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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읽어야 할'평범한 영웅' 이야기

여행과 미디어/여행길 만난 인연

by 한방울 2004. 2. 12. 1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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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은 가능성에 대한 정열이다

세상이 급변하면서 마음도 각져지고 있다. 자연을 바라보는 시선마저 여유가 없다. 산은 굽어 내려가는데 자꾸 사람들은 오르려고만 한다. 그래서 천천히, 남모르게 피어나는 들꽃 같은 삶에 점점 무관심해진다. 그것이 자꾸만 안타깝다. 예로부터 우리네 농부들은 힘들면 함께 노동요를 불렀다. 세상 시름이랑 거친 세월도 그렇게 갈바람에 훌훌 털며 살았다. 일손이 모자라면 품앗이를 통해 누가 일러주지 않아도 백지장도 맞들면 가볍다는 것을 실감했다. 그런 삶의 풍경들 자체가 바로 우리네 전통문화의 뿌리였다. 전통은 후손들의 삶의 길을 안내하는 방향타이다. 도시민이든 농민이든 모두가 힘들어하는 요즈음에 가장 평범한 진실을 온몸으로 보여주는 사람이 있다. 희망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가능성에 대한 정열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웅변해주고 있는 셈이다.

주말이면 길 떠나는 필자는 얼마 전 천안 외곽 한 둑길에서 한 농군을 만날 수 있었다. 그는 천안에서 태어나 3대째 농사를 짓는 서른 후반의 이재영씨. 들길에서 막걸리를 나눠 마시며 많은 대화를 나누던 중에 이 마을 사람들은 그를 '평범한 영웅'이라고 부르고 있음을 알았다. '영웅'이면 영웅이지 왜 '평범한'이란 수식어를 붙었을까? 하긴, 천재는 요절하기 쉽고 홀로 크는 영웅은 외롭고 적이 많기 마련일 터. 특히 요즈음 같은 경쟁 시대에는 말이다. 그가 사는 천안시는 신도시 붐이 뜨거워지면서 정부가 투기 억제지역으로 묶어 놓은 곳으로 대부분의 원주민들은 땅을 팔고 고향 등진 채 뿔뿔이 흩어졌지만 그만은 여전히 조상 대대로 다진 흙에서 살고 있었다.

자급자족과 나눔의 농사를 아는 젊은 농군

그는 논 32마지기와 밭 2,500평을 소유하고 있고 4,000평을 임차해 논에는 벼를 심고 밭에는 시설 하우스로 머위 작물과 콩, 마늘, 대파, 깨 등을 심어 가꾸며 사는 흙의 사랑에 취해 사는 사람이다. 그가 수확한 농산물은 돈벌이보다는 형제간에 자급자족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다는 점이 눈길을 끌었다. 그는 수확한 농산물은 가족과 형제들에게 먼저 나누어줌으로써 요즈음 세상에서 보기 힘들 정도로 끈끈한 형제간의 우애를 다져가고 있었다. 맨 먼저 수확한 농산물을 그가 모시고 사는 부모님 식탁에 올리고 그 다음은 객지에 흩어져 사는 형제들에게 트럭으로 직접 배달해 준다. 그리고 이웃의 연로한 노인들에게 나누어주고 나머지는 트럭에 싣고 전국 각지를 돌며 판다는 것이다.

그는 중학교 때 일찌감치 농사에 매료되었고 신선한 농작물을 누군가에게 나누어주고 그들이 기뻐하는 일을 자신의 기쁨이요 보람으로 삼았다고 한다. 중학교 때 젖소 40두를 기를 정도로 이미 목장 주인이기도 했다. 그는 소들과 친구가 되어 생활하는 것이 마냥 좋았고 그의 친구들 역시 그런 그가 좋아 학교 수업이 끝나면 목장으로 몰려와 옥수수를 수확해 기계로 잘게 자르는, 일명 엔실리지 작업을 통해 창고에 겨울먹이로 저장하는 일을 도우며 땀에 흠뻑 젖은 채로 웃음꽃 피던 그런 학창시절이었다.

그러나 생산비가 우유 값을 따라가지 못하면서 10여 년 동안 해오던 목장 일을 접고 틈틈이 해오던 논밭 일에 매달리게 되었다. 그는 흙에 대한 애착이 매우 커서 휴경지로 남아 있는 땅까지 빌려서 농작물과 함께 생활해왔다. 그런 그에게 어떤 사람은 그냥 빌려주기도 했고 어떤 사람은 농산물로 임대비용을 대신해 주기도 했으며, 어떤 사람은 아파트를 지으려고 사 놓은 땅을 그의 열정에 반해 공사를 차일피일 미루어야 해서 안타까워하기도 했다.

