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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탐방-유안진

섬과 문학기행/시인을 찾아서

by 한방울 2004. 3. 25. 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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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을 찾아서⑫ 쓰디쓴 인생살이를 아름다운 시로 승화시킨 시인 유안진

"이제 교수직 떠나 오로지 시만 쓰고 싶습니다" 

다작가로 일컬어지는 유안진 교수. 그가 변신을 꿈꾸고 있다. 시인, 수필가, 베스트셀러 작가에서 이제는 교수직도 털고 세계를 조망하는 투명하고 냉철한 시를 쓰는 일에 몰두중이다.
쓰디쓴 인생살이에서 건져 올렸던 수필을 많은 독자는 기억하고 있다. 이를테면 "신이 인간에게 선물을 주실 때는 언제나 고난의 보자기를 주십니다", "넓이뛰기를 할 때도 뒤로 몇 발자국 물러서지 않으면 더 많이 뛸 수가 없다" 등등.

이런 글들이 심금을 울리면서도 한편에서는 상업적 글을 양산하고 정서적으로 이유없는 센티멘탈리즘에 빠지게 한다는 비판도 있었다. 어느 책에서는 전문 여성이 아름답다고 하고, 어느 책에서는 주부가 보람있다고 한다며 나무라는 소리도 있었다. 베스트셀러가 뭐가 나쁘냐는 그녀의 반문 뒤에는 말못할 저간의 사정이 있었는데 그것은 순전 가난 때문이었다고 쉽게 내뱉았다.

"청탁을 거절 못해 쓰다보면 한 입으로 상반된 얘길 할 때도 있지만 똑 같은 내용을 되풀이해서 쓴 적은 없어요. 상반된 내용에도 제각기 진실이 있는 것 같아요" 그러면서 한 문장을 쓰기 위해 열 문장을 지우며 자신의 목소리를 담아내는 각인의 삶을 살았다는 유안진 시인.

유안진 시인을 만날 때마다 받은 느낌은 평안한 매무새, 작고 부드러운 웃음, 정갈한 인상이다. 어느 시인은 "단아한 내적 아름다움의 시인"이라 불렀다. 그러나 외양은 고운매, 시에는 칼날빛이 서려 있는 사람이 유안진 시인이다. 뜻빛깔이 그리 간단치 않는 구석이 많다. 시어에는 투명하면서도 엄중한 시대적 메시지가 담겨 있다. 그이는 역사성과 전통성을 아우르는 시를 주로 쓰고 있다. 지역성보다는 우리 민족의 보편적 심성을 주로 노래한다.

고교 백일장에서 만난 박목월 선생과 각별한 인연
그이는 안동 무실유씨 양반집안의 후예이다. 그래서인지 자유로우면서 마음의 법도를 중시하는 경향이다. 증조부는 진사에 급제하여 진사댁으로 불렸는데 기미년 만세를 부르다가 일본군 총에 맞아 돌아갔다.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의 절개가 깊게 깃들여 있는 곳이 그가1941년에 태어난 안동 임동면 용계마을이다.

25세에 남편상을 당하자 손수 삭발해 삼 년간 시묘를 마친 뒤 단식 끝에 자결했다는 어느 젊은 아내의 이야기 등.... 이런 마을 분위기가 양반체통을 지키면서 예향의 전통을 이어갔다. 조부가 훈장이어서 어릴 적부터 글짓기를 배웠다.

당시 어른들은 높은 마루에 올라 한시를 읊거나 사서를 읽었다. 아낙네들은 내방가사를 짓곤 했는데 마을 풍습으로는 詩會(백일장)라는 것이 봄과 가을에 열렸다. 시상은 남자에
게 통영갓을, 화전놀이로 부침이를 만들어 운을 나누곤 했던 아낙네들에게는 버선과 적삼으로 주었다.

그렇게 성장한 그이는 열 네 살 때 가슴 아픈 가족사로 인해 대전으로 이사했다. 그녀에게 는 남동생이 셋 있었으나 모두 죽었다. 그래서 문중에서는 낯선 외지로 나가 설움과 푸대접을 받는 액땜을 치르지 않으면 대가 끊길 것이라고 판단했다. 아버지는 주위로부터 새장가를 들어야 한다는 부추김에 시달렸고,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교회로 산사로 점쟁이집으로 돌며 자식을 점지해 달라 애원했다.

