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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방-이성부 시인을 찾아

섬과 문학기행/시인을 찾아서

by 한방울 2004. 2. 17.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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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을 찾아서 (2)
이성부 시인의 모래내 집필실과 산상창작(山上創作)

- 시인 이성부, 박상건, 박상건

진달래 산수유 개나리꽃 만발한 산에 핀 詩心


800여 차례 등반한 북한산은 빼놓을 수 없는 창작무대
화창한 봄날이다. 한국의 전형적 사내 이성부 시인과 함께 하는 산행이기에 더욱 뜨겁게 달아오른다. 진달래와 개나리꽃도 물이 오를 때로 올라 봄의 절정에 가세했다. 평일 북한산에 종달새 꿩 몇 마리가 상수리나무 잎새를 뒤흔들며 정적을 깼다. 우리나라 산이란 산은 안 가본 곳이 없는 이성부 시인은 바로 전 날도 산악 전문지에 등반기를 쓰기 위해 황학산 아래 직지사에서 추풍령에 이르는 4㎞를 등반하고 돌아온 차였다. 백두대간을 타는 그이에게 북한산은 새발의 피이겠지만 시작활동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무대. 그이는 북한산을 한 달에 세 번 이상씩 오르내린다. 20여 년 동안 북한산 등반만 800여 회의 기록을 갖고 있다.

이날 등반 코스는 승가사 쪽 비봉 쪽이었다. 정상으로 향할수록 산수유 꽃이 한창이다. 새소리 물소리에 봄바람도 더욱 싱그럽게 찰랑였다. 정녕 산은 그이의 아름다운 창작무대이다. 그이는 등반 후 반드시 하산주를 들이킨다. 모래내 시장 근처 마포구 중동에 사는 그이는 시장통에서 막걸리도 한잔하고 취해서 세상도 한판 흔들어 본다. 왁자지껄 시장 사람들 속에서 술잔을 기울인다.

강골 애주가이다. 어째튼 한 편의 작품은 바로 완결되지는 않고, 생각이 익어야 원고지에 작품을 옮긴다. 보통 원고청탁서가 날라 올 즈음에 무르익어 다듬질이 되곤 한다. 원고 마감이 임박하면 가필 없이 작품을 갈무리한다. 자택 1층에 집필실이 있고, 지하실엔 1만여 권의 책들이 가득 쌓여 있다. 집필실 서재는 누리끼리한 통나무, 초등학교 시절 복도 바닥 같은 황토빛깔에 책 빛깔까지 일체감을 이루고 있었다. 누런 표지의 <창작과 비평>, <문학예술>, <문학과 지성>, <자유문학> 초창기 문예지들이 꽂혀있고, 염상섭의 3대, 박성용, 박이도 시인 등 60년대 문고판 시집들도 정감 어린 표정으로 빼곡이 들어차 있었다.

순간, 그이가 60년대 등단한 시력 40년의 지난한 역사를 걸어온 시인임이 파노라마처럼 스치운다.

* 시인과 바위와 산이 한 몸이 되는 삶과 문학

아무튼 그이는 이 집필실에서 주로 원고를 쓰는데, 원고 완성되는 시점이 청탁주기가 맞물린다. 이는 많은 원고청탁을 받는 시인임을 의미하면서 여전히 독자들로부터 사랑 받는 국민시인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청탁 내용은 시작품에서 산행기, 에세이 등에 이르기까지 그 종류도 다양하다. 그이의 글이 워낙 시원시원하고 에로틱하다는 점이 편집자들에게 매력을 사고 있다.

보라, 똑 같은 산행을 하면서 움직이지 않은 바위를 두고 이렇게 노래하고 있지 않던가. "나는 발기한다/종로 네거리에서 목을 빼고 바라보는/보현봉 푸른 바위가/나를 두근 두근 가슴 뛰게 하듯이/끓는 피로 달려가서/그냥 오르고 오르고만 싶듯이"(봄편지).

