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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화꽃 눈꽃처럼 흐드러진 강변에서 만난 송수권 시인

섬과 문학기행/시인을 찾아서

by 한방울 2004. 2. 13.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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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을 찾아서 ① 송수권 시인의 어초장(漁樵莊)

매화향 가득한 섬진강, 봄은 기지개를 펴고


* 매화꽃 눈꽃처럼 흐드러진 강변에 선 집필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봄이 열린다는 섬진강. 북쪽으로 산마을, 남쪽으로는 강마을 정취가 그윽한 섬진강의 봄은 하동포구로부터 매화향이 휘날려 천리 길을 달린다. 계절마다 은어 떼 연어 떼를 바꿔 몰고 햇살 눈부시며 휘어 돌아가는 강줄기 양 겨드랑이에는 매화꽃 이어 달리는 듯 싶으면, 금방 벚꽃이며 야생차밭 다향이 그림자처럼 따라 붙어 상춘객의 가슴을 환장하게 뒤집어 놓는다.

섬진강은 그렇다. 3월 매화꽃 지면 다시 하동읍에서 쌍계사로 가는 80리 길에 벚꽃터널 또한 장관을 이룬다. 벚꽃이 절정에 이를 무렵엔 지리산 선녀들이 살포
시 내려앉듯이 하얀 배꽃이 꽃망울을 터뜨린다.

섬진강! 고운 모래가 많아 본디 모래가람 또는 다사강으로 불렸던 곳. 그러다 고려 때 왜구가 하동 쪽에서 광양 쪽으로 침입한 일이 있었는데, 다압면 섬진나루(일명 꽃나루)에서 두꺼비 수십만 마리가 떼로 몰려와 진을 치고 울부짖어 왜구들이 줄행랑을 쳤단다. 그래서 두꺼비 섬(蟾)자가 붙여진 섬진강이란다. 봄이면 이곳 다압면 매화마을 일대에는 매화꽃이 뒤집어져 국도변은 온통 눈꽃처럼 꽃길이 환하다. 이 마을에 접해 있는 염창마을에 山門에 기대어와 지리산 뻐꾹새의 주인공 송수권 시인(순천대 문창과 교수) 집필실이 있다. 이름하여 어초장(漁樵莊).

* 등단 무대인 섬진강으로 23년만에 돌아온 시인

어초장 밑 수만 평의 모래밭에 깔린 강어귀에는 쏘가리 낚시 포인트가 있다. 그이는 이 곳에서 낚싯대를 드리우고 시심(詩心)을 낚는다. 반짝이는 물비늘처럼 소루쟁이 풀꽃 한 송이가 피어날 적엔 태초의 시간 속으로 빠져들곤 한단다. 햇살 따사로운 날엔 강변의 들쑥을 캐서 손수 쑥국을 끓여 먹기도 한다. 문우들이 찾아온 날에는 재첩회에 직접 산에서 따다 담근 산딸기주를 내어 주기도 한다. 그렇게 섬진강에 빠져 지내다가 시상이 떠오르면 육신을 내려놓은 채 가감없이 원고지의 칸을 메꾸어 간다. 집필실 이마엔 통나무에 인두로 새긴 어초장 표지판이 걸려 있다. 그 아래 벽창호지에 참매화 향이라는 시가 벽에 나붙어 있다.

그동안 머물렀던 변산반도 격포 집필 시대를 마감하고 올해 초 이곳에 집필시대를 열면서 이녘의 다짐을 정리한 시이다. "......허옇게 얼어붙은 강줄기를 내려다 보며/이 적막한 시대에 우린 또 누구를 기다려야 하나/어디에 가서 큰 절 올리고 무릎 꿇어야 하나/참매화 향이 그리운 밤/뽕짝조 詩도/개매화도 작당으로 피는 시절/스승도 제자도 갈곳도 따로 없는 밤/뜰에 조선매화 한 그루 심어 놓고/암향부동이란 말/함부로 써도 되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이녘을 한국시단으로 우뚝 서게 한 지리산 마주한 섬진강에서 귀거래사를 읊조리고 있는 천상의 시인 송수권. 그이가 집필실 근처에 있는 구례중학교를 떠난 것도 23년 전인 78년의 일이다. 76년에는 섬진강이 내려다보이는 지리산 노고단에서 최초 산상시화전을 열기도 했던 그이는, 지금 耳順에 접어들어 다시 섬진강 시대를 열고 있다.

