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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을 찾아서⑪ 아이들의 등불 도종환

섬과 문학기행/시인을 찾아서

by 한방울 2004. 3. 15. 0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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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을 찾아서⑪ 아이들의 등불 도종환 

 

*폭설 내리던 날 청주의 접시꽃 당신을 만나러 가는 길

도종환 시인을 만나러 가는 날, 세상 천지는 백설로 눈부셨다. 새해 첫 폭설이었다. 차창 밖으로 휘날리는 눈발만큼 청주로 가는 내내 가슴 설렜다. 엉금 엉금 기어가는 고속버스가 야속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초면인 그이를 만나러 가는 길에 내리는 눈발이 괜스레 좋은 느낌으로 가슴 적셨다. 그렇게 눈발이 내린 그 자리에 접시꽃이 피고 지는 느낌 같은 것이었다. 가로수 터널 지날 무렵 모든 나무가 눈꽃 흔들어대고 있었다.

폭설에 갇힌 한 호텔 커피숍에서 마음씨 좋은 장형 같은 이미지를 풍긴 그이를 만났다. 감기몸살 중인 털목도리를 하고 있었다. 오늘 촬영은 꽤 힘들겠다는 생각이 스쳤지만 그이는 의외로 따뜻한 배려로 인터뷰와 촬영으로 적극적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자택으로 갔다. 책 가득한 집필실은 참
아담했다. 넝쿨식물의 잎이 거실과 집필실을 이어지는 벽면으로 예쁘게 타오르고 있었다. 그이는 꽃나무에 물을 주는 일로 아침을 열 정도로 꽃과 나무를 좋아한다. 먼지 묻은 잎을 씻으면 다시 진초록으로 살아나는 생명의 신비 앞에서 일상의 피곤함을 털어 내곤 한단다. 이런 꽃나무에 피는 꽃을 꿈의 부스러기라고 불렀다.

푸르게 푸르게 집필 공간을 채워주는 저 넝쿨식물의 잎 끝이 응시하고 있는 서재로 발길을 돌렸다. 손 때 묻은 책표지에서 그이가 살아온 날들의 체취를 간접적으로 맡을 수 있었다. 그이를 대변하듯 스쳐 지나는 도서명들...
안중근, 함석헌, 우리 역사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자본주의와 학교교육, 사랑의 학교, 통일을 여는 국어교육, 사랑의 교육 희망의 교육, 실천교육, 민족예술, 해방공간의 문학, 조선의 민속놀이, 전통시대의 민중운동, 교육 대개혁, 참교육의 함성..... 그이가 걸어온 날들에 대한 함의어들인 셈이다.

그이는 그랬다. 젊은 날 함석헌 선생의 진보적인 사상과 철학에 빠졌고 자본주의와 학교교육, 해방공간의 문학과 참교육의 함성 속에 때로는 방황하고 외롭고 힘겹게 젊은 날을 헤쳐 왔다. 이런 공간에서 성장한 그이는 실천하는 지식인으로 한편으로는 외롭고 쓸쓸한 날들을 서민의 가슴으로 노래해온 시인으로 우리에게 다가섰다. 도종환 시인의 시가 독자의 감성을 자극하는 것은 서민의 진솔한 이야기가 한을 버무려 배설하는 데 있다.

그 한이 허우적대다 나자빠지지 않고 다시 우듬지 끝 푸른 희망의 새순으로 움트고 허공을 내젓거나 강물처럼 출렁 출렁 흘러가는 가락이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소월이나 영랑의 가락을 지녔으면서도 고은이나 신경림의 끈끈한 한과 남성적인 극복의지가 철철 넘쳐흐르는 게 작품의 특징을
보이고 있다.

