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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여자

여행과 미디어/여행길 만난 인연

by 한방울 2004. 2. 15.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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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열정의 별난 페미니스트


이영란. 그이는 열정의 예술인 그리고 행동하는 페미니스트이다. 경희대 예술디자인 학부 교수인 그이에게 안으로 따라붙는 직업명은 많다. 연극배우, TV 탤런트, 방송 리포터, 전통무예 안무가, 퍼포먼스 배우 겸 연출가, 극단 대표, 칼럼니스트…. 그런 그이이지만 전문가 시대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전문가라는 단어를 터부시한다. 세상의 이치란 미물들의 조합이고 만물의 조화라는 것이다. 저마다 다른 다양성이 서로 충돌하고 갈등, 긴장하면서 결국은 화해와 조화라는 이름으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 영화 꽃잎의 어머니

그이의 여성관은 특별하다. 여자는 남자의 상대로서가 아닌 이 세상 모든 변화의 주역이라는 것이다. 생명을 잉태하고 키우는 힘, 그것은 보이지 않는 곳의 질서를 감지해 내는 강한 힘의 원천이라는 것이다. 그 힘이 분명 이 한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 열린 세상을 향하여 이땅의 모든 여성들은 나아가야 하고 그래서 자신도 그 한 길을 부단히 걷고 있다고 말한다.

이영란. 그이는 어쨌든 튀는 여성이다. 이미 여러 문제작을 통해 통념의 예술세계를 뒤흔들어 놓았다. 그런 통념의 껍질을 벗기고 깨우치면서 이 시대 한복판을 구가해 왔다.

그이는 분명 이 시대의 최고 별종 여성 교수이자 예술인이다. 그이를 처음 만난 곳은 그이만큼이나 유별난 사람들이 자주 찾고 유별난 음식과 치장으로 유명한 대학로 장이라는 카페였다. 늦은 밤 호프 잔에 이태리식 홍합구이를 나누어 들며 주고 받는 첫 대화 가운데 튀어나온 단어는 ≪꽃잎≫이었다. 영화 꽃잎에서 그이는 주인공 정현의 어머니 역으로 출연했다.

공수부대 총소리와 함께 금남로 한복판에 쓰러지던 그 때 그 우리들의 어머니….
이 영화는 연극인이었던 그이의 데뷔작이자 아시아태평양 영화제 최우수 여우주연상을 안겨준 작품이기도 했다. 그 이전 <장난꾸러기 엘비라>가 연극 데뷔작이자 동아 연극상 여자 인기상을 수상작인 것을 보면 데뷔작이 바로 수상작으로 이어진 그이의 타고난 예술가적 기질을 엿보게 한다.

그날 그이는 초면에도 불구하고 매우 언쟁적 기질을 발산했다. 마치 무슨 주제를 놓고 달려드는 여대 3년생 정도의 운동권 같은… 깡마른 체구에 학구적 논쟁이며 똘똘뭉친 문제의식이 `문제의 예술인으로 `찜할 수 밖에 없게 했다.
그이는 말투와 생김새에 비해 의외로 중년의 나이를 치닫고 있었다. 그이는 54년 서울에서 태어나 네 살 때부터 춤을 췄다고 한다. 73년 이화여대 무용학과에 차석 입학한 후 신에 들린 춤바람은 완벽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도대체 왜 춤을 추는 것일까?"에 고민의 시간들 보냈다. 그것이 대학시절 내내 철학과 종교에 빠져들게 한 원인이기도 했다. 대학 3학년 때 <가스펠>이란 록뮤지컬에서 소냐역을 맡아 출연하고 연극 안무를 맡으면서 연
극에 빠져들기 시작했고, 여인극장에서 <장난꾸러기 엘비라>에 출연하는 게 데뷔작이자 첫 수상작품이 되었다. 그러면서 늘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그 길이 유학이라는 결론에 이르렀고, 무작정 뉴욕행 비행기에 올랐다. 뉴욕 동부지역 한 교포신문에 단신기사로 실렸던 뉴욕극단의 창단 소식이 작은 실마리일 뿐이었다.

"룸메이트를 구하는 할머니에게 전화를 해 방을 구해 놓고는 바로 라면박스에 짐을 싸들고 무작정 뉴욕으로 갔어요. 정말 힘든 생활이 시작됐어요. 사람들과 쉽게 가까워지지 못하는 성격에다가… 아무튼 뉴욕행 1년 반만에 도저히 그곳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그곳을 떠났어요. 뉴욕대에 입학 허가서를 받아 놓은 상태에서 짐을 싸들고 하와이로 갔어요. 하와이는 이미 부모님들이 이민가 있던 상태였어요. 하와이 집 뒷산에 올라 태평양 망망대해를 바라보며 내 자신을 유심히 들여다 보곤 했어요. 때론 슬퍼지고 때로는 불끈불끈 도전의식이 치솟더라구요."