그런 사춘기에 겪기 힘든 낯선 세상에서 소녀 유안진은 홀로 독서를 하며 문학 열병에 빠졌다. 헌 책방에서 권당 2환씩 주고 빌린 김래성, 방인근, 정비석의 연애소설이나 흙, 무정 등에 중독되었다. 일기장에는 데미안에 나오는 주인공 싱클레어에게 띄우는 편지로 가득 채워졌다. 이녁을 지키기 위한 싸움에서 처음으로 글을 무기로 삼은 셈이다. 시인이 되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중학교 때이다. 시인 이외는 아무 것도 되고 싶지 않았단다.

중학교 2학년 때의 일이다. 문예시간에 선생님이 김소월 시인의 산유화를 보이자 "갈 봄 여름없이 꽃이 피네" 구절이 참 이상하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선생님, 왜 순서가 봄·여름·가을이 아니에요?". 당황한 선생님은 "야, 소월이 그렇게 쓰면 쓴 거지. 왠 말이 그리 많어?". 그 때부터 그이는 소심증에 빠졌다.

고등학교는 감리교단 소속 호수돈여고였다. 가난 탓에 긴 머리를 자기 손으로 자르고 미용비를 아끼고 소풍가지 않는 돈을 모아 책을 사 읽었다. 성경시간에 소월시를 베껴쓰다가 걸려 벌을 받기도 했다. 어째튼 이 때부터 움튼 기독교 사상은 교수 남편을 따라 카톨릭으로 바꿀 때까지 어언 40여 년 이상 신앙 생활을 해온 셈이다. 특이한 점은 작품 세계는 불교적 색채가 강하다는 점이다.

유안진 시인은 65년 서울대 졸업과 동시에 현대문학에 박목월 선생 추천으로 등단했다. 박목월 선생은 제자들을 쉽게 등단시키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녀가 목월 선생과 인연을 맺은 것은 고교 2학년 때 백일장 때이다.

목월이 문학소녀 유안진의 작품을 칭찬한 것이 인연이 되어 여대생이 되어 편지를 보냈다. 그리고 목월은 "한대로 놀러 오게"라는 엽서를 답장으로 보냈다. 1963년 봄날, 문학도 유안진이 한양대로 가는 길목에 유난히도 찔레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당시 선생님은 40대셨는데 순후하시고 어진 분이었어요. 한양대로 가는 길에 흰 찔레꽃에 야생벌이 잉잉거리는 모습에 참 기분 좋았어요. 마음속으로 선생님이 안 계시면 어떠나, 만나면 무슨 말을 해야 하나 하며 가슴 조렸죠. 그만큼 제가 수줍었거든요. 선생님께서는 시보다는 객지에서 밥 거르지 말고 잘 먹으라는 말씀을 해주셨어요. 물론 시작 노트는 끝내 보여드리지 못했어요. 제 스스로 용기가 나지 않았어요"

스승 목월과 함께 점심 식사를 하러 왕십리에서 전차를 타고 화신 백화점 뒤 설렁탕 집으로 갔던 일도 잊을 수 없다. 설렁탕을 먹는데 소금 그릇이 목월 옆에 있어 그것을 가져올 용기가 나지 않자 그만 설렁탕을 맹탕으로 먹은 것. 목월은 나중에 이 이야기를 수필로 썼고 그녀에게 "그렇게 숙맥인 걸 보니 시는 제대로 쓰겠구나" 라고 말했다. 그렇게 그이는 지순한 시인이 되었다.

등단 전에 이따금 원효로 삼정다방에서 목월 시인을 만났다. 목월은 늘 흰 고무신에 옷고름을 대충 매고 나와 그녀는 당황스러웠다. 시작품을 내밀 때마다 작품은 좋다고 하면서도 추천 이야기는 하지 않아 서운했던 긴 긴 시간이 지났다. "선생님께서는 어느 날 제 작품을 보시고는 아 좋다 하시는 거예요. 그러다가 갑자기 정색을 하시더니 유군. 나는 시 몇 편 좋다고 시인을 만들어 줄 순 없네라고 하셨어요. 영문학, 국문학을 전공한 사람들이 살다가 자신이 어려우면 시를 포기하는데, 저처럼 교육심리학을 전공하는 사람
은 언제 시를 포기할 지도 모른다, 유군이 시를 포기하면 내가 뭐가 되겠느냐는 말씀이었지요. 그래서 목월 선생님이 현대문학으로 추천한 시인은 10명 안팎밖에 안 될 거에요"

박목월 시인은 경북 경주출신으로 자연을 바탕으로 인간의 염원과 가치를 노래한 청록파 시인의 한사람이다. 특히 경상도 사투리를 통해 어릴 적 추억을 회고하거나 이미지즘으로 자주 차용했는데, 유안진 시인은 이 대목에 주목했다. 이런 사투리의 묘미를 살려낸 유안진 시인의 작품이 사투리라는 시이다.


