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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 딸들이 아버지에게 보내는 글

섬과 문학기행/붓가는대로 쓴 글

by 한방울 2006. 5. 9.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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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여대 언론영상학과 수업시간에 ‘아버지’ 주제 글쓰기

 

 

 

 

 

 


스물 서너 해에 생각하는 아버지와 가족의 의미

한 마리의 새가 자기의 둥지를 좋아하듯이 사람도 저녁 무렵이면 가정을 생각한다. 가정은 행복을 저축하는 곳이다. 선량한 가정생활이 있는 한 어떤 나라도 무너지지 않는다는 말도 가정과 가족의 중요성을 이름이다. 가정은 삶의 안식처요 마음의 보금자리이다.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서울여대 언론영상학과 미디어취재보도 수업 시간에 ‘아버지’라는 주제로 글을 쓰는 시간을 가졌다. 어머니의 마음은 언제나 자식과 같고 어머니의 눈물은 자식의 불평을 씻어낸다고 할 정도로 모성애의 깊고 깊음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지구상에 없다. 오죽하면 러시아 속담에 아버지의 사랑은 무덤까지 이어지고 어머니의 사랑은 영원까지 이어진다고 했을까.


IMF 이후 우리시대 아버지는 가장으로서 무거운 어깨를 지탱하며 살아가고 있다. 한 가족이면서 그 가장의 역할을 하는 아버지에 대한 위치는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면서도 늘 술에 취해 늦게 들어오거나, 꾸지람을 잘하는 엄한 아버지상 등 사랑의 대상 보다는 완벽함의 대상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 학생들의 글에서도 그런 흔적을 많이 엿볼 수 있었다.


그러나 딸들은 아버지에 대한 글을 쓰는 계기로 다시 한번 무심한 듯 깊게 흐르는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확인했다거나 힘들게 가족을 지켜온 아버지를 헤아리지 못한 자신들을 깨닫고 반성했다는 내용이 많았다. 이제 스물 서 너 해를 맞아 아버지에 대한 그림자를 들어다보게 되었다는 딸들의 고백.


글을 쓰면서 느낀 점을 이렇게 털어놨다. “아버지 건강이 안 좋으셔서 마음이 쓰였는데 늦게나마 아버지에게 감사한 마음을 느껴볼 수 있었네요.^^”, “혼자서 많이 울울었습니다... ^_^;,” “짧은 글에서 아버지에 대한 마음을 다 쓸 수 없고, 아버지의 사랑을 다 헤아릴 수 없는 것이 아쉽지만 아버지를 무지 많이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다시한번 느낄 수 있어 좋았습니다. 부끄럽지만 오늘 아버지께 ‘사랑한다’는 말을 꼭 하고 싶습니다”, “교수님, 왜 하필 아버지라는 주제를 내주셨습니까? 글쓰기가 참 많이 힘들었습니다. 할 말은 많은데 말이 안 나오는 심정 아실런지요... 눈물이 말 대신 앞서 흘러 나왔습니다. 아버지라는 존재도 위대한 데 너무 쉽게 잊고 사는 이름기도 했나 봅니다”


딸에게 뽀뽀 한번 받고 싶다는 아버지

아름드리나무는 뿌리에 기생하는 이끼, 곰팡이, 버섯을 눈감아주고 자기 몸에 구멍을 파놓고 드나드는 다람쥐를 용서하며 아픈 어께에 둥지를 틀고 살아가는 새들에게 너그럽다. 결국엔 몸 전체를 베이고 나서도 쉼터가 필요한 사람을 위해 밑둥을 제공한다. 그런 아름드리나무는 아버지다. 아버지는 아름드리나무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원망하고 미워하고 존재를 부정했던 적도 있었다. 이제 와서 아버지를 용서하고 이해했다면 그것은 오만이고, 사치이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매우 무뚝뚝한 딸이었다. 아버지의 평생의 소원은 나에게 뽀뽀를 받는 것이라고 한다. 나는 애기 때도 아버지한테 뽀뽀를 안했다고 한다. 이제 와서 그 소원을 풀어드리자니 너무 커버린 여대생 딸....민망할 수밖에 없다. 그래도 시집가기 전에는 그 소원을 풀어드려야 하는데 속으로 다짐하는 시간이다.