방황의 시절이었다. 그러던 중, 자포자기 반 해탈(?)의 심정으로 이역의 현실에 젖어들기 시작했다. "그냥 일상이 예술이지 뭐" 이러저런 생각 끝에 은행에 취직을 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뉴욕에 있는 극단에서 <배비장전>을 공연하는데 애량역을 할 배우가 없으니 한 달만 와서 출연해 달라는 것이었다. 다시 태평양을 건넜다. 공연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연장공연이 이어지더니 각 지방마다 앵콜공연이 이어졌다. 뉴욕에서 맞은 비바람의 세월들이 서서히 열매를 따는 일로 급반전되는 순간들이었다. 이런 것이 인생의 묘미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이는 다시는 하와이로 되돌아 가지 못했다. 그렇게 뉴욕대 공연학과에서 석사학위와 박사학위 1년생활을 마친 후 귀국길에 올라, 중앙대 연극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귀국공연을 선보이게 되었다.

* 세상을 디자인하고 조각하는 여성

귀국 첫 작품은 관객 3만여명을 끌어 모으고 7회에 걸친 앙콜공연으로 장안의 화제가 되었던 바로 <자기만의 방>이었다. 버지니아 울프의 원작을, 현실감 있는 호소력을 위해 그이가 상당 부분 손질한 작품이었다.

1인 모노드라마로써 당시 현대를 대표하는 모순의 남성 3인에 각각 마광수 교수, 김용옥 교수, 김지하 시인의 견해를 등장시켜 남성중심 사고를 날카롭게 비판하던 장면은 압권이었다. 가부장제 속에서 빚어진 여성상의 허구를 고발하면서 그 동안 남성들에 억눌렸던 뭇여성들에게 짜릿한 대리만족까지 느끼게 했다. 당시 공연장 근처에 작은 놀이방이라는 탁아공간까지 설치 운영하면서 주부 관객들이 아이들을 맡기고 연극에 빠져들곤 하는 참여로 화제를 뿌리기도 했다. 여성들의 예술혼과 창작의욕을 북돋아 주기에 충분한 본격 페미니즘 연극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 연극을 귀국 공연작품으로 올린 특별한 이유가 있느냐?고 묻자, "힘을 가진 여성이 되자.힘을 가진 여성으로서 스스로 일어서 보자. 힘을 위해서는 능력이 있어야 하고 결국 필요한 것은 경제력과 온전한 고유영역인 자기만의 방을 갖는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는 것이다.

그런 문제작의 밑바탕에는 그동안 차곡차곡 쌓아온 종교 철학 문제에 꽤 심취해 있었던 탓이다. 특히 뉴욕의 한인교회에서는 당시 인권 통일문제 등 주제로 우리나라 진보적 인사들이 자주 강연을 했고 그이는 이런 세미나를 빠뜨리지 않고 청강했다고 한다. 또한 뉴욕은 복수민족사회였고, 그래서 인권문제, 여성문제, 소수민족 권익문제 등을 접할 기회가 많았다.

그렇게 해서 갇힌 생각들이 찬찬히 트이고 기존의 고정관념들은 파괴되어 갔을 것이다.
그이는 보기 드문 여성 산악인이기도 하는데, 귀국 얼마 후 3박4일 비가 내리 쏟아지는 가운데 홀로 강행한 지리산 종주를 잊지 못한다고 했다.

"그 때 하늘과 땅을 잇는 빗줄기 속에서 저도 비가 되고 또 하늘이 되어 산과 함께 마냥 흘렀지요. 봉우리에 다다르면 거친 숨을 몰아쉬며 그 생명 같은 맑은 공기를 욕심껏 들이 마시고 팔 다리를 한껏 벌려 온통 안아보곤 했어요. 그 치기어린 욕심이 잦아들면 코펠에 물을 끓여 빗물 섞인 커피를 마시던 기억은 정말 새롭기만 했어요. 그리고 물에 씻겨 선명하던 그 잎새들, 그 정연한 생기만큼이나 단아한 나무 냄새들… 고즈넉하고 풍요로운 산 향기들, 저는 그것이 자연의 향기요 우리 내면에 가득가득 채워져야 할 인생의 향기라고 생각해요."

고단한 어제의 길을 묵묵히 걸어온 자만이 만끽할 수 있는 자기만의 자유며 철학으로 다가온다. 안으로 다부지게 다져 놓을 예술가적 영혼과 지성의 심지에서만 켤 수 있는 삶의 불꽃 같은 것이이라.