누이야
가을 산(山) 그리메에 빠진 눈썹 두어 낱을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정정(淨淨)한 눈물 돌로 눌러 죽이고
그 눈물 끝을 따라가면
즈믄 밤의 강(江)이 일어서던 것을
그 강물 깊이깊이 가라앉은 고뇌(苦惱)의 말씀들
돌로 살아서 반짝여 오던 것을
더러는 물 속에서 튀는 물고기 같이 살아 오던 것을
그리고 산다화(山茶花) 한 가지 꺾어 스스럼없이
건네이던 것을

누이야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가을 산 그리메에 빠져 떠돌던, 그 눈썹 두어 낱을 기러기가
강물에 부리고 가는 것을
내 한 잔(盞)은 마시고 한 잔은 비워 두고
더러는 잎새에 살아서 튀는 물방울 같이
그렇게 만나는 것을

누이야 아는가
가을 산 그리메에 빠져 떠돌던
눈썹 두어 낱이
지금 이 못물 속에 비쳐옴을
山門에 기대어 전문

* 지리산 능선들처럼 치렁치렁한 恨, 섬진강 햇살같은 영혼으로 되살리고

이 詩의 무대인 지리산은 집필실 창문을 열면 바로 눈앞에 다가서 있다. 우리나라 산수유 30퍼센트가 지리산자락에 있는 산동면에서 피고 진다. 지리산은 10여 개의 山寺를 껴안고 있는 것이 특징이기도 한데, 화엄사 경내에는 그이의 詩碑가 서 있기도 하다.

이 시는 74년작품인데 75년에야 발표됐다. 그런 배경에는 기가 막힌 사연 때문이다. 66년 군에서 돌아온 동생이 갑자기 자살을 했다. 가난한 집안에 어머니의 젖마저 제대로 못 먹으며 어질병 등 병을 달고 성장기를 보냈던 동생이었다. 그 恨이 얼마나 깊고 아우에 대한 그리움 깊었으면 기러기가 공중에 길을 내는 것만 봐도 유난히 눈썹 짙던 누이(동생)의 눈썹 두어 낱으로 다가섰을까. 동생 무덤 앞에서 한 잔은 마시고 한잔은 비워둔 채로 동생이 금방 나타나 빈 잔을 채워줄 것으로 생각했을까.

"지금 이 못물 속에 비쳐 옴을"이라는 마지막 구절에 이르기까지 이 시는 윤회사상을 밑바닥에 깔고 있다. 구르는 돌맹이 같은 인생살이. 그러나 그이는 이 시 첫 연에서 한(恨)을 "돌로 눌러 죽이고", 두 번째 연에서는 "돌로 살아서 반짝여온다"고 노래한다. 절절하고 치열한 한이 불꽃 튀는 것을 느끼게 하는 장면이다.

그렇다. 송수권시인 시의 매력은 치렁치렁한 恨들을 힘있는 곡조로 뽑아 내어 반짝이는 영혼들로 솟구치게 하는데 있다. 그것이 그이만의 독특한 서정시의 창법이다.

* 자살한 동생에 대한 詩로 당선되고 계속되던 떠돌이 생활

그이는 이 시를 서울 서대문구 화성여관 306호실에서 백지에 써서 보냈다. 원고지에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예심 심사위원은 바로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 때 마침 편집실을 둘러보던 당시 <문학사상> 이어령 주간이 작품을 주워 읽어보고는 본심에 올렸던 작품. 그러나 당선작의 주인공은 이미 여관을 떠났었고, 잡지사는 1년 동안 그이를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동생의 죽음으로 충격을 이겨내지 못했던 그이는 화엄사, 쌍계사 등지에서 출가를 결심하며 몇개월씩 머물다가 다시 서울로 떠돌았다. 참으로 기구한 운명이다. 결국 이 잡지가 발굴한 제1호 시인이 된 그이는 파란만장한 인생만큼이나 "쓰레기통에서 나온 시인"이라는 희대의 수식어를 달고, 깊어 가는 섬진강처럼 한국 시단의 한 복판을 도도히 흘러가고 있다. 때로는
지리산 뻐꾹새처럼 온 산하 울어제끼고 남은 울음 추스려 저 남도 들녘을 축축이 적셔 주면서 말이다.

여러 산봉우리에 여러 마리의 뻐꾸기가
울음 울어
떼로 울음 울어
석 석 삼 년도 봄을 더 넘겨서야
나는 길뜬 설움에 맛이 들고
그것이 실상은 한 마리의 뻐꾹새임을
알아냈다.