그런가 하면 "나는 어느덧 부르르 몸을 떨고/그 바위 숨소리 거칠어질 때까지/까무러칠 때까지/조심스럽게 기다려 맞이하기로 한다"(화강암·9)거나 "빛나는 슬픔덩어리…몸뚱어리 엉켜 또아리진 상처"(바위타기·5) 등, 산이나 바위를 에로티시즘적 욕망의 대상으로 노래한다.

물론 그 작품의 뼈대는 자연과의 합일정신이다. "외로움 속에서 무서움 속에서/비로소 열리는 세계-이 몸 떨리는 合一"처럼. 산은 그이게 슬픔이요 기쁨의 대상이다. 기쁨과 환희의 분신이다. 산은 또 다른 삶의 전형이다. 또 하나의 혈맥이다. 그러기에 그이는 산에게 이녘의 모든 것을 던질 수 있다. 자신의 욕망을 다 분출하고 나면 무한한 소비의 에너지가 또다시 끓어오른다. 산은 일종의 해방구이다. 산은 생명력을 불어 넣어주는 재생, 부활, 윤회의 함의어이다.

그렇게 그이에게 있어 산은 영혼이 눈을 뜨고 이데올로기가 숨쉬는 곳이다. "조금씩 조금씩 어우러져서/함께 몸비비고 울고 피흘리다가/마침내 기쁨에 겨워/소리 쏟아내는 한몸
으로 굳어"간다(화강암·2). 이내, 산은 민중으로 때로는 믿음의 대상으로 노래된다. 늘 함께 하는 공동체적 대상으로써 산이다. "그대 몸 출렁이는 그리움에 매달려/내 가쁜 숨 몰아쉬고/그대 오랜 생채기에 내 발 가 디뎌"(바위타기)처럼 그이는 바위 홈을 생채기라고 의미부여 한다. 바위에도 생명이 있다. 서로가 한 몸이다. 그 아픈 몸에 이녘이 기대어 서 있다고 말한다. 자연친화적이다. 퍽 솔직 겸허한 토로이다.

이렇게 고개를 숙이는 벼처럼 시인의 성숙된 삶과 아름다운 정서는 산행시 전반에 걸쳐 그 밑바닥에 샘물처럼 흐르고 있다.
오늘도 내일도 그렇게 산과 함께 가자는 이성부 시인. "먼발치서 바라보는 산이 아니라/가까이서 몸 비비러가자./온몸으로 온몸으로/우리 부서지기 위해서 가자"(산). 마침내 숨죽이고 살던 민중의 이름으로 일어서 함께 가잔다. 소외된 사람들과 함께. 부서지는 날까지 함께 말이다.

* 공사판 막걸리집 노동자를 주인공으로 한 신춘문예 당선작

그이가 처음부터 산행시를 썼던 것은 아니다. 그이의 시의 출발점은 전라도·백제·광주이다. 중심으로부터의 소외, 유배와 억압의 공간의 의미이다. 질곡의 역사를 삽질하는 무대였다. 그이는 광주에서 1942년에 태어났다. 광주역에서 300여 미터 떨어진 초가집이었다.

당시 광주는 시골 읍내 변두리 정도였다. 그이는 그 곳에서 고등학교까지 다녔다. 철길 너머로 바로 들판이 펼쳐져 있었다. 논길을 따라가다가 보면 저수지가 있고 둑길에는 팽나무 고목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들판으로 메뚜기와 물고기를 잡으러 다녔다. 신작로에서 돼지 창자로 만든 공을 차곤 했다. 삼촌과 함께 팽이도 치고 제기도 찼다. 이 들판이 훗날 벼를 쓴 무대가 됐다.

"벼는 서로 어우러져/기대고 산다./햇살 따가워질수록/깊이 익어 스스로를 아끼고/이웃들에게 저를 맡긴다."(벼) 서로 어우러져 사는 민중들의 끈끈한 연대의식과 그이들의 삶의 모습을 고개 숙여 사는 벼에 빗대어 노래한 작품이다.