그이의 열정의 몸부림은 계속되었다. 그이는 교수 신분으로 MBC 청춘드라마 우리들의 천국에서 교수 역으로 출연, 또 한번의 화제를 낳았다. 그이는 이 드라마에서 커뮤니케이션학 여교수였다. 커뮤니케이션학이라? 그이가 이즈음에 강의해온 과목들은 연극지도, 창작실습, 무용제작법, 창작론, 인간동작과 심리 등이었는데 난데없는 커뮤니케이션학을 강의라니…

이를 보면 그이는 물과 불도 뜨거운 물이라는 속궁합으로 빚어낼 수 있는 운명의 도전자요 창조자라는 생각이 든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드라마 출연 얼마 후 그이는 실제로 성
균관대 공연예술대학원과 언론정보대학원에서 연기 커뮤니케이션학이라는 강의를 맡았다.

모든 소재가 그이에게 닿으면 창작극이 되고 학문이 되어 버린 셈이다.
그이는 이 세상에 길들여지지 않고 이세상을 길들이는 여성, 이 세상을 디자인하고 조각하는 여성임에 분명하다. 여성문화예술기획 기획위원으로서 여성운동가적 면모, 극단 木土(목토) 퍼포먼스그룹 예술감독에 대표로서 경영적 수완까지, 한국연극교육학회 이사로서 후진양성의 기혹까지, 그러더니 다시 MBC, KBS, SBS 탤런트 연기지도 및 신체 연기 훈련을 담당하는 방송연기자 교육자로 맹활약을 하기도 했다. 또한 현장에서는 직접 마이크를 잡고 MBC, KBS, 각종 케이블 TV MC와 리포터로도 활약했다. 거기에 국제 워크샵에서는 행사 통역자로, 무대에서는 다시 연극배우로… 정말 변화무쌍한 팔방미인, 별난 여성이 이영란의 자화상이요 현주소이다.

너무 정신없이 여러 분야를 넘나들다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느냐?고 묻자, 그이는 이렇게 말했다, "인간으로서 가지고 있는 고귀한 것들을 되도록 모두 살려야 한다고 봐요. 전공과 연관이 있는 일을 열심히 찾아서 하는 것이고 찾아낸 일을 그대로 실천하는 것이니까 말 그대로 보통 사람일 뿐이지요."

그러면서 그이는 "사람들은 너무 이분법적인 발상을 좋아해요.문화를 고급문화와 대중문화로 나눈다든지 하는 일, 그런 발상 자체가 잘못된 거에요. 오히려 적극적이고 주체적으로 사는 여성, 민족과 사회의 앞날에 대해 당당하게 얘기할 수 있는 여성들이 당당한 게 아닌가요? 그리고 저 아닌 많은 여성들도 여러 드라마 속에서도 자주 등장해야 하고 자기주장을 펴야 한다고 봐요. 또 여러 메커니즘을 폭넓게 알아야 하잖아요.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지요. 내가 살고 싶은 그 삶의 현장에 뛰어 들어 그곳에서 그렇게 살고 있는 여러 삶의 풍경들과 부대끼면서 함께 해야지요."

* 문제의식 충만한 당돌한 예술가

이 한세상 한 복판을 마치 굿판으로 삼듯이 자신만만하게 살아가는 여성 이영란. 무언가에 늘 신들린 무당같은 기질을 발산하곤 한다. 그이는 어떤 문제의꺼리들을 찾아다니고 그것을 만나면 바로바로 긁어대는 성냥개비처럼, 그 불꽃을 피우고야 마는 뜨거운 열정과 응전의 삶이 온몸에 체득돼 있는 것으로 보인다. 가히 힘이 철철 넘쳐나고 변화의 삶들이 늘 소용돌이치고 있다.

학생들과 치열한 논쟁적 수업이 끝나고나면 그이는 호프 한 잔을 걸칠 줄 아는 여유도 빼놓지 않는다. 그런 파격적인 삶이기에 47세이면서도 멜로 드라마에 나오는 37세 순정의 여배우같은 감각적 이미지로 풍길 때가 많다고 학생들은 말한다. 이러한 여론에 대한 그이의 생각을 물었다.

"젊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것이죠. 그 특성은 고여서 썩지 않고 계속 흐른다는 것이죠. 기계로 찍어낸 듯한 표정과 매무새들은 딱 질색이에요. 그런 젊음보다는 늘 변화를 시도하는 이 나이의 제 인생이 더 의미가 있다고 봐요."
이런 당당함이 늘 신선한 느낌으로, 도전적으로 다가선다.

그이는 요즈음 젊은이들을 평가하면서 타고난 기질에 만족하는 사람을 편협된 전문인이라고 꼬집기도 했다. 창조는 자기 도전이며 노력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타고난 기질을 전문가로 대접하는 사회 풍토가 판박이 된 젊은이들을 양산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인식들이 현실의 불건강함을 고착화할 우려가 크다고 말했다.

