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승용차를 타고 서해안 고속도로를 달린 지 2시간 30분만에 군산항과 마주보고 선 서천시 한산면에 도착했다. 때마침 오일장이 열렸다. 가는 날이
장날인 셈이었는데 빗줄기가 가늘게 내려 그리 많은 사람들은 북적대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시골 아낙들이 내놓은 푸성귀 강아지 옥수수 옷가지 등이
인정만큼 푸짐했다. 농협 앞마당에서는 소머리국밥에 막걸리 사발을 주고받는 농민들의 넉넉한 모습도 보였다. 비 때문에 튀밥 장사 아저씨는 나오지
않았지만 추억 속으로 사라져 가는 대장간 망치소리만은 퍽이나 뜨겁게 들렸다.
쇠붙이를 화덕에서 달구고 다시 두들긴 후 물에 담기는
순간. '치지직∼쉬이익’소리를 내며 자지러지는 순간이야말로 불과 물이 가장 극적으로 만나는 아름다운 조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달구고 달군
쇠를 올려놓은 쇳덩이, 일명 '모루' 위에서는 망치의 두들김에 따라 불꽃이 튀고 얼마 후 호미, 칼, 낫, 도끼, 쇠스랑, 괭이 등이 제 모습을
드러냈다. 대장장이가 흥건히 땀방울 적시면서 단단한 쇠뭉치들을 쥐고 요술 같은 손놀림으로 어그러뜨리고 구부러뜨린 후에 농기구들은 제 이름 값을
한 것이다.
사양산업이지만 대를 이어갈 자랑스런 농경문화 그런데 가만 보니 대장장이의 망치 소리에도 리듬이 있었고 달구어진
쇠붙이의 담금질에도 일정한 두드림의 횟수가 정해져 있었다. 쇠스랑은 8번, 칼과 낫은 5번식으로 말이다. 쇠의 재질과 용도에 따라 대장장이의
숙련된 경험이 이를 순간, 순간마다 판단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충남 서천군 한산면은 한산모시와 전통 소곡주로도 유명한 곳이다. 김창남씨는
이곳에서 전통 대장간 일의 맥을 살리고자 3대째 가업을 이어 받아 37년의 외길을 걷고 있다.
요즈음에야 굳이 대장간을 찾지
않아도 싸고 편리한 농기구를 쉽게 구입할 수 있는 것이 사실이어서 사양화를 걷고 있는 대장간 일이지만 그만은 이 일을 먹고사는 일보다 전통문화를
되살린다는 사명감을 갖고 하고 있다. 그래서 30년 전에 비해 10분의 1로 줄어든 대장간 일감이지만 그는 이 일을 버리지 못하고 있으며
농민들도 그의 정신을 사랑하여 이곳 대장간 농기구를 주로 사용한다고 말했다. 농경문화의 전통을 살리자는 뜻도 있고 대장간 기구가 손에 익숙해진
탓이기도 하단다.
이 대장간에서 만드는 연장은 30여 종류인데, 주로 대장간 기구에 애정을 가진 농부들의 경우는 호미, 낫,
곡괭이 등을 구입하고 이 지역 전통문화 방면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경우는 물통의 쇠고리와 가마니를 만들 때 쓰는 길이 10㎝ 정도의 쇠바늘,
나무껍질을 벗길 때 사용하는 훑이, 작두날, 블록을 만드는 틀의 제작을 주문하는 편이란다.