지리산하(智異山下)
한 봉우리에 숨은 실제의 뻐꾹새가
한 울음을 토해내면
뒷산 봉우리 받아 넘기고
또 뒷산 봉우리 받아 넘기고
그래서 여러 마리의 뻐꾹새로 울음 우는 것을
알았다.

지리산중(智異山中)
저 연연(連連)한 산봉우리들이 다 울고 나서
오래 남은 추스림 끝에
비로소 한 소리 없는 강(江)이 열리는 것을 보았다.

섬진강 섬진강
그 힘센 물줄기가
하동 쪽 남해를 흘러들어
남해군도(南海群島)의 여러 작은 섬을 밀어올리는 것을 보았다.

봄 하룻날 그 눈물 다 슬리어서
지리산하에서 울던 한 마리 뻐꾹새 울음이
이승의 서러운 맨 마지막 빛깔로 남아
이 세석(細石) 철쭉꽃밭을 다 태우는 것을 보았다.
지리산 뻐꾹새 전문

* 신들린 듯 산하를 떠돌며 <주간동아>에 풍류 맛기행을 연재하고

징소리 처 올리듯이 한의 울림이 서럽도록 가슴속을 후벼드는 시이다. 지리산은 그이의 한을 파묻은 지극히 인생유전적인 곳이다. 크게는 민족의 성전이자 함양, 산청, 거창 양민학살로 이어지는 민족간 좌우익 이데올로기의 최후 혈전장이었다. 더 거슬러 가면 최치원이 속세와 발을 끊고 난세의 시끄러운 소리를 물소리에 묻어 귀를 씻고 청학동으로 갔다는 세이암(洗耳岩)이 쌍계사 위에 있고, 김수로왕 일곱 왕자가 입산했다는 칠불암이 화개면 범왕리에 있다.

그이는 이처럼 매몰된 역사의 풍경과 현장을 신들린 듯 발로 뛰며 작품을 집필해왔다. 민초들의 삶을 밀착취재하여 집대성하고자 3년 전부터 <주간동아>에 풍류 맛기행을 연재하고 있기도 하다. 그런 연장선상에서 민족의 카테고리에서 지역문학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중앙집권적 문단권력에 부단히 저항하고 있기도 하다. 지리산 뻐꾹새는 그러한 몸부림의 단면이자 그이의 작품성을 상징하는 대표작이랄 수 있다. 뻐꾹새 울음 떼로 지리산을 울리고 그 산봉우리들 이 다 울고 나서 江이 열렸다고 노래한다. 그 힘센 물줄기가 하동 쪽 섬들을 밀어 올렸다는 대목에서는 그이의 시풍이 얼마나 명징스럽고 강렬한 울림을 울려주는 지를 엿보게 한다. 시인의 삶과 시가 일치하는 모습을 확인시켜주는 사례이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을 해보게도 한다. 영호남 산줄기에 눌러 앉은 지리산 뻐꾹새가 왜 그리도 한스럽게 울음 울었을까. 영호남을 관통하는 섬진강 힘찬 물줄기로 뻗어나가 남해의 아름다운 섬들을 밀어 올렸을까. 지금 그 섬진강에는 남도대교라는 이름의 영호남 화합의 다리가 건설중이다. 전남의 광양 쪽과 경남의 하동 방향을 이어주는 다리이다. 그이는 어쩜 오래 전부터 그리고 지금도 그 다리 아랫녘 나룻배를 타고 화계장터로 오가면서 한 시대의 묵은 지역감정을 쉼없이 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이는 그렇게 화개장터 십리 벚꽃 길을 오가며 화개장길, 앵화 등의 작품을 썼다. 또 재작년엔 남도 풍류 1번지를 떠올리는 <태산풍류와 섬진강>을 펴내기도 했다.

