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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의 평사리에 가보셨나요?

여행과 미디어/여행길 만난 인연

by 한방울 2004. 2. 12. 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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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 젖은 연못가의 도랑물 소리

얼마 전 남도기행 길에 들렸던 평사리에 대한 추억은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을 것 같다. 박경리 소설 '토지' 무대이기도 한 평사리 최참판댁에서 이틀을 묵었었다. 정자가 있는 사랑채에서 맞은 첫날밤은 도대체 잠이 오질 않았다. 창호지 문에 달빛이 설핏설핏 스미더니만 이윽고 나그네를 정자 아래 연못가에 불러 세웠다. 수련이 수런대는 못물에 달빛이 일렁였다. 그 시절에 정녕 최참판댁 아낙은 이 풍경을 보고 얼마나 가슴 설렜을꼬...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뜨락을 서성이다가 다시 잠자리에 들라치면 뒤안에서 대롱을 타고 도랑물 뚝, 뚝 떨어지는 소리에 결국 잠 못 이룬 채 자정을 넘기고 말았다. 뒤안길에는 흰 물줄기를 바라보며 목련이 자줏빛으로 새벽하늘을 내내 밝히고 서 있었다. 그랬다. 그 옛날 우리네 고향은 가난했지만 그렇게 아련한 추억으로 울타리를 이루며 도란도란한 밤을 지샜다. 그리고 다시 새벽 들녘을 맞았다. 처마 밑 망태에 올라 뽑아 제끼던 그 닭울음소리와 함께 말이다.

뜬눈으로 보낸 하룻밤이었지만 어머니의 가슴 같은 지리산 등성이 넘어오는 해여울에 내 마음도 맑고 환해졌다. 햇살 따라 가는 나의 눈길은 이내 드넓은 평사리 들판을 너머 나즈막히 흐르는 섬진강 물줄기에 다다랐다. 저 강물 속의 은어 떼며 재첩들도 설잠 깬 채 아침 길을 꼼지락대고 있을까나....

그렇게 평사리는 뒤로는 지리산, 앞에는 섬진강을 띄우고 있다. 경남과 전남의 경계를 이루는 젖줄이기도 하다. 전남 순천과 광양 사람들은 섬진강 나룻배 타고 오갔고, 남원과 구례, 곡성 사람들은 지리산 등성이 넘어 경남 하동군 화개장터에 당도했다. 저마다 고향은 다르지만 서로 만나 필요한 물품을 교환하고 막걸리 한 사발씩 돌리며 훈훈한 정담을 나누던 이웃사촌이었다. 최근 양 강변을 잇는 남도대교까지 개통되어 다시 한번 그 옛날 정겨운 추억 속으로 강물처럼 젖어들고 있는 느낌이다.

인생도 농사도 순리대로 사는 것

아무튼 평사리는 소설의 줄거리처럼 실제 일본군과 북한군으로부터 갖은 희생을 치르며 토지를 지켜온 곳이다. 그래서 유달리 농민들의 생명력이 끈끈하고 강하다. 그런 산증인인 이복록 할아버지를 만날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 그는 과수원에서 예초기로 열심히 풀베기 중이었다. 4대째 이 마을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고 했다. 그에 따르면 평사리는 좌우 싸움이 많았던 곳이기도 하지만 지금 보다 훨씬 풍요롭고 평화스러운 강촌이면서 산촌이요 농촌이었단다. 지리산에 널린 산수유와 신갈나무, 밤나무, 감나무 등 갖가지 열매를 언제든지 따먹을 수 있었다. 지리산 자락이 거울처럼 비치던 섬진강에서 은어, 눈치, 황어, 쏘가리를 잡아 끼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됐단다.

그러나 작금에 적자 농사가 이어진단다. 무분별한 모래 파기 공사와 저마다 관광 수입에 치중하면서 재첩마저 죽어간단다. 바닷물이 역류하고 있어 큰일이란다. 그것이 못내 안타깝단다. 벌이가 시원찮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졌다. 지난해 태풍 루사로 벼농사를 다 망친 후 애지중지하던 쟁기마저 처분하고 지금은 논 세 마지기와 밭 세마지기에서 콩과 파 등을 일구며 "순리대로 산다"고 말했다.

순리라? 그는 농사 짓는 일은 순리대로 사는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다시 한번, 순리란 무엇이냐고 되묻자, 봄에는 논둑 태우고 가을엔 거름 내고 다시 논 갈아엎고 물 댄 후 논 썰고, 다시 씨나락 모판에 담고 모 발아시키고...못물 대고 모 심으면 논물을 살피고... 논둑길 잡초 베고...그렇게 황금들판을 맞는 것이란다. 그냥 그저 논밭으로 나가는 일상 같다는 생각에 아무 대꾸를 못하고 있는데, 그는 이방인이 도대체 말기를 못 알아듣는다는 듯이, "보살핌과 땀흘림에 따라 얻는 곡식이 많고 적어지는 기여...그것이 자연의 순리이고 농사의 순리인기라...." 설명했다.