제삿날에 만나는 아버지

제법 쌀쌀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던 초겨울 어느 날, 아버지의 전화가 걸려왔다. 집 부근 다방으로 나오라는 말에 초등학생 어린 딸은 골목을 뛰어나갔다. 아버지는 예전보다 더 마르셨고 더 초라해 보였다. 푹 꺼진 볼로 다방의 어두운 그림자가 스며들고 계절에 맞지 않는 얇은 양복이 숙인 어깨를 더 두드러져 보이게 했다.


아버지는 비닐봉투에 담긴 약을 주시며 엄마에게 전해주라고 하셨다. 어린 딸이 내 것은 없냐며 떼를 쓰는데도 아버지는 그냥 웃으며 내 앞 탁자에 놓인 야쿠르트에 빨대를 꽂아주시며 마시라고 했다. 공부 열심히 하고, 엄마 말 잘 듣고, 그 말만 되풀이 하시는 걸 모르고 야쿠르트만 쪽쪽 빨고 있었다. 집에 들어가는 것만 보고 가시겠다고 하시는 아버지의 차가운 손을 오랜만에 잡고서 초등학교 앞을 지났다. “아빠, 나도 내년에 6학년이야” 교정 안으로 텅 빈 운동장을 가리키며 나는 쉬지 않고 조잘거렸다.

  

그게 마지막으로 기억한 아버지의 얼굴이다. 아버지는 일년 동안 밤이 제일 길다는 동지에 돌아가셨다. 아버지의 고향 대구에서 시신을 수습하고 화장했다. 아버지는 엄마를 따라 서울로 오지 못하고 대구 어느 공원 납골당에 계신다. 나는 이상하게도 드라마에 나온 딸들처럼 울지 못했다. 사업 실패로 식구들에게 걱정만 안겨주었기 때문일까. 장례식도 제대로 못치른 탓일까. 나는 그저 아버지가 지난 번 처럼 나를 집 앞 다방으로 나오라고 할 것만 같았다.


이제는 스물 넷으로 훌쩍 커버린 딸. 이 딸이 어른으로 자라나는 모습을 보지 못한 채 떠나야 했던 아버지의 슬픔을, 그해 겨울 마지막으로 나를 보러 와준 아버지의 사랑으로 당신의 큰 손을 깍 잡아 본다. “아버지, 올해 동지에도 팥죽 드시러 오세요.”당신은 결코 우리 가족의 이방인이 나입니다.

 

당신이 그리던 대학생이 되었는데, 어디에 계십니까?

아버지. 

왠지 나에게는 너무도 낯설게만 느껴지는 단어입니다. 10여 년 동안 나는 아버지라는 말을 입에 담아 본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낯설게 느껴질 수밖에요. 가끔 거리에 정답게 부녀가 팔짱을 끼고 다니거나 손을 잡고 다니는 모습을 발견하면 한참동안 그 자리에서 지켜보곤 했습니다. 그리고 눈시울을 붉히곤 했습니다. 제 나이도 잊은 채 말입니다.


아직도 잊지 못합니다. 마지막 당신의 말씀을. 대학가는 모습까지는 꼭 봐야 한다는 그 말을 가슴깊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때의 내 태도와 말투도 기억합니다. “에~잇! 그걸 말이라고 해? 당연히 보게 되지. 별 걱정을 다하네.”라는. 그리고 이불속에 내 몸을 파묻고는 숨죽여 울었다는 사실을. 아마 당신은 나의 울음소리를 듣지는 못했겠지만 알고 있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리운 아버지, 아버지가 기다리던 그 어엿한 대학생이 되어있는데 지금은 어디에 계십니까? 당신께 좀 더 당당하고 멋진 막내딸이 되고 싶은 마음에 최선을 다해 매일 매일을 열심히 살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당신이 가장 궁금해 할 사람에 대한 안부를 건네 볼까 합니다. 어머니는 너무도 건강하십니다. 그동안 많은 고생을 하셔서 얼굴에 깊은 주름이 생기셨고 곱던 손도 많이 거칠어 지셨지만 여전히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계십니다. 딸과 엄마는 나이가 들면서 친구의 관계가 된다더니 그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때로는 티격태격  싸우면서도 조금 후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서로 웃으며 친구들끼리 그러한 것처럼 수다의 꽃을 피우고 있게 되니 말입니다. 그 웃음 속에도 늘 당신, 내 사랑하는 아버지가 함께 하는 것임을 믿습니다. 아버지, 당신이 많이 그립고 보고 싶습니다.