* 강촌마을 소박함을 일깨우는 대숲의 저녁연기

또한 섬진강은 유난히 대숲이 많다. 대숲마을을 끼고 화개골을 덮어 나가는 저녁연기는 전형적인 남도 강촌마을의 뭉클한 삶의 체취를 짙게 풍겨준다. 그이의 집필실 아랫도리에도 바람 한 점만 불면 상모꾼 휘돌듯이 대숲 뒤흔들어 쌓는 풍경이 퍽이나 감동적이다. "대패랭이 끝에 까부는 오백 년 한숨, 삿갓머리에 후둑이는/밤 쏘낙 빗물소리.....//머리에 흰 수건 쓰고 죽창을 깎던, 간 큰 아이들, 황토현을 넘어가던/징소리 꽹과리 소리들....//남도의 마을마다 질펀히 깔리는 대숲 바람소리 속에는/흰 연기 자욱한 모닥불 끄으름내, 몽당빗자루도 개터럭도 보리숭년도 땡볕도/얼개빗도 쇠그릇도 문둥이 장타령도/타는 내음...."

그이의 대숲 바람소리 라는 시는 강촌마을의 소박함과 함께 한편으로는 손 부채, 대금 피리소리, 대가지를 흔드는 무당, 대도롱태(굴렁쇠), 황토현의 죽창 등을 매개물로 우리 민족정서의 한과 저항의 깊은 바닥까지 치고 들어가고 있다. 눈 내리는 대숲 가에서라는 작품으로 정지용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던 그이는, 대숲에서 정적인 가락보다는 신들린 동적 울림을 지향한다. 그이는 국토의 3대 정신을 죽(竹)·황토·뻘의 정신으로 명명했다.

섬진강을 죽(竹)의 정신으로 설명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이는 뻘물, 바지락을 캐며, 수저통에 비치는 저녁 노을 등 변산반도에서 천착했던 뻘의 정신을 갈무리하고 3월중 시선집을 완결한다. 그리고 이제 그간 못 다 추수린 대숲과 황토 정신을 섬진강과 지리산에서 관조하며 정리하려 한다. 민족의 역사와 질퍽한 삶들을 아우르는 서정시인의 아름다운 대단원까지 섬진강에서 장식하려 한다.

그래서 오늘도 눈을 뜨자마자 아침강을 따라 나서는 것이리라.
"누이야, 동트는 우리 새벽 강물/너는 따라가 보았는가/수런수런 큰기침하며 강가에 나와/우리 산들 얼굴 씻는 것/어떤 산은 한 모금 물마시고 쿠렁쿠렁/양치질하는 것/어떤 산은 밤새도록 발을 절고 내려와/발바닥 티눈을 핥는 것/누이야, 너는 그런 동트는 새벽 강물/따라가 보았는가"(아침 강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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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수권 시인 약력: 1940년 전남 고흥 출생, 서라벌예대 문창과 졸업 후 75년 <문학사상> 신인상에 山門에 기대어 등이 당선돼 문단에 데뷔했다. 시집으로 산문에 기대어, 꿈꾸는 섬, 새야 새야 파랑새야, 우리들의 땅, 우리나라 풀이름 외우기, 별밤지기, 지리산 뻐꾹새, 바람에 지는 아픈 꽃잎처럼, 수저통에 비치는 저녁 노을, 들꽃세상, 파천무 등 다수와 산문집 쪽빛세상, 남도의 맛과 멋, 태산풍류와 섬진강 등이 있다. 금호문화 예술상,
전라남도 문화상, 광주 문학상, 소월시 문학상, 서라벌 문학상, 김달진 문학상, 정지용문학상 등 수상했고 현재 순천대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있다.

여행 메모:
*가는 길 ①승용차편 - 서울->호남고속도로 전주IC->구례->구례 간전교 우회전
->섬진강. - 서울->경부·대진·88올림픽 고속도로->지리산IC->60번 국도(729국도)->하동->섬진강
② 기차편- 서울역 밤11시 진주행 출발-> 다음날 06:22 하동역 도착->시외버스로 탑승
③ 버스편- 서울남부터미널 09:10분부터 4차례 직행버스 운행->하동 터미널 시외버스로 탑승
④ 비행기-진주공항->하동(택시 35,000∼40,000원. 30분 소요)
*먹거리: 재첩국, 재첩회, 은어회, 빙어튀김, 참게탕(일신식당 055-884-4739/ 동흥식당055-884-2257/여여식당 055-884-0080/단야식당 055-883-1667), 매실농원(061-772-4066)
* 볼거리: 소설 토지무대 악양면 평사리, 화개장터, 쌍계사 벚꽃터널, 지리산 청학동, 매화마을(화동읍에서 다압면 가는 시외버스 10여분 소요) *숙박:평사리최참판댁(화동군 운영. 10월부터 가능), 미리내(055-884-7292) 섬진각(055-882-4343), 송수권 시인 집필실(061-772-4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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