"농사꾼 땅 밟는 횟수 잦을수록 농작물은 편안하게 잘 자란다"

그는 처음부터 중고 1톤 트럭과 트랙터를 사서 농사일을 했다. 이는 농기계 다루기를 즐겨하는 탓도 있지만 신속한 배달과 농작물의 성장 시기를 맞추고 토양의 적절한 배분을 위해서는 더 이상 곡괭이나 삽질로 하루해를 보낼 수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농사꾼이 땅을 밟는 발길이 잦아질수록 농작물은 안심하고 편안하게 자란다"면서 지금도 새벽 4시에 일어나 들판으로 나가 밤을 지새운 농작물을 쓰다듬어 주는 일을 빠뜨리지 않고 있단다. 땡볕이 내리 째일 때면 자신도 땡볕 아래서 땀을 흘리고 비가 오면 오는 대로 함께 젖어서 일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사람의 심정으로 커나가는 작물들이기에 가뭄이나 집중호우를 걱정하는 일은 없다. 평소 편안하게 성장한 작물들은 뿌리가 깊어 어떤 비바람에도 잘 견뎌준다는 것이다. 그는 농기계 역시 작물 다루듯이 하는데, 오래된 기계가 천천히 돌아가는 것을 보면서 그 기계 속도와 힘에 맞춰 일해야 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깨달았단다. 그러면서 어쩜 우리네 삶도 증기기관차 같은 것이 아니겠느냐고 반문했다. 작은 나사 하나 하나가 맞물리면서 수증기를 내뿜으면서 가는 증기기관차는 오르막에서는 천천히 가고 내리막에서는 조금 여유있게 간다는 것이다.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가지만 결국은 안전하게 목적지에 이른다는 것이다. 그렇게 말하는 그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그는 분명 세상을 비우면서 삶을 긍정하고 자연에 맞춰 살아가는 일이 무엇인지를 흙을 통해 그 무엇인가를 많이 깨달은 듯 보였다.

천천히 사는 삶이 아름다워, 들꽃 화분 만들어 이웃에 선물

그는 막걸리에 포기김치를 찢어 먹고는 곧, 트랙터로 흙을 퍼 올리는 일을 시작했는데 흙을 퍼 올릴 때마다 잡초더미에 색색의 꽃들이 섞여 나왔다. 그는 이를 추려내 밭이랑 한쪽에 묻어 두고는 다시 트랙터에 올라탔다. "이것이 무엇이냐?"고 묻자, 그는 농장에서는 잡풀이지만 화분에 심어두면 아름다운 야생초라며 웃었다. 그리고는 시설 하우스 안에 있던 플라스틱 화분에 양질의 토양과 자갈을 깔고 그 들꽃들을 심었다. 그리고 화분 맨 위에는 물로 씻은 자갈 몇 개와 푸른 이끼를 얹었다. 꽃도 꽃이지만 흙무더기에서 캔 돌들과 푸른 이끼가 푸른 하늘에서 조리개질처럼 쏟아지는 햇살에 반짝이는 그 꽃의 자태라는 게 여간 아름다운 게 아니었다. 그리고 그 화분을 만들어 필자와 길 가던 이웃에게 나누어주는 것이었다.

얼마 전에 그는 농사일을 하던 중 들판을 지나던 한 대학 관계자의 눈에 띄어 농사일이 없는 날에는 대학 시설주임으로 일할 것을 제의 받았다고 한다. 대학측은 그에게 특별한 일을 지시하지 않고 알아서 일하고 퇴근하게 했단다. 그는 잔재주가 많아 전기 수리, 미장, 캠퍼스 가지치기 등을 알아서 하고 진입로가 무너지면 알아서 트랙터를 몰고 다지는 일을 해왔단다. 파헤쳐진 흙을 보면 메우고만 싶고, 그렇듯이 우리 삶도 살다가 여러 풍파를 만나 생긴 상처는 언제든지 메울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을 그의 몸놀림을 얼핏 바라보면서 생각하기도 했다.

꿈은 천천히 이루어진다...

밭일이 거의 끝나갈 무렵에 그를 따라 나섰는데, 그는 돌아오는 길에도 나이 든 농부들의 일손이 끝나지 않았음에 반사적으로 트랙터를 몰고 들어가 흙무더기를 파헤쳐 파종을 돕곤 했다. 하늘은 그런 큰사랑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 몇 해 전 그의 셋째 아들이 교통사고로 유명을 달리했을 때 얼마 가지 않아 그 자식의 매무새와 꼭 닮은 아들을 낳았다고 한다. 그 때 마을 사람들은 하늘도 감동한 것이라면서 좋아했다 한다. 그랬을 것이다. 하늘은 스스로 자를 돕는 법이니 말이다. 자연과 함께 삶은 그런 것일 것이다. 멧부리 이슬이 뚝, 뚝 져서 강을 이루고 강이 바다로 이르듯이 그렇게 굽어 사는 삶이 바로 우리가 가고자 하는 희망의 길이 아니겠는가. 그 희망의 길이 무엇인지를 이 젊은 농군은 흙을 통해 짐짓 깨달았던 것 같다.

그렇다. 꿈은 천천히 이루어진다. 지금 잠시 아픔과 분노, 갈등이 우리네 일상을 번잡하게 할지라도 흙만은 한결같이 강인하고 믿을 만 한 것임에 분명하다. 흙은 썩어 가는 거름을 생명의 밑거름으로 삼고 세상 허드렛물을 다 보듬어 여과시키면서 희망의 씨앗을 틔워간다. 그런 흙은 속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오늘도 '흙의 삶'을 영위하는 모든 이에게 우리시대 '평범한 영웅', '행복한 영웅'의 월계관을 씌워주고 싶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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