그렇게 그이의 시는 남성적이면서 싱싱한 생명력을 동반한다. 그러면서 서정성을 놓치지 않고 있다. 시누대처럼 찰랑찰랑 휘는 맛, 푸른 엽록소가 철철 넘쳐나며 강한 필이 있다. 이런 특징 때문에 그이를 처음 만나는 사람들은 작품의 강렬함에 비해 서정적인 면모에 매료된다. 전형적인 시골 사내의 얼굴, 투박하지 않으면서 굳이 세련되려고 노력하지 않는 모습, 막걸리처럼 정이 깊고 소주처럼 톡톡 쏘는 사내의 의리. 바로 이 대목이 그이의 문학과 삶이 일치하는 접점이 아닐까 싶다.

그이는 유년시절부터 자연과 밀착돼 문학적 상상력을 키
워 왔다. 도시락을 싸들고 도서관에 다니며 1일 3백 페이지 독파!라는 캐치프레이즈를 책상 앞에 붙여놓고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던 독서광이었다. 사범학교를 가서 초등학교 교사가 되라는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뜻을 저버리고 문학을 위해 인문계 고교인 광주고로 진학했다.

이 시절 플라타나스, 눈물 등 명시로 널리 알려진 김현승 선생을 만났다. 스승을 찾는 것이 큰 행사이자 즐거움이었다. 대학노트에 써놓은 시를 갖고 가면 간단한 작품평을 해주고 손수 커피를 끓여 찻잔에 따라 주곤 했다. 그 때 그 손길이 지금도 퍽 인상적이란다. 그이는 고교 3학년 때 전국 규모 학생작품 공모, 백일장 최고상을 휩쓸었다. <전남일보> 신춘문예에도 당선됐다. 이런 글재주로 경희대 국문과에 특기생으로 입학했다. 입학 후 학보사 기자를 했고 경희문학상도 수상했다. 2학년 때 <현대문학>에 추천을 받아 재등단했다.

친구들 자취방을 전전하며 지내던 그이는 더 버틸만한 경제적 능력이 없자 입대를 택했다. 제대 후 광주 집에서 틀어박혀 지낼 때 공사장 근처 오센집이라는 술집에서 막걸리에 마시는 일은 하루 중요한(?) 일과중의 하나였다. 이곳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인텔리 노동자들과 친해졌고 훗날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인 우리들의 양식의 주인공이자 작품의 무대가 됐다. 그렇게 그이는 세 번째 등단을 했다.

* 가장 민중적인 시인이 5월 광주에 절망한 이유

경희대 은사인 조병화 시인 추천으로 성문각 출판사에 취직해 국어 참고서 집필·편집·교정 일을 봤다. 명동 은성 막걸리집에 가서 김수영, 천상병, 박봉우 시인과 수필가 전혜린 등 선배들을 자주 만났다. 출판사를 전전하던 시절에 평론가이던 친구 염무웅과 <창작과 비평> 편집·교정·투고시 선정작업을 1년 가까이 도왔다. 그 당시 선배격인 고은 시인을 비롯 김지하, 정현종, 최하림 시인과 김현, 김치수 평론가들과 자주 어울렸다.

<문학과 지성>의 모태가 되었던 김현·김화영 주도의 소위 68문학에 관여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밥 대신 막걸리로 끼니를 때우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에 전라도 연작시를 발표하면서 서민적 정서에 물든 그이만의 독특한 시의 체질을 확립시켜 나갔다. "노인은 삽으로 榮山江을 퍼올린다
바닥이 보일 때까지/머지않아 그대 눈물의 뿌리가 보일 때까지/노인은 다만/성난 사랑을 혼자서 퍼올린다/(중략)/불은 짊어지고 있는데/아직도 논바닥은 붉게 타는데/바보같이 바보같이 노인은 바보같이"(전라도·7)

상당히 역설적인 시이다. 우직한 노인은 양수기도 아닌 삽자루 하나 들고 영산강물을 퍼 올린다. 영산강은 소외된 지역의 상징. 힘없는 사람이 악다물고 오기로 삽질을 하는 모습을 연상해 보라. 눈물이 강물이 될 때까지, 강물의 밑바닥이 드러날 때까지 끝끝내 삽질을 하는그 우직한 저항. 그것은 노여움이요, 분노의 표출이다. 시인은 이를 성난 사랑이라 표현한다. 역설적이다. 결국은 바보같지만 용서하고 화해하는 것이 세상사가 아니겠느냐는 것. 오히려 피해자가 가해자를 용서해버리자는 메시지로 들린다.