자작나무처럼 나도 추운 데서 자랐다
자작나무처럼 나도 맑지만 창백한 모습이었다
자작나무처럼 나도 꽃은 제대로 피우지 못하면서
꿈의 키만 높게 키웠다
내가 자라던 곳에는 어려서부터 바람이 차게 불고
나이 들어서도 눈보라 심했다
그러나 눈보라 북서풍 아니었다면
곧고 맑은 나무로 자라지 못했을 것이다
단단하면서도 유연한 몸짓 지니지 못했을 것이다
외롭고 깊은 곳에 살면서도
혼자 있을 때 보다 숲이 되어 있을 때
더 아름다운 나무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자작나무 전문)

눈보라치던 시베리아 벌판 자작나무숲을 본 적이 있다. 러시아의 상징인 이 나무를 바라보면 인고의 세월이 겹겹으로 묻어 있다. 어쩜 자작나무는 도종환 시인의 쓰디쓴 자화상인지
도 모른다. 그이의 시에는 유달리 나무가 많이 나온다. 그이는 나무를 통해 봄이 오고 바람이 불고 세월이 흐르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늘 마음이 편해지곤 했단다. 해직의 고통의 터널을 지날 때도 다치고 상처받은 마음을 위로해 주던 그 보이지 않은 힘이 나무였다.

그런 나무를 찾아 그이가 다녔던 충북대 캠퍼스 숲으로 발길을 돌렸다.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벌린 그이에게로 낙엽 한 장이 뚝, 졌다. 그이는 말했다. "설령 잎 지고 열매마저 다 잃고 난 뒤에 빈 가지만으로 겨울바람을 맞고 서 있어도 나무는 소중한 것이죠. 무성한 날들도 열매를 맺으러 고통스럽던 날들도 그 열매를 지키기 위해 견뎌 온 날들도 나무에게 진정 소중한 날들이에요". 나무 예찬론을 펴며 두 팔을 벌린 그에게로 눈발은 정겹게 다가가 껴 안겼다.

하염없이 허공의 계단을 즈려 밟고 내려온 눈발을 맞는 겨울 숲에 바람들, 그것이 이 시처럼 눈보라치던 북서풍은 아니더라도 외로운 삶 깊게 속울음 울며 온 그이의 길을 파노라마처럼 되돌려 주기엔 충분했다.

*지긋지긋하게 따라다닌 '그 시절, 그 가난'이야말로 문학적 자산br>
도종환 시인은 정말 외롭고 추운 날들을 보내며 성장했다. 그이는 청주 무심천 서쪽 운천동 산직말에서 태어났다. 가난한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 작은 동네였다. 학교는 반대편에 있어 늘 무심하게 흘러가는 이 강을 가로지르며 성장했다. 어릴 때는 그림에 더 소질이 있어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는 줄곧 미술반에서 활동 했다. 무심천 둑길에 앉아 그림을 그리곤 했는데 중학교 때부터 연하장을 이녁 손으로 만들었고, 문화원 화랑 전시회에서 중학생인 그이 작품이 가장 비싼 값에 팔려나갔을 정도로 그림 솜씨가 있었다.

대학 진학 때 찢어진 가난 때문에 미술과를 지원하지 못하고 학비가 덜 드는 국어교육과에 응시했다. 당시 사범대 국어교육과는 수업료가 면제됐다. 그러나 기성회비 삼만 육 천 원을 낼 형편도 못되어 친척들이 오 천 원씩 거둬 주어 꾸역꾸역 학교를 다녔다. 어째튼 강둑은 그이의 성장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곳이다. 자전거로 사, 오십 분 달려 통학하던 강원도 고교 시절에도 강둑을 달려 등, 하교했으니 강둑과의 인연은 깊은 셈이다. 손과 귀가 떨어져 나갈 것 같은 겨울바람 속에서 강둑에 자전거를 세워 놓고 주린 배를 쥐어짜며 펑펑 운 적도 있다. 떠돌며 살던 아버지를 찾아 어머니는 길 떠나고 혼자 객지에서 생활하던 집에 쌀통이 바닥난 지는 오래 전의 일이었다. 굶고 학교엘 가서 밤늦게 돌아오던 그 날은 너무나 슬펐다.