좀, 알쏭달쏭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어 여전히 그 다음 대꾸를 못하는데, 그는 다시 이런 말을 했다. 누군들 곡식의 제 값 못 받을 때 허탈감이 없겠냐면서, 그렇다고 고향 등지고 떠나면 누가 농촌을 지킨다 말인기라.... 진정한 농사꾼은 물질 때문에 삶의 터전을 쉬이 버리며 흙을 무시하지 않는 다는 것이다. 고집스러울 정도로 흙에 대한 사랑이 깊던 그는 흙을 사랑하고 자연을 신뢰할 때만 자연도 사람도 두루두루 평안하다고 했다. 농촌이 평화로워야 세상이 편안하다는 뜻이었을 것이다.

인정 많은 농촌생활 그리워

천상 농사꾼이다 싶은 그에게 유기농법에 대해 묻자, "조상 대대로 해온 것이 유기농법이지, 뭐?."라고 잘라 말했다. 그가 말한 유기농 방식은 의외로 간단했다. 칠성무당벌레는 진딧물을 좋아해 함부로 쫓아내면 안되고, 개구리는 여러 해충을 꿀꺽 꿀꺽 삼킬 줄 아는 밭의 일꾼이나 다름없는 것. 거미는 벼 사이에 그물을 쳐 벼멸구 등 병충해를 막는다면서 '논의 명포수'라는 것이다. 또한 거미는 밭에서도 채소 잎과 잎 사이에 그물을 치고 잠자리, 풍뎅이, 메뚜기, 배추흰나비 유충을 솎아낸단다. 겹눈이 레이다 같은 잠자리는 눈을 빙빙 돌리면서 개미나 벌레를 먹어치운단다. 본디 조상들은 이런 농사법을 알았거늘 무슨 놈의 어려운 단어 쓰느냐는 투였다.

그는 얼굴에 패인 잔주름만큼 흙에 깊고 뜨겁게 발붙이고 살아온 농군이었다. 그런 세월만큼 자연의 소리까지 들을 줄 아는 진정한 '농자천하지대본'이었다. 천부적 농사꾼이요 자연의 영원한 친구라는 생각이 들었다. 젊은 날 경찰관 생활을 조금 하다가 고향으로 돌아와 이장을 한 10년 넘게 했던 그는 불혹에 폐결핵을 앓기도 했지만 공기 좋은 농촌 생활 덕에 일흔 일곱 나이까지 잔병치레 없이 살아왔다고 자랑했다. 그런 그에게 남은 세월 꼭 이루고 싶은 것이 있다면 무엇이냐고 묻자, 그 대답 또한 의외였다. "돈은 있다가도 없는 것...살다 보면 풍년도 흉년도 있는 기라....옛날처럼 인정 넘치는 농촌이었으면 원이 없겠는기라...."

짤막한 대화 마디마디에 무언가 깊이 패였으면서도 무심하게 살아가려는 원숙한 농군의 심성을 헤아리게 했던 그날의 그 할아버지. 그 여름날의 추억을 되새김질하면서 최근 나는 다시 주말기행 길에 섬진강을 찾았다. 태풍 매미가 지나간 흔적이 역력했지만 그래도 용케 버티고 선 들녘이 할아버지와 재회하는 듯 반가웠다. 더러는 벼들이 자신들만 살아남아 이 가을을 맞는 마음이 괜스레 미안하다는 듯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정말 벼는 볼수록 겸허한 풀이다. 그 벼를 바라보면서 문득, 이성부 시인의 '벼'라는 시 한편이 떠올랐다.

벼는 서로 어우러져
기대고 산다.
햇살 따가와질수록
깊이 익어 스스로를 아끼고
이웃들에게 저를 맡긴다.

서로가 서로의 몸을 묶어
더 튼튼해진 백성들을 보아라
죄도 없이 죄지어서 더욱 불타는
마음들을 보아라 벼가 춤출 때
벼는 소리없이 떠나간다.

벼는 가을 하늘에도
서러운 눈 씻어 맑게 다스릴 줄 알고
바람 한 점에도
제 몸의 노여움을 덮는다.
저의 가슴도 더운 줄을 안다.


벼가 떠나가며 바치는
이 넓디 넓은 사랑
쓰러지고 쓰러지고 다시 일어서서 드리는
이 피 묻은 그리움,
이 넉넉한 힘

-이성부, '벼' 전문

벼는 한 톨의 쌀을 열매맺기 위해 수많은 손길을 필요로 한다. 수확기가 끝나면 숙명적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슬픔과 기쁨으로 뒤흔드는 한해살이 풀이다. 이 벼의 다사다난함만큼이나 '벼'라는 시가 등장하던 시절 또한 정치적 경제적으로 아무 어려웠던 격변기였다. 70년대 선보인 이 시는 74년에 '우리들의 양식' 이라는 시집으로 묶여 나왔다. 33년의 세월이 흘렀음에 불구하고 이 시가 주는 느낌은 여전히 강렬하게 와 닿는다. 아마도 흉년이니 농민자살이니 하면서 축 처진 우리네 분위기 탓 때문일까. 그러나 '벼'는 세상이 각박해질수록 '공동체' 라는 화두를 던져주는 듯 하다. 이즈음 우리네 분위기에서는 더더욱 이 시집 제목처럼 벼의 생명력, 벼의 희망이 '우리들의 양식'이어야 함을 깨닫게 해준다.