그런 그이가 5월 광주 그 현장에 없었다는 이유로 10여 년간 시를 쓰지 않았던 일화는 문단의 화제이다. 그이는 유배시집·5에서 이렇게 고백했다. "나는 싸우지도 않았고 피흘리지도 않았다./죽음을 그토록 노래했음에도 죽지 않았다./나는 그것들을 멀리서 바라보고만 있었다./비겁하게도 나는 살아남아서/불을 밝힐 수가 없었다. 화살이 되지도 못했다./고향이 꿈틀거리고 있었을 때,/고향이 모두 무너지고 있었을 때,/아니 고향이 새로 태어나고 있었을 때,/나는 아무 것도 손쓸 수가 없었다." 죄책감 때문에 5월과 광주라는 단어 대신에 고향이라는 단어로 나즈막히 노래하고 있을 정도이다. 가슴 뭉클한 사내의 솔직한 속내가 보인다.

숱한 굴곡마다 정치·사회적 환경을 합리화 시켜온 일부 정치꾼과 이중적 지식인들과 대조적이다. 그이에게도 굴곡의 시대만큼이나 힘든 여정이 있었다. 잘 나가던 젊은 시인이었
지만 돈이 안되던 시절이었다. 출판사의 열악한 근무조건과 저임금에 시달리던 그이는 어느 날 <한국일보>에 기자모집 사고(社告)를 보고 출판사에서 남모르게 시험공부를 했고, 69년 봄 이 신문사에 입사한 이후 <일간스포츠> 부국장대우 문화부장에 이르기까지 근 30여 년을 근무했다.

5월 광주 때 바로 이 신문사에 있었다. 유신체제를 거부하며 자유실천문인협회(지금의 민족문학작가회의) 창립에 참여하고 문학인 101인 선언에 서명하며 군부에 불려 다녔던 그이였건만, 아니러니컬하게도 편집대장을 들고 계엄사 검열을 받으러 다녔다. "너무 엄청나서 견디기 어려웠던 시절이었죠. 그래서 80년대 초부터 산을 찾았어요. 오랫동안 걷기
산행으로 나를 달랬죠. 암벽에 내 몸을 함부로 굴리기 시작했죠. 몸을 학대할수록 정신이 맑아지는 것을 알았어요."

지리산 등 역사의 능선을 오르내리며 문학적 성과 높여
어쩜 그이는 산행을 통해 신군부에게 빼앗긴 시인의 언어와 기자의 목소리를 애타게 찾아 나서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당시 지식인들의 타는 목마름이었음으로....그렇게 그이는 5월 광주를 넘어 좌우 이데올로기 등 숱한 대립과 상처들로 얼룩진 백두대간을 오르내리면서 민족의 역사적 생채기들을 캐냈다. 그 결정체가 시집 지리산이다. 내가 걷는 백두대간이라는 부제가 붙은 연작시 81편을 묶은 이 시집 속에는 조식·김종식·황현 선생, 서산대사·도선국사, 고정희·정규화 시인, 정순덕·양수아, 이름 없는 소녀전사에 이르는 지리산 빨치산 등 민중의 이야기가 그이의 산행체험과 함께 끈적끈적한 서정의 가락을 퍼 올려 주고 있다.

이 시집은 말 그대로 우리 역사의 편린이요, 시인의 편린이다. 현재 110편까지 연재되고 있는 지리산 연작시는 내년에 대단원의 막을 내릴 예정인데, 이 시집이 베스트셀러로서 소리소문 없이 4판 인쇄를 넘어서고 있다는 것. 지난해 대산문학상 수상작이기도 한 이 시집에 대해 심사위원들은 "지리산에 관해 앞으로 아무도 더 시를 쓸 수 없을 만큼 완벽한 산행시집이라고 격찬했다.