이제 아버지의 한쪽 팔이 되어 드릴께요

“아버지, 당신과 닮은 사람과 절대 결혼하지 않을 거예요.” 한 번도 내 입으로 부모님께 말해 본적 없지만, 우리 자매는 이렇게 가끔 서로에게 솔직한 고백을 한다.  ‘무뚝뚝한 경상도 남자’, ‘조카들 모두 두려워하는 호랑이 삼촌’, ‘7형제 중 귀여움만 받던 막내’ 이것이 우리 아버지를 수식하는 단어들이다.


아버지의 성격이 매우 급하고 한번 생각하면 움직이지 않는 똥고집장이다. 약주 한잔하시고 들어와 집안을 시끄럽게 하는 날이면 “나는 아빠 같은 사람 절대 안 만날 거야” 라고 다짐하고 했다. 어릴 적 아버지는 무척 엄한 분이었다. 한편으로는 관대하지 않아도 될 주변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친절해 빚까지 짊어지고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런 아버지를 보고 언니에게 “재수 없다”라고 한마디 했다가 초등학생 때 내 엉덩이는 시퍼렇다 못해 검게 물들었고,  울다 지쳐 잠들었을 때 엄마가 약을 발라주던 적이 있다.


30여년을 외팔로 산 까닭에 남들보다 풍족하지 못하게 입히고 먹였다고 미안해하는 아버지. 하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살았다고 자부할 수 있는 나의 아버지. 그런 겸손함이 있기에 그런 당당함이 있기에 나는 오늘 “아버지를 사랑한다”고 당당하게 이 글을 쓴다. 30년간 의수가 아버지의 오른팔이었다면 이제부터는 이 딸이 그 오른팔이 되어드리겠다고 다짐해본다. “아버지, 아버지를 조금이라도 닮은 사람을 만나고 싶어요. 사랑해요 아버지.”하고......


어머니의 빈자리까지 메운 아버지

아버지라는 이름 앞에서 한없이 머리를 숙인다. 세월이 흐른 만큼 작아지는 사람이고 나의 키가 한 뼘씩 자랄 때 마다 두 뼘 씩 작아지는 사람이 아버지이다. 초등학생일 때 아버지는 엄하신 분이었다. 그러면서 비오는 날 우산을 가지고 오는 분이었다.


고등학생 때 아버지는 어머니의 역할까지 함께 하는 분이었다. 어머니와 이별을 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일찍이 어머니가 되었다. 그때부터 나도 어리지만 않은 청소년기를 보냈다. 아버지는 사업을 하셨고 집 안 일을 도맡았다. 아버지는 로봇 태권브이였다. 언제 어디서나 출동하시는 분이셨으니까.


20대 중반을 넘어선 대학생 딸로서 아버지를 돌아보면 이제 한 없이 작은 분이라는 사실이다. 동아리 활동하면서 호프 마시는 동안, 또 취업한다고 정신없이 달려오는 동안 한 치씩 두 치씩 작아지시는 아버지를 잊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아버지는 여전히 무뚝뚝하다. 그런데 가끔 휴대폰에 문자 메시지가 뜬다. ‘사랑한다. 내 딸아’, ‘네가 사준 잠바 덕에 하나도 안 춥다. 든든하다.’ ‘아빠가 너희 뒷받침도 잘못하고 미안하다.’ 이렇게 아버지는 작아지고 있다.…아버지는 내게 어머니였고, 아버지였고, 친구였는데... 그 길은 멀리 있지 않다고 생각했다. 지금 아버지 뵈러 집으로 가야겠다.


기러기 아빠

따르릉... 전화벨이 울렸다. 일본에서 아빠가 걸어온 국제전화다.