이런 생활이 이미 중학교 때부터 이어져 와 처음 있는 일은 아니지만 그날만은 지독한 가난 앞에 무릎 꿇고 울어버린 것이다. 참고서 살 돈이 없고 소풍이나 수학여행 등 돈 들어
가는 일은 모두 포기하며 학교를 다녀야 했던 시절이었다. 대신 수업이 끝나기 무섭게 도서관에서 닥치는 대로 책을 읽으며 스스로 삶을 반전시키려 했던 기억은 생각할수록 소중한 일이었다. 남모르게 눈물 흘리며 보낸 그런 시절이 지금 생각하면 시인의 길에 탄탄하게 들어서게 하는 밑거름이었지 않나 싶다.

대학시절에도 가난의 그림자는 길게 이어졌다. 식구들은 월세 2천원짜리 단칸방에서 살았다. 그이의 자리는 단칸 방 위쪽을 장지문으로 나눈 윗목에 있었는데 연탄 화덕은 하나였음으로 윗목까지 그 훈기가 미칠 리 만무했다. 차가운 방에서 이불을 덮으면 이불이 사람의 체온 덕을 보았을 정도이다. 아버지는 가난 때문에 취업을 하거나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하기를 바랐었다.

그러나 문학과 철학 서적을 손에서 뗄 수 없었다. 무심천 옆 술집에서 도스토예프스키와 카프카, 사르트르를 이야기하며 밤새워 문학과 철학 논쟁을 하며 술집 문이 닫히면 다시 둑길로 장소를 옮겨 깡소주를 까며 가난 같은 어둠을 털며 다름 날 아침을 맞곤 했다. 무심천은 그이에게 그렇게 치렁치렁 매달린 가난과 젊은 날 실존주의와 로맨티스트의 상징이었다. 어둡고 힘들던 문학청년 시절에 내던진 절망과 열망들의 흔적을 눈발로 뒤덮은 채 무심하게 흘러가는 저 무심천.

그이는 무심천이라는 시를 이렇게 썼다. "흐르고 흘러
물의 끝에서/문득 노을이 앞을 막아서는 저물 무렵/그토록 괴로워하던 것의 실체를 꺼내/물한 자락에 씻어 헹구어 볼 수 있다면….//어찌하여 이 물이 그토록 오랜 세월/무심히 흘러오고 흘러갔는지 알게 될지니/아무것에도 걸림이 없는 마음을 무심이라 하나니".

그 아픔의 강을 노래하면서 세상 살며 버리기 힘든 욕심이나 집착의 끈 떨치고 버린 가슴으로 다 비워 고요히 깊어지는 마음으로 무심하게 흘러가잔다. 이것이 그이 시의 생명력이다. 그런 튼실한 시어들은 온전한 정신에서만 가능하다.

이제는 먹고 살만한 환경이지만 그 시절 그 가난이 문학의 자산이었음을 깨닫는다. 그래서 지금 이녁을 일으켜 세운 문학에 감사한다. 소주병을 가방에 넣고 다니던 대학시절. 페시미스트로 살아온 날들에게도 거듭 감사한다.

* 가난과 절망에 만난 헌 책방, 광주항쟁 그리고 아무렇게나 살지 않겠다는 오기

그이의 문학 공간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 헌 책방이다. 대학시절 교재는 모두 헌 책방에서 구입했다. 새 책을 사지 않으면 점수를 주지 않는다는 교수도 있었지만 가난은 그 학점
의 벽을 넘지는 못했다. 학점을 포기하면서까지 발길 잡아 주던 헌 책방은 그이의 삶의 생명선이자 탈출구였다. 당시 삼 백원, 오 백원짜리 카뮈의 사상과 문학, 사르트르의 사상과 문학, 실존주의 철학 서적, 일본 작가 무샤고오지 샤네아쓰의 인생론, 야스퍼스의 비극론, 해방 공간에서 좌우익 작가의 작품을 망라한 조선단편문학선집, 최현배 선생의 한글의 투쟁, 김동인의 춘원 연구, 김동석 평론집 예술과 생활 등은 모두 헌 책방에서 구입해 밤새워 읽은 것들이다.