가끔씩은 사투리로
귀도 씻어줄 일이다

기적도 애잔하게 메나리조로 우는
중앙선도 타 볼일이다
태백 소백 첩첩산중 고개고개를 넘어가며
바람도 산바람뿐인 메나리조의 고개바람소리
심심산골 얼음썩는 산여울도 메나리로 울어
경상도는 사투리 메나리조 아리랑

진양조로 휘즐어진 호남선을 타고가면
산등성이도 강줄기도
밀쳐낼 듯 끼고도는 진양조 느린 가락
호남들녘 논두렁길 밭두렁길 따라
앞서거니 뒤서거니 동행하는 바람소리도
한이 삭아 흥이 된 진양조의 호남사투리

가끔씩 가끔씩은
우리가락 사투리로
귀를 후벼줄 일이다.

(사투리 전문)

*돈 없어 월부로 낳은 아들과 지란지교를 꿈꾸며

그런 스승 목월 시인이 눈 내리는 어느 초겨울에 유안진 시인이 근무하던 호수돈 여고에 나타났다. 그녀는 갑자기 나타난 목월 선생을 위해 교장 선생께 부탁해 전교생을 강당으로 모아놓고 강연 자리를 마련하기도 했다. 그 일은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 같다. 그날 저녁 그녀는 스승에게 처음으로 맥주를 따라 올렸는데, 잔이 넘치도록 술을 따라 얼굴이 홍당무가 될 정도 여전히 수줍은 처녀 시인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목월은 산책 후 고혈압으로 64세에 세상을 떴다. 그녀의 가슴이 아프게 저미었다. 그렇게 이녁도 긴 연륜에 접어든 유안진 시인 .

그녀 역시 남편이 항암 치료를 받았고 이녁도 19세 때부터 앓아온 만성신장염으로 여태 고생중이다. 얼마 전에는 종기를 떼어내는 수술도 받았다. 고통은 왜 이리 질기고 긴 터널을 걷는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 37세 때 가슴에서 진통중인 막내아들을 낳기 위해 무작정 순천향병원에 입원했던 유안진 시인. 아들을 낳고 보니 돈이 없어 월부로 갚기로 했단다. 그래서 막내아들을 월부로 낳았다고 말하곤 한다.

이 긴긴 겨울을 어디에다 쓰랴
아아 나는 아껴 죽고만 싶네

절망을 탐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눈속을 걸어가는 늙은 짐승
죽을자리 향하여
걸음마다 핏자죽을 찍으며 가는
나이 먹은 짐승이고 싶네 나는

음습한 밀림 속을 동행하는
괴기스런 바람소리
차이코프스키의 비창을 탄주하는
겨울 밀림의 겨울 깊은 밤을
밤의 계절 겨울을

죽기 위해 걸어가며
아껴 아껴 쓰고 싶네

(밤의 계절 전문)

참 직설적이고 가슴을 요동치게 하는 작품이다. 암울했던 상황들이 행마다 절절하게 포효한다. 험하게 걸어온 길, 다시 가는 이 길도 모두 멀고 험한 길이기에 죽음 무릅쓰고 걷는 짐승 같은 길이다. 산다는 것은 때로 괴기스런 바람소리, 차이코프스키의 비창을 탄주하며 가는 길이다. 살아있는 자체가 비극인 시절에 그 길, 걸어가는 길마다 죽기 위해 가는 것만 같았을 터.

또한 실제 상황이 그랬다. 그래서 열정도 시간도 돈도 모두 아껴 쓰고만 싶었을까. 참 질긴 가난은 유년기 그리고 대학시절과 귀국 후까지 이어졌다. 가정교사를 하며 대학시절을 보냈고 졸업 후 150불만 달랑 들고 국비유학을 떠났다. 도서관 한 켠에서 이국의 생활을 지탱해 나갔다. 국비 유학이었음으로 귀국 후 의무적으로 한국교육개발원에서 지금의 남편과 함께 2년을 근무한 후 단국대에서 첫 대학강의를 했다.

이곳에서 서울대로 온 것은 당시 교육심리학 전공 여교수가 필요했던 서울대의 제의 탓. 그렇게 이 분야 서울대 첫 여
교수가 되었다. 귀국 시점인 78년부터 본격적으로 수필을 쓰기 시작했다. 겨울이면 연탄재를 깔고 오르내리던 고샅길. 서울 봉천동 꼭대기 17평에서 시댁 식구와 친정 식구 8명이 함께 살았다. 집 장만을 위해 월급이 이자로 다 들어갔다. 그래서 손댄 수필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해적판도 판쳤고 인세도 많이 뜯겼다.