왜 여지껏 자신처럼 다소 당돌하고 문제의식이 충만한 여류 예술가가 드물었다고 보느냐?고 물었더니, "없었던 것이 아니라 나타나지 않았거나 못 본 것이겠지요." "모난 돌은 정 맞고. 너무 세면 부러지고. 그래서 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 여자이니라고 했던가요(웃음)."

누가 술을 천상의 음식이라고 했던가. 그이 역시 酒(주)님을 꽤 섬기는 편이고 주류학(?) 혹은 주도학에 꽤 일가견이 있는데, 술잔을 부딪치거나 권하는 행위는 남녀를 가리지 않고 일생일대 자신의 큰 뜻을 상대방과 진정으로 나누고 싶다는 의미라고 강조했다. 물론 페미니스트답게 술은 남자의 전유물만이 아니며 인간 모두에게 골고루 내리는 신의 뜻이 담겨 있다는 것,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함께 나누는 생성과 화합의 묘약이라고 굳이 덧붙이고 있었다.

* 숨가쁘게 이어진 실험 무대

한때 외국에서는 장고춤 공연을 선보일 정도로 여성적이던 그이가 한편으로는 남성적이고 공격적인 기질이 많은 것도 특질이라면 특질. 그이는 지난 89년 세계 연극인의 올림픽이라고 일컫는 국제극예술협회 총회에서 전통무예 `택견을 선보였고 이를 바탕으로 신연기론을 주창하기도 했다. 남성위주 전통무예가 한 여성배우에 의해 본격적으로 여성감각으로 다듬어져 선보였던 것이다. 그 파장은 대단한 것이었다.

이후 여성문화 운동 단체인 또 하나의 문화의 몸살림판이라는 이름으로 여성계에 택견 붐이 얼었다. 끊임없이 새로운 여성문화, 여성운동을 전개했던 그이는 93년 11월에는 이색적인 연주회 하나를 예술의 전당 무대에 올리기도 했다. 플롯 연주자 문록선, 설치 미술가 양주혜씨와 의기투합한 일종의 실험무대였다. 이름하여 문록선 플루트 콘서트- 소리, 그 움직임이라는 제목의 무대였다.

플루트와 무용은 인간의 호흡에 의존하는 예술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는 것이고, 소리를 움직임으로 시각화 해서 연주자와 관객을 진정으로 열린 공간에 끌어들인다는 실험 마당이었다.

그런 열정의 도가니, 폭발적인 힘과 쉬임없는 에너지가 유감없이 발휘된 작품이 五友祭(오우제)이기도 하다. 퍼포먼스의 정수라고 불렸던 이 작품은 지난 97년 세계 연극제의 공식 초청작으로 큰 호평을 받았고, 다음해 열린 서울국제연극제에서도 또다시 공식 초청작품으로 개막축하 공연에 올려져, 언론으로부터 "살냄새 나는 몸의 연극, `문화핵폭탄, `철철 넘치는 기와 원시적 에너지의 발산"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그이의 실험무대는 숨가쁠 정도로 이어져 갔다. 지난 6월에는 예술의 전당 자유 소극장에서 間隙(간극)이라는 퍼포먼스 작품을 올렸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뉴미디어 시대를 맞아 지금까지 느껴온 허상과 가상의 세계가 테크놀로지를 통해 경계를 허물고 있는 그런 현실을 어필한 작품이었다.

그렇다. 어떠한 황무지라도 그이의 창조적 삽질에 걸려들면 바로 개조되고 재창조되어 가고야 만다. 매사 일 속에서 엔돌핀을 찾고 그 엔돌핀에 의해 모험, 도전, 변신의 힘들은 쉬지않고 작동한다. 그이의 몸과 생각은 하나의 톱니바퀴가 되고 이 사회 한복판의 필수불가결의 문화적 메카니즘이 된다.

그이의 논리적이고 적극적인 성격은 죄다 어머니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란다. 그이의 어머니는 늘 책을 가까이 했고 사고력과 기억이 뛰어난 편이었다고 한다. 구수한 이야기꾼이면서 대화할 때는 실감나는 표정과 화법으로 좌중을 휘어 잡았단다. 그이는 그런 어머니의 피를 받고 거기에 예민한 촉각과 똑똑 부러지는 성질을 업그레이드한 인생이 아닌가 싶다.

그런 그이의 인생을 스스로 성공한 여성이라고 보느냐?고 물었다.
"성공이요? 글쎄요… 앞으로 한 이십년 후 걸쭉한 살풀이 한판을 할 수 있다면 그것이 진정으로 성공한 인생이 아닐까요?"

휴머니즘, 인간 실존의 문제, 자아의 정체성 확인과 같은 주제들을 연극만큼 강렬하게 보여주는 것은 없을 것이다. 그것을 가장 뜨거운 열정의 무대로 삼고 사는 대표적인 이가 바로 이영란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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