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가 있는 풍경 16] 도종환作, ‘담쟁이’
절망을 넘어서는 푸른 생명력의 상징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알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다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도종환, ‘담쟁이’ 전문)
“담쟁이처럼 살라”는 말이 있다. 담쟁이처럼 벽 앞에서 절망하지 말고, 일순간의 대박에 취해 살지 말고 한 계단 한 계단씩 올라가라는 말이다. 씨 뿌리는 대로 거둘지어니,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도울지어니 성급하지 말고 스스로 길을 만들어 무소의 뿔처럼 가라는 것이다.
이런 삶의 방식을 마케팅 심리학에서 ‘넝쿨 심리기술’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담쟁이 넝쿨은 90도로 경사진 벽을 오르면서 서로 잎사귀에 의지해 줄을 대고 서로 이끌면서 담벼락을 기어오른다. 암벽등반 하듯 앞서 오른 잎이 뒤따라 올라오는 잎에게 동아줄 같은 줄기를 내밀면서 오른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동행인가?
“물 한 방울 없고 씨알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절망의 벽” 앞에서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뒤로 나자빠질 것만 같은 직각의 담벼락를 일제히 포복하면서 천천히, 찬찬히 영차, 영~차를 외치며 오른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마치 개미군단이 두터운 흙무더기를 파고 들어가듯이 사람 손과 발길 닿지 않는 그 허공을 가로질러 마침내, 끝끝내, 그 담벼락을 넘어서고 만다.
그런 담쟁이의 일생은 시골 초가지붕 시절에도 노오란 흙돌담을 기어 올라갔고, 세월이 지나서도 어느 바닷가 펜션 창 밖에서 뻗어 오르고 있었다. 장충동 명동 어느 예배당 붉은 흙벽돌에서도 푸른 덩굴손 당당히 흔들며 그들만의 생명력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박상건(시인. 계간 섬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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