벼, 어려울수록 서로 의지하는 민초의 자화상

이 시의 키워드인 '벼'는 어려울수록 서로 의지하며 사는 민초의 모습이다. 서로 묶이고 어깨 걸어서 더 큰 희망으로 나아가는 생명력의 표상인 것이다. 바람불면 일제히 한 물결로 엎드리고, 바람결에 일어설 때는 일제히 어깨 걸고 함께 일어서는 그런 모습이다. 저 들판의 벼들을 보라.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속담의 차원을 넘어 "깊이 익어 스스로를 아끼고/이웃들에게 저를 맡긴다"라는 연대감을 떠올려 준다. 벼라는 풀은 이해와 사랑, 그리고 겸허함의 세상살이를 평사리 그 할아버지의 숙성된 삶으로 우리에게 다가선다.

하긴, 벼 수확에 관한 이야기가 온 국민의 관심사가 된지 오래이다. 우연은 아닐 것이다. 식탁을 지탱하는 차원을 넘어 벼의 생태는 인간이 추구하는 이상을 닮았다. 벼는 그런 것이다. 푸르른 청춘이 노객으로 저물어 가듯 그런 인간의 군상처럼 질척이는 모판에서 꿈을 시작하고 주름진 손바닥 발바닥처럼 굳은 땅뙈기에서 알곡으로 영근다. 영글어서는 저를 키우고 숱한 비바람을 견디게 한 논바닥을 향해 다시 고개를 숙인다.

저 벼들의 모습을 보라. 벼들은 익어서는 할아버지 큰고모 작은고모 온 식구들이 마당에서 돌리던 풍구에 알맹이를 토해낸다. 그리고 세월의 물살에 밀려 시골 사람들이 이승을 떠나 선산으로 향할 때, 그 꽃상여 앞에서 장송곡을 부르며 징을 치던 사람의 손에는 늘 짚으로 묶인 징채가 있었다. 마지막까지 벼는 농민과 그 생애를 함께 한 셈이다. 죽어서도 제 목숨과 함께 한 농부를 생각하는 운명적인 풀인 셈이다. 그것을 우리는 말없이 벼가 건네이던 수구초심, 백골난망의 마음 씀씀이라고 생각해도 좋을 터이다.

그렇게 한 톨의 쌀로 빚어진 우리네 새 생명, 새 희망인 벼! 마치 죽어 사리를 남기듯이 최후에 한 알의 정신으로 여물어 뱉어내는 벼를 보고 있노라면, 여전히 큰 것과 많고 높은 곳을 향하는 자본주의와 개인주의, 이기주의 군상들과 비교된다. 그런 세태의 물결에 알곡의 생명이 무관심으로 대접받는 것 같아 안타깝다. 이런 벼가 지탱하고 잉태하는 고귀한 흙의 정신이 그런 시류로 흙탕물 치고 있는 것 같아 슬퍼질 때가 있다. 그 슬픔을 아는지 모르는지, 올해 농사는 흉년이라는데 저 들판에서 타작을 가다리며 꼿꼿이 서 있는 벼들은 가을바람을 쓸어 넘기고 새떼들을 허공에 무심히도 풀어놓고 있다.

저 벼들은 이제 껍질을 벗고 제 종자인 씨알을 까놓을 것이다. 껍질은 밍크코트보다도 따스운 체온으로 이엉을 이을 것이고 농민들 삶의 바람막이가 될 것이다. 저 벼들처럼 우리도 누군가에게 그런 따뜻한 사랑이었으면 얼마나 좋으랴. 누군가의 위안이 되는 그런 벼들의 사랑이면 얼마나 좋으랴. 저 벼들을 보면서 결국 자연의 극치는 사랑임을 깨닫는다. 독일의 시인 괴테는 일찍이 사람은 사랑에 의해서만 자연에 접근할 수 있다고 했다. 사랑은 평화의 모체이다. 그래서 만인은 여전히 사랑을 꿈꾸고 자연으로 되돌아가기를 원한다. 인간의 원초적인 고향은 바로 저 평화로운 자연인 것이다.

이제 우리도 저 들녘에서 끝끝내, 마침내, 기필코, 살아남은 벼들의 희망을 이야기하면 얼마나 좋으랴. "서로가 서로의 몸을 묶어/더 튼튼해진 백성들'의 모습으로 말이다. 그래서 바람 부는 날에는 함께 흔들리고, 함께 노래하는 저 벼들처럼 이 금수강산에 한 마음 한 물결로 물결치면 얼마나 좋으랴. 지금, 저 들판의 벼들은 속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람들이여, 바닥을 친 흉년 소식은 정녕, 이 다음 더 크게 이 들판에서 우리 모두가 불러제낄 풍년가의 전주곡일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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