이 가운데 김동석 평론집은 그이를 야릇한 흥분 속으로 끌고 갔던 책이었다. 이 책은 조금 비싼 천 원짜리였는데 당시 임화, 정지용, 오장환 등 낯선 이름들에 대한 작가론이 실려 있었던 것. 그런데 저자는 이 분들을 거침없이 김군 이군 하는 호칭을 써가며 대담하게 평가하고 있는 게 아닌가. 나중에 알고 보니 김동석은 월북 평론가로서 이 책을 구입한 자체가 위험한 일이었다. 또한 헌 책이라는 게 찾는 이를 늘 만족시켜주는 것만 아니지 않던가. 누군가가 팔아야 구입하는 사람 손에 들어가게 되었으니 말이다. 수업은 들어야 하는데 교재를 구입하지 못한 청년 도종환의 마음은 오죽했으랴.

그이는 광주항쟁 시절에 군 생활을 했다. 80년 5월, 사격명령이란 전언통신문이 암호로 날라왔고 그이는 차출돼 광주로 가는 여수순천간 17번 국도의 고갯마루로 실려 갔다. 시민들을 진짜로 쏴야 하나....밤새 고민을 하다 탄창 맨 위의 총알을 거꾸로 장전해 넣고 그 처절한 밤을 견디었던 그 기억. 몇 해 전 그 끔찍한 광주를 떠올려주었던 영화 박하사탕을 보고 나오며 펑펑 운 적도 있다. 그렇게 제대를 하고 돌아온 집안의 분위기는 크게 변해 있지 않았다.

도시빈민으로 떠돌던 아버지는 소작농이 되어 있었다. 그도 문학적 열정이 변하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아버지가 농약통을 짊어지고 나가거나, 돼지를 키우느라 이 집 저 집
음식점 잔반통에 남은 찌꺼기를 걷어 자전거 페달을 밟는 동안 그이는 멘델스존의 교향악을 들으며 번민의 시간에 매달려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신경림 시인의 시집 농무에 실린 산읍일지라는 시를 접했다. "아무렇게나 살아갈 것인가/눈오는 밤에 나는/잠이 오지 않았다(중략)…먼 마을의 개 짖는 소리만 들을 것인가/눈오는 밤에 가난한 우리의/친구들이 미치
고 다시/미쳐서 죽을 때/철로 위를 굴러가는 기찻소리만/들은 것인가 아무렇게나/살아갈 것인가 이 산읍에서." 이 시에 나오는 "아무렇게나 살아갈 것인가"라는 반문은 낭만주의에 빠져 있던 그이의 뇌리를 강하게 요동치게 하기에 충분했다.

훗날 절망과 정신적 방황의 길목마다 이 문장이 뻘떡 일어나 그이의 생각에 바람 불고 물결치는 느낌이었다. 이녁 삶을 반추하게 하며 문학의 주된 관심사 가운데 하나로 자리잡은 화두, 아무렇게나 살 것인가?. 그 때 그이는 문학적 오기도 끝내 갑 속에 든 칼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했다. 시심의 낫날만 벼릴 게 아니라 그 연장으로 곡식을 거두고 삶의 텃밭을 일궈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이는 생전 해 보지 않았던 농사일을 거들기 시작했다. 벼를 일으켜 세우며 살을 베고 다리를 휘청거리며 볏가마니를 짊어졌고 외양간도 치우고 인분리어카를 끌고 마을 한복판을 가로질러 밭으로 오고 갔다.