“진경아. 공부 열심히 하고 엄마한테 맛있는 거 해달라고 해. 아빠한테 편지 좀 쓰고...언니와는 가끔 편지를 주고받아 언니의 속마음을 알 수 있는데 네 속마음을 통 알 수가 없구나.”

 “시험이 코앞인데 무슨 편지야. 나중에 시간 나면 쓰던지 할게”


그렇게 쌀쌀맞게 전화통화를 했다. 군대 간 남자친구한테는 일주일에 몇 통씩 편지도 보내면서 아빠한테 말이다. 사실 언론을 기러기 아빠 이야기가 나오면 아빠를 떠올리곤 한다. 아빠는 일본에서 귀금속 세공 일을 하신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아무 연고도 없고 우리와 문화도 다른 일본에서 혼자 생활하신다. 일본에 있을 때는 소화도 잘 안 되는데 집에만 오면 맘이 편하고 소화도 잘된다고 했다. 그런 생활이 10년을 넘어서고 있다. 두 딸을 키우면서 드는 돈이 만만치 않아 벌이가 나은 일본을 택한 것이다. 3개월에 한번 꼴로 귀국해 2주 정도 집에서 쉬다가 다시 일본으로 간다.


중학교 3학년 때였다. 갑자기 공항에서 연락이 왔다. 아버지가 이상하니 당장 와보라는 것. 우리 가족은 택시를 타고 공항으로 향했다. 평소의 아빠와 다른 모습이었다. 승무원에 따르면 비행기 안에서 누군가가 자기를 죽이려 따라온다며 겁에 질리는 모습을 보였다는 것. 난생 처음 본 아빠 같지 않은 모습이었다. 듬직하고 강한 그런 모습은 사라지고. 아빠는 어떤 시련이 닥쳐와도 끄떡없는 분이라는 생각이 무너지는 그 순간은 큰 충격이었다.


나중에야 알았다. 외국에서 홀로 오랜 시간 불안정한 생활에서 친구에게 배신을 당한 것이다. 그 이상의 사연은 아직도 모른다. 부모님이 입을 꽉 다물고 있는 탓이다. 그 날 우리 가족은 각자 방으로 돌아가 참으로 많이 울었다. 아빠가 그렇게 힘든 생활을 하고 있는지 나는 처음으로 목격했다.


결국 병원을 다니며 치료를 하던 아빠는 다시 안정을 되찾았고 종로에 귀금속 가게를 냈다. 그러나 다시 IMF가 터졌다. 근 1년 동안 우리 집 수입이 없어지면서 빚만 늘어났다. 집까지 넘어갈 형편이 되자 이민을 고민했다. 그러나 아빠가 반대했다. 아빠만 홀로 일본으로 떠났다. 건강이 안 좋은 상태에서 딸들의 교육을 위해 아빠만이 살얼음판을 걷기로 한 것이다.


그 후 내 스스로 아르바이트하며 그 돈으로 책사고 용돈으로 쓰는 주체적인 대학생활을 하고 있다. 앞으로 졸업하면 아빠는 한국에 오신다. 수입이 많건 좋건 아니 수입이 적어져도 아빠도 이제 아빠의 인생을 즐길 권리가 있는 것이다. 아빠와 여행을 가고 싶다


아빠의 오토바이와 슈퍼 집 딸

나는 아빠의 오토바이가 싫었다. 하루 종일 오토바이를 타시느라 검게 때 묻은 그 얼굴도 싫었고 오토바이 뒤에 있는 아빠 덩치만큼이나 큰 노란색 짐바구니가 너무 창피했다. 다른 친구 아빠들은 고급 승용차에 넥타이를 맨 하얀 얼굴인데 우리아빠는 왜 저런담...이런 생각을 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학교를 오고가며 아빠를 보며 피해 멀리 돌아다녔다.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때면 아빠는 반가워 ‘빵~빵~’거리는데 나는 고개를 돌리곤 했다.


