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가 있는 풍경 14] 김현승作, ‘가을의 기도’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 (‘가을의 기도’ 전문)
낙엽이 지니 마음이 휑하다. 봄이 왔는가 싶더니 그 푸른 잎들이 누렇고 푸석푸석한 얼굴로 지난날 영화를 그리고 있다. 꿈도 많고 탈도 많은 여름날을 지나 정신없이 달려온 시간이었지만 가을은 겨울 길을 예비하듯 무심히 허공에 낙엽을 뿌리고 있다. 후회할 시간도 없다는 듯 손을 탈탈탈 털어내고, 육신에 낀 실 한 오라기마저 훨훨훨 벗어 버리고 있다.
늘어진 가장의 어깨를 떠올려주는 것은 미화원 아저씨 구부정한 허리 뿐만은 아니다. 빗자루에 쏠리는 마른 나뭇가지와 녹슨 낙엽의 흔적들이다. 구청 청소차가 떠난 자리에 아무 일 없는 것처럼 순환버스가 서고, 차창에 나뭇잎 몇 장 같은 얼굴 달고 뿌연 먼지의 포말을 일으키며 휘어지는 가을 도심.
다시 이 거리에 흰 눈발이 휘날릴 것이지만 시인은 이 가을의 틈새를 기다렸다며 절실한 생명의 소리(모국어)로 채우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역시 가을은 철인(哲人)이 즐기는 계절인 듯 하다.
스스로 채운 고독한 가슴에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해 ‘가을에는/홀로 있게 하소서.’라고 노래한다. 그것이 참사랑이든 희망이듯, 만물은 울어 썩어야 밑거름이 되는 법. 그렇게 숙성돼‘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것이다.
이 가을에 우리 낙엽 한 장 주워 들고 지난 봄날을 뒤돌아보자. 그리운 사람을 호명해보자. 문득 겨울이 당도하기 전 두 손에 모아 소망해 보자. “가을에는/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박상건(시인. 계간 섬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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