*강한 직선이 아니라 부드러운 직선으로 살아가고 싶다

그러던 어느날 그이는 그 동안 써온 작품의 초고들을 불살라버렸다. 어머니께서는 마당에 불타는 원고뭉치를 끄더니 뒤안으로 가져가는 것이 아닌가. 알고 보니 어머니는 뒷마당에 있는 화덕 불쏘시개로 요긴하게 쓰기 위해서였다. 그이의 원고는 그렇게 식구들이 먹을 저녁 죽을 끓이던 솥의 밑불이 되었다. 대학시절 머리 싸매며 대들었던 아픔들이 붉게 타오르다가 한줌 재로 잠드는 그날 밤에 그이는 정녕 잠 못 드는 밤이었을 것이다. 문학이란 무엇인가? 문학을 왜 하는가? 삶이란 무엇인가? 아무렇게나 살아갈 것인가? 이 산읍에서...끝없이 허공에 질문을 던져 놓고 해답 없이 절망하고 다시 그 절망을 던지며 까만 밤을 건넜을 것이다. 그렇게 새벽은 아스라이 희망처럼 실낱으로 밝아오고 아침은 다시 일상 속으로 사라졌을 것이다. 문학이란 결국 그런 삶 자체이고 삶은 결국 우리 일상의 편린 같은 부스러기 일터니까.

그런 대학 시절을 마감하고 등록금을 면제받은 대가로 의무적으로 교직에 나가 받은 첫 월급은 20여 만원이었다. 보은에서 한 시간, 오구니재 열 네 구비를 넘어 산골 고등학교에서 첫 교사 생활을 했다. 발령장을 받고 부대끼는 완행 버스 안에서 이불보따리를 끌어안고 앞으로 내 사는 길이 이와 같구나 생각했다. 헝클어진 생각들이 굽은 산모롱이
길처럼 펼쳐졌다. 시인으로서 정체성과 교사의 정체성이 제대로 서 있지 못 한 채 일고여덟 시간의 수업에 시달린 후에는 늘 축 늘어진 육신뿐이었다. 그럴수록 갈등은 높아 갔다. 꽃 한 송이 제대로 바라볼 여유가 없었던 시절이었다.

"한번은 수업 시간 교과서에 나오지도 않는 박두진의 시 바다의 영가를 읽어 주다 거기 나오는 바다가 죽으면 가슴도 죽는다....라는 구절에 그만 목이 메어 울고 말았어요. 아이들은 영문을 몰라 하는데 나는 눈물을 닦고 서 있느라 수업을 하지 못했죠"

그러던 어느 날 어둠의 적막이 운동장에 스멀스멀 기어들고 있을 때 빈 교무실에서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를 접하게 되었다. "직업이란 매우 어렵고 까다로운 것이다. 직업에는 인습에 짓눌려 개인적인 견해는 발붙일 여지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신의 고독은 그런 속에서도 당신에게는 의지와 고향이 될 것이며 그 고독으로 해서 당신은 자신의 길을 발견할 것이다....생명이 있는 모든 것은 어려운 것이다"라는.... 그날 밤 릴케와의 만남은 시가 필요한 곳, 철학과 진실을 심을 수 있는 곳이 어딘가를 생각해 보게 하였다. 그날 그이는 일기장에 "서두르지 말자, 서두르지 말자"라고 썼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그날 이후 가능한 삶의 오솔길 천천히 걸으며 그 걷는 법을 온몸으로 체득하며 왔다. 지붕을 성글게 엮어 놓으면 빗물이 새어 드는 법, 그래서 순간 순간 가능한 촘촘히 시간을 엮어 가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온전함이라는 것은 늘 불안전한 장애물을 넘어가는 길이다. 그래서 정도는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다. 그 길 위에 고통이 있고 외롭고 쓸쓸한 날들이 널려 있다.

어쩜 그 길이 그의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그이는 그 길을 부드러운 직선이라 불렀다. "한 생애를 곧게 산 나무의 직선이 모여/가장 부드러운 자태로 앉아 있는..."
쪽빛 하늘 아래 추녀, 뒷산 능선의 부드러운 선, 유려한 곡선의 집 한 채, 뒷산 품에 들어 있는 절집 추녀가 휘어진 나무로 지어져 있음에 주목했다. 그것이 그이의 가치관이며 시의 근본이었다. 그래서 한 생애도 곧은 나무의 직선이 모여 가장 부드러운 자태로 앉아 있다고 노래한다.