그랬는지도 모른다. 그 해 5월 산으로 도피한 게 아니라, 민중의 전초병으로까지 불렸던 그이가 운명적으로 싸움의 전선을 산악지대로 끌고 갔는지도. 삶의 밑바닥에서 신음하는 백성들 편에서 글을 쓰고, 그이들의 희망 찾기와 길 트기 작업으로 일관해온 시인 이성부.

이쯤에서 그이의 속내를 들어보자. "저는 역사의 격변을 참 많이 겪은 세대죠. 어렸을 적 해방과 분단, 전쟁과 가난, 4·19와 5·16, 5·18, 6·29 등을 몸으로 체험하면서 왔어요. 저는 그래요. 시가 비록 역사를 설득력 있게 담을 수 있는 양식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역사적 체험을 담아야 한다고 줄곧 생각했어요. 그 생각이 이제 제 체질이 된 거죠"

그렇게 역사의 능선을 오르내렸던 이성부 시인. 등단 40년에 환갑을 넘긴 모습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건강한 체력과 의식을 견지하고 있다. 겸허한 몸짓, 변치 않은 순수빛 얼굴이 사람을 끌어 댕긴다. 외손주를 데리고 시장통을 둘러보고 뒷산을 오르는 시인 할아버지, 15년째 예술인·언론인·회사원·자영업자 등이 총망라된 만고산악회를 이끌고 금수강산을 헤집고 다니는 산사람으로서, 스스럼없이 막걸리 잔을 돌리는 넉넉하고 여유로운 시인이다.

그렇게 역사가 공존하는 한 시대의 한복판에서 늘 서민과 함께 호흡해왔다. 어째튼 그렇게 서울의 봄은 왔다. 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 왔다. 민주주의는 싸움도 한판하고 이렇게 이기고 돌아와, 온 산천에 봄꽃들을 찬란하게 불지피고 있는 게 아닌가 말이다.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
어디 뻘밭 구석이거나
썩은 물 웅덩이 같은 데를 기웃거리다가
한눈 좀 팔고, 싸움도 한판 하고,
지쳐 나자빠져 있다가
다급한 사연 들고 달려간 바람이
흔들어 깨우면
눈 비비며 너는 더디게 온다.
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 온다.
너를 보면 눈부셔
일어나 맞이할 수가 없다.
입을 열어 외치지만 소리는 굳어
나는 아무것도 미리 알릴 수가 없다.
가까스로 두 팔을 벌려 껴안아보는
너, 먼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
(봄 전문)

■ 산행 메모
산악인들이 즐겨찾는 북한산행 코스

836.5m 북한산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찾는 산. 등산로가 잘 발달돼 있다. 나른한 봄날 삶의 활력을 충전하기 위해, 산악인들이 즐겨 찾는 산행코스를 소개하고자 한다.
① 북한산성(156번 종점)→대남문→구기동 ② 구기동→원효능선→노적봉→태고사→북한산성
③ 3호선 연신내역→향로봉→암문→구기동 ④ 구기파출소→대남문→칼바위→정릉
⑤ 정릉 매표소→보국문→대동문→북한산장 ⑥ 북악파크호텔→형제봉→사모바위→진관사

■ 이성부 시인은……
1942년 광주 출생, 경희대 국문과 졸업. 62년 <현대문학>에 열차, 6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우리들의 양식이 당선돼 문단에 데뷔. 시집으로 이성부 시집, 우리들의 양식, 백제행, 전야, 빈산 뒤에 두고, 야간열차, 지리산 너를 보내고 등이 있으며, 현대문학상, 한국문학작가상, 대산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한국일보> <일간스포츠> <뿌리깊은 나무><샘이깊은물> 등에서 문화부장·주간 등을 지냈고, 현재 <민족문학 작가회의> 상임 자문위원·<섬문화연구소> 상임고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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