‘저 오토바이는 좀 내다버리지.’ 그런 생각이 이어지던 중 소원이 이루어지는 날이 왔다. 근처 대형마트가 들어서면서 아빠의 오토바이는 혼자 뜀박질을 해댔다. 그때쯤 아빠와 엄마의 다툼(거의 엄마의 잔소리)은 종종 있었고 아빠는 그 자리를 피하기 위해 빈 오토바이를 친구삼아 동네 한 바퀴를 돌고 오셨다. 곧 아빠의 오토바이는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아빠와 엄마의 슈퍼마켓마저도 사라져버렸다.  ‘슈퍼 집 둘째 딸’이란 내 별명이 사라졌다..


많은 시간이 흘렀다. 24살... 가장 친한 친구의 엄마와 아빠가 장사를 시작하셨다. 그리고 친구의 아빠는 배달용 오토바이를 사신 모양이다. 한 동네 살던 나는 종종 친구의 아버지가 오토바이를 타고 한손엔 짐까지 들고 바쁘게 달리는 모양을 봤다. ‘대단하시다~ 존경스러워.’ 그랬다. 그때 아빠의 오토바이보다도 볼품없는 오토바이인데도 이젠 그 모습이 우습지가 않다. 크고 나면 생각이 이렇게 달라진다는 것을 미리 알았더라면 그때 아빠에게 더 다정하게 굴 것을...


새 아버지

교수님이 ‘아버지’라는 주제를 줄 때 솔직히 무엇을 쓸까 한참을 망설였다. 나는 아버지에 대한 추억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많은 시간을 함께 해오지 못한 것도 있지만, 나와 아버지 사이에는 무언가 말할 수 없는 벽이 있었다. 그 아버지가 나에게 관심조차 없는 것처럼 느낄 때가 많았다. 잘했다고 칭찬을 해주시지도 않으셨으며 잘못할 때 꾸지람도 하지 않으셨다. 언제나 무뚝뚝하신 아버지였기에, 사소한 것들은 말할 수 없음은 물론이고, 중대한 것들조차도 늘 엄마와 상의했다.


사실, 지금 아버지는 새아버지이다. 5살 때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어머니께서 재혼을 하셨다. 그러던 어느 날, 핸드폰으로 문자가 왔다. 띄어쓰기도 또박또박한 그 문자. “선영아 정직하게, 예의 바르게 살아가는 너의 모습이 대견스럽구나. 사랑한다!”라는.


아버지의 눈물

내가 그의 이름을 처음 들은 것은 나를 품은 그의 체온이 따뜻했을 때부터이다. 의사가 아들이라고 해서 든든한 아들 녀석을 기대하던 그는 볼이 빨간 팔삭둥이 여자아이 앞에서 한동안 어리둥절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가 내게 주신 생명임으로 나는 힘찬 첫 울음을 울었을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그와의 만남은 25년. 어린 시절 몸이 무척 약해 병원냄새에 대한 기억을 지워낼 수 없다. 특히 초등학교 1학년 때 감기가 너무 심해져 병원에 입원했을 때인데 아픈 나의 손을 꼭 잡고 “너를 위해서 대신 죽어줄 수는 있어도, 대신 아파줄 수는 없구나.”라고 말하던 그러면서 눈물 흘리던 아버지. 나는 그 때 아버지의 눈물을 처음 보았다. 그 따스한 눈물 덕에 스물다섯의 대학생이 되어 있다.


사랑은 아낌없이 주는 것이다.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사랑을 위해 긴 세월 우리네 아버지는 너무 외로운 길을 걸어왔다. 속으로 울고 속으로 삭이면서 한 잔의 소주잔에 자신의 번뇌를 털며 살아왔다. 잠시나나 그런 가장의 어깨, 삶의 통증이 아리는 아버지의 어깨를 두들겨주는 자식이었으면 좋겠다. 자식은 그 부모의 모습을 비추는 거울이라고 하지 않던가. 지금 우리의 모습은 바로 어버이의 모습인 것이다.


사랑 없는 세상은 공허하다. 국가든 사회이든 말이다. 세상 가장자리의 보금자리인 가족, 가족의 정수리격인 아버지의 그 극진한 사랑을 한번쯤 되새김질해보는 5월이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런 사랑의 힘으로 세상이 아름다웠으면 좋겠다. 영국의 수필가이자 비평가인 카알라일은 “불이 빛의 모체가 되듯이 사랑은 언제나 평화의 모체”인 것을.

 

박상건(시인. 계간 섬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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