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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변항에 아침이 밝았다. 오징어배가 통통거리는 포구에서 가장 먼저 맞는 것은 갈매기 떼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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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박상건 |
| 새해 아침은 불을 껐다 다시 켜듯이 그렇게 떨리는 가슴으로 오십시오
답답하고 화나고 두렵고 또 얼마나 허전하고 가난했습니까? 그 위에 하얀 눈을 내리게 하십시오 지난밤 제야의 종소리에 묻어둔 꿈도 아직 소원을 말해서는 아니 됩니다
외로웠습니까? 그 위에 하얀 눈을 내리게 하십시오 억울했습니까? 그 위에 하얀 눈을 내리게 하십시오 슬펐습니까? 그 위에 하얀 눈을 내리게 하십시오 얼마나 하고 싶은 일들이 많았습니까? 그 위에 우레와 같은 눈을 내리게 하십시오 그 위에 침묵과 같은 눈을 내리게 하십시오
낡은 수첩을 새 수첩으로 갈며 떨리는 손으로 잊어야 할 슬픈 이름을 두 줄로 금긋듯 그렇게 당신은 아픈 추억을 지우십시오
새해 아침은 찬란한 태양을 왕관처럼 쓰고 끓어오르는 핏덩이를 쏟아놓으십시오
새해 아침은 첫날밤 시집온 신부가 아침나절에는 저 혼자서도 말문이 터져 콧노래를 부르듯 그렇게 떨리는 가슴으로 오십시오.
-(송수권, ‘새해 아침’ 전문)
그렇게 아픈 추억들을 묻고 새해가 왔다. 아픈 상처에 붕대 감듯이 나무에도 돌멩이에도, 긴 여정을 걸어온 어머니의 신발에도, 우리 모두가 잠든 지붕 위에도 눈발이 뒤덮는다. 기운 한해와 새해 한해가 단절된 것은 아니다. 잠시 ‘불을 껐다가 켜듯이/그렇게 떨리는 가슴’으로 지난 한해 다한 쌓은 추억과 희망을 다시 찾아 가는 것이다.
인생 트랙에서 다시 받은 365일. 정해진 시간에 ‘나만의 희망’을 향해 바통 터치를 한다. 어떤 이는 꽃밭을 만들 것이고, 어떤 이는 빛나는 생목 한 그루만 심을 것이다. 365일 후에는 전적으로 새해 설계도에 따라 기쁨의 눈발과 아픈 추억의 눈발을 맞을 것이다.
시인은 어느 방송사에서 청탁한 ‘새해 아침, 신년시’로 이 작품을 썼다. 당시 고등학생이던 필자에게 이를 건네며 고칠 곳이 있으면 고쳐보라 했다. 겁도 없이 “둥둥 북소리를 울리며...”라고 고쳤다. 소년은 새해 아침은 씩씩하고 찬란하게 오는 것이라고 믿었던 것.
삶의 완숙기에 접어들어서야 노 시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겠다. 새해는 세밑처럼 흥청망청 출렁이며 맞는 것이 아니라 “첫날밤 시집온 신부”처럼 “그렇게 떨리는 가슴으로 오십시오”라고 마침표를 꾹, 눌러 찍은 것이다. 진지하게 새해를 맞자. 올 연말에는 “눈길에 함부로 발자국 남기지 말라”는 서산대사의 화두와 같이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아보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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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건 기자는 91년 <민족과 지역>을 통해 등단한 시인이고, <계간 섬> 발행인, 서울여대 겸임교수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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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1/03 오전 11: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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