녕 재희야! 내가 너한테 학교생활을 몰라서 많이 물어봐서 미안해. 앞으로 잘하고 다른 애한테도 물어볼게 참 고맙고 미안해...."등등.
아쉽고 미안했던 그리고 고마웠던 친구들에게 헤어지기 전에 마지막으로 솔직하게 마음을 털어놓은 편지는 서투른 글이 너무나 맑고 정겨워 보였다. 저마다 색종이 안 가지고 올 때 빌려주고, 좋아하는 데 말로 표현 못한 마음, 또 네가 나를 좋아하는 것을 나도 알고 있었다는 글귀들은 아름다운 1학년생들 우정을 웃음과 감동으로 읽게 만들었다.
이밖에 동시 모음, 삼행시, 학부모들이 담임과 아이들을 격려하는 글들도 실려 있었다. 1년간 학생들이 쓴 일기와 그림을 일일이 오려 붙이고 복사해 학급문고판 펴낸 김장희 담임 선생은 "아이들과 함께 했던 소중한 추억을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었고 다소 미흡하더라도 아이들의 필체를 그대로 살려 먼 훗날 성장과정을 들여다 볼 수 있도록 만들었다"고 말했다. 담임 선생님은 또 학부모들에게도 아이들을 가르치며 느낀 점을 적은 후 1년 동안 노고에 감사한다며 그림엽서와 핸드크림 하나씩을 추억의 선물로 건넸다.
*이색적인 낙서장을 마지막 선물로 주고받은 2학년 종업식
그런가 하면 2학년 9반 마지막 수업에서는 아이들이 스케치북을 한 장씩 찢어 친구들에게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쓰게 하고 이를 서로 우정의 선물로 간직하는 것이었다.
이 낙서장을 보면 "준우야. 남은 시간 친하게 지내자.(누리)", "우리 3학년이 되어서도 같은 반이 되어서 사이 좋게 지내자-승민", "준우 너 찜이야", "3학년이 되어서는 우리 싸우지 말
고 사이좋게 지내자. 정식"
"축구 할 때 정말 잘하더라. 3학년 때도 더욱 잘하고 같은 반 됐으면 좋겠다", "저번 축구 할 때 정말 미안해. 난 네가 치웅이를 밀어냈다고 생각해서 그냥 그랬어. 이젠 사이좋게 지내마. 종민", "준우야. 너 축구 대게 잘하더라. 너 크면 축구선수 되길 바래. 용우", "준우야 2학년 처음 때 너와 싸우고 나서 사이가 많이 좋아졌지. 이제 친하게 지내자. 한웅" 등등.
모두가 싸운 이야기들이다. 저마다 집에서 귀염받다가 공동체 생활을 하다보니 익숙지 않는 것들이 하나 둘이 아니었을 것이고 그러니 서로 많이 부딪쳤을 것이며 선생님으로부터 벌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한 해를 보내고 보니 실수는 누구나 하는 것이고 생각할수록 친구가 좋고 소중한 것이라고 생각했을 터. 서로의 허물을 감싸안은 순진한 아이들의 용서와 사랑 할 줄 아는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향수가게에 들어가면 향수를 사지 않아도 그 가게를 나오면 향수 냄새가 나듯이 학교는 그런 공간이다. 책 속에만 길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학교라는 삶의 전당에서 스스로 향기를 체험하며 그렇게 성장하는 것이리라.
새 학년으로 진학하기 위한 종업식이지만 마지막 수업을 소중한 경험과 추억 속으로 정성껏 묻어두려는 마음은 선생님이나 학생들이 매한가지일 것이다. 이번 학급문고와 아이들의 낙서장 선물의 내면을 찬찬히 들여다보노라면, 진정 참된 스승은 지혜의 집으로 들어오라고 명령하지 아니하고 제자들에게 그들 자신의 마음의 문으로 들어가라고 인도한다는 말을 새삼 되새김질하게 한다.
마냥 즐거운 봄방학 날. 책가방을 돌리며 교문으로 쏟아져 나오는 천사 같은 아이들 모습에서 이제 한 해의 새봄도 우리들 곁에 거의 당도하여 열리고 있음을 느꼈다. 봄은 그렇게 아이들의 해맑은 웃음 속에서 샛노랗게 피어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