서천 대장간 메카로의 자부심
이어가 한 때는 대장장이 5명에다가 풀무질하는 일꾼과 배달꾼을 따로 두고 운영했을 정도로 전성기를 구가했던 김창남씨는 장사가 잘된 만큼 늘
이웃을 위해 대장간 문 앞에 막걸리와 돼지고기 등을 차려놓았고 오일장 오가는 사람들은 누구나 그냥 마시고 기분 좋게 춤도 한 판 추면서 즐기게
했다고 한다. 그렇게 인정이 모이고 웃음 띤 술판이 끊이지 않았던 시절에 마을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아성 대장간은 양조장과도 안 바꿀 것이라고
웃곤 했단다. 당시 부여 일대 5개면에 이르기까지 모든 농기구를 공급하는 대장간 메카였던 이곳이었기에 오일장이 다 파한 후에도 주문이 밀려
대장간 망치소리는 끊일 줄 몰랐다는데 이제는 죄다 추억 속으로 묻힌 이야기들이 되어 버렸다.
5명이 넘던 인부도 하나 둘씩 떠나고
화덕의 불꽃을 피우던 인부 대신에 자동풀무가 그 일을 대신하고 배달할 일도 드물어 솔직히 참 쓸쓸하고 허무하다는 생각이 들 때도 많다고
털어놨다. 대장간은 이 곳에서 직접 만들어 파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장간이 없는 마을만 찾아다니는 대장장이도 있었는데 이들을‘떠돌이 대장장이’라
불렀다. 요즈음의 대장간의 생계는 주문 제작에 의존한다고 한다. 철물점과 골동품 등에 납품하는 중간 상인들이 이곳에 들려 주문 제작한 제품을
사간다는 것이다. 이곳 대장간 제품의 특징은 많은 담금질을 하는 탓에 기계로 대량 생산되는 주조품 보다 단단하고 모양이 다양한 것이 특징이란다.
이 때문에 서울과 부산 대구 제주 등 전국에서 소장품으로 간직하기 위해 문양을 새긴 특유의 칼과 도끼 등을 주문하는 편이란다.
30년 전 이곳 한산면 일대에 6곳이나 되던 대장간은 모두 사라지고 지금은 김창남씨만이 유일하게 그 맥을 살리고 있다. 그런 그는
요즈음 고민이 많다고 토로했다. 아들이 4대째 대장간의 맥을 잇겠다고 하는데 벌이도 시원찮고 무형 문화재 같은 무슨 국가 지원책도 있는 것도
아니어서 허락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이라는 것이다. 김창남씨는 이마에 흐르는 굵은 땀을 식히려는 듯 내리는 장마비를 한참 응시하다가 다시
화덕에서 달군 쇠뭉치를 끄집어내어 마치 가슴 속의 한을 삭이듯 두들기기 시작했다.
미니상식/ 대장간 이야기 대장간은 쇠를
달구어 각종 연장을 만드는 곳이다. 옛날 시골 장터나 마을 대장간에서는 무딘 농기구나 연장을 불에 달구어 벼리면서 만들어냈다. 이를 생업으로
삼는 사람을 대장장이라고 부른다. 대장장이는 오랜 숙련으로 담금질로 쇠의 강도나 성질을 조절하는데 쇠는 불에 달구지만 이 불을 뿜어내기 위해서는
풀무가 필요했다. 풀무란 불을 피울 때 바람을 일으키는 기구로서 한자로는 야로(冶爐) 또는 풍상(風箱)이라 불렀다. 풀무는 손으로 돌리는
손풀무와 발로 밟아 바람을 일으키는 발풀무가 있었는데 발풀무가 더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대장간에는 이밖에도 모루·정·메(앞메,
옆메)·집게·대갈마치·숫돌 등이 갖추어져 있다.
대장간이 없는 마을을 찾아 떠돌면서 연장을 벼리는 일을 하는 사람을 '떠돌이
대장장이'이라고 불렀다. 자급자족을 해야 하는 농어촌에서 농기구를 만들고 손보는 대장간 나들이는 필수 코스였다. 서울에도 중구 쌍림동에
'풀무재'가 있었는데 정동-쌍림동-충무로 5가 고개에는 100여 개의 대장간이 늘어서 대장고개(풀무재)라 불렀다. 이를 한자로 야현(冶峴)
표기해 야현동(冶峴洞)이라 부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