욕심 없이 흙바람에 시달리고 견디면서 꽃을 피워내는 나무처럼 그이는 그런 올곧은 길 위에서 믿음직한 나무 인생을 살기로 했다. 자연을 사람처럼 사람을 나무처럼 바라 보고 생각하면서 자연과 삶을 일치시키는 인생 길을 가고 싶은 것이다. 자연에 대한 사랑이란 겸허한 사랑이다. 그런 사랑이 삶의 향기일 때 세상은 아름다운 것이다. 그런 세상을 갈
구하는 정신이며 넓은 가슴일 때에야 나무처럼 부드러운 직선으로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것. 그것이 휘어지지 않는 삶이며 정신일 터.

*기구한 운명의 가족사, 이별도 슬픔도 아픔도 순수한 사랑의 노래로 반전

접시꽃 당신이라는 시집이 독자의 감동을 유발하며 진정한 사랑의 향기가 무엇인지를 되새김질시키며 가슴마다 아름답게 피어나는 까닭은 서민의 정서와 올곧은 생명사상이 조화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86년 이후 지금까지 스테디셀러로 자리잡은 접시꽃 당신에 실린 시어들이며 고두미 마을에서,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지금 비록 너희 곁을 떠나지만, 당신은 누구십니까, 사람의 마을에 꽃이 진다 등 다른 시집들에서도 이런 시인의 진솔하고 따뜻한 정서를 읽어 낼 수 있다.

이별도 슬픔도 아픔도 빛나는 순수로 다가와 절창 할 수 있는 데는 시인의 자연주의적 시선과 가슴 탓이다. 그것이 시의 모티브이기 때문이다. 강한 직선이 아니라 부드러운 직선, 휘어지는 나약함이 아니라 함께 조화를 이루는 곡선주의 근저에는 시골스럽고 민족정서인 한을 깔고 있는 시인의 심성이 자라잡고 있다. 끈적끈적한 한의 강물이 남성적이고 적극적인 의지로 승화되면서 국민 시인으로 자리매김하게 한 것이다.

"살아 평생 당신께 옷 한 벌 못해주고/당신 죽어 처음으로 베옷 한 벌 해 입혔네/당신 손수 베틀로 짠 옷가지 몇 벌 이웃께 나눠주고/옥수수밭 옆에 당신을 묻고 돌아오네". 가난한 교사의 아내를 묻은 후 그이는 다시 가슴에 그 사랑을 두 번 묻는다. 그 절절한 사랑은 혼자 걷는 길 위에 내리는 빗줄기로 교감하며 당신을 향해 젖어 가는 것이 나의 길이라는 생각에 미친다. 그리고 이내 모든 생각과 움직임마저 아내 사랑 안에 갇히고 만다.

"당신의 무덤가에 패랭이꽃 두고 오면/당신은 구름으로 시루봉 넘어 날 따라오고/당신의 무덤 앞에 소지 한 장 올리고 오면/당신은 초저녁별을 들고 내 뒤를 따라오고/당신의 무덤가에 노래 한줄 남기고 오면/당신은 풀벌레 울음으로 문간까지 따라오고/당신의 무덤 위에 눈물 한 올 던지고 오면/당신은 빗줄기 되어 속살에 젖어오네."(당신의 무덤가에 전문)

아내와의 이별도 이별이지만 가족사가 참 기구했다. 그이의 어머니는 어릴 때 어머니를 여의었다. 그리고 실명한 아버지의 팔을 잡고 길을 오고가는 길잡이 역할을 했다. 외할머니를 일찍 여읜 외할아버지는 늘 퉁소를 불며 아픔을 달랬다. 어머니는 시집 와서도 시할아버지가 실명하면서 시아버지 이발이며 식사 때마다 숟갈에 반찬도 올려 드렸던 효부상 수상자이기도 하다. 그런 가족사를 거느린 그이가 교단을 떠나게 된 것 마저 정해진 운명이었을까.

10년을 길거리 교사 생활....(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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