당시 그이의 글은 재수생, 신입생, 직장인, 가정주부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 폭 넓은 독자군단을 이끌었다. 독재정권 아래서 따뜻한 정서와 용기를 주는 글들이 독자들의 마음을 울린 것. 산문 지란지교를 꿈꾸며는 80년대 학교, 입시학원, 회사 등에서 묵상의 시간이나 각종 모임에서 암송됐던 글로 널려 알려져 있다.

나는 될수록 정직하게 살고싶고, 내 친구도 재미나 위안을 위해서 그저 제자라서 탄로나는 약간의 거짓말을 하는 재치와 위트를 가졌으면 싶을 뿐이다. 나는 때로 맛있는 것을 내가 더 먹고 싶을 테고, 내가 예뻐 보이기를 바라겠지만, 금방 그 마음을 지울 줄도 알 것이다. 때로 나는 얼음 풀리는 냇물이나 가을 갈대숲 기러기 울음을 친구보다 더 좋아할 수 있겠으나, 결국은 우정을 제일로 여길 것이다. 세월이 흐르거든 묻힌 자리에서 더 고운 품종의 지란(芝蘭)이 돋아피어, 맑고 높은 향기로 다시 만나지리라.
(산문 지란지교를 꿈꾸며 중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그이가 마흔 넘을 무렵 쓴 이 산문은 문학사상에 글을 쓰기로 한 어떤 분이 원고를 펑크내자 그이에게 급하게 청탁해와 하루 밤을 새며 썼던 글이다. 이 글이 발표되자 장안의 화제가 되며 유명세가 치솟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인터뷰 요청이며 각종 모임에서 이 글이 낭송되었다. 고등학생들이 외우고 다니면서 입소문이 이어졌고 이 글을 베낀 공책이나 책갈피 책받침이 참 인기였다. 별이 빛나는 밤에 등 청소년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이 글은 단골 멘트로 흘러나왔고 노인과 주부들은 이 글을 친필로 써 달라며 그이를 혼쭐나게 했다.

어느 날 교생실습 나온 사람들이 전교생에게 이 글을 주고 떠나갔는데 유안진 시인의 아들이 이 글을 받아 귀가한 일도 있었다. 이래저래 국민들의 가슴에 심금을 울리던 지란지교였다.

*어려웠던 시절만큼의 삶과 시의 열정, 이제는 모두의 누이로 돌아온 유안진

그런 것이다. 빛깔 좋은 글은 체험 위에서 성숙돼 피어난 꽃인 것이다. 삶도 사랑도 죄다 아픔이었던 시절에 가슴 깊은 곳에서 빚어낸 구절이다. 그런 한편에서 시는 그 아픔이 그대로 아픈 채로 베여 나왔다. "내일 아침 된서리에 무너질 꽃처럼/이 밤에 울고 죽을 버러지처럼/거치른 들녘에다/깊은 밤 어둠에다/혈서를 쓰고 싶다"처럼. 뜨거운 사랑, 진솔한 사랑을 목놓아 불렀던 시이다. 세상은 차디차고 아픔은 깊고 뼈저리는 시간들, 그런 삶의 편린 속에서 그녀는 고통에 찬 몸부림을 피하기보다는 이를 헤치며 왔다.

그런 유안진 시인은 여전히 미국에 거주하는 동생들의 생활비를 지원하고 심장병 돕기와 불우이웃들을 위해 일정 기부금을 꼬박꼬박 내고 있다. 사후 장기 기증을 약속하고 이 증서를 손가방에 넣고 다닌다. 320밀리리터짜리 피 한 봉다리를 뽑아주면서 "멀쩡한 누군가가 오염될라...내가 할 수 있는 짓은 이 짓거리뿐...."라고 노래한 시인. 까무라치지 않게, 고통스럽지 않게 누군가를 기다려주고 싶다고 노래한 시인. 이제는 그렇게 아프고 슬픈, 연약한 이들에게 사랑 주는 누이가 되어 돌아온 유안진 시인.

누가 들어도 하품할 이 나이에는
반나절은 눈이 쉬고 반나절은 귀가 쉬는
겨울 산하가 되고 싶다
세상의 누이가 되고 싶을따름이다

빵빠르를 울리며 출현해서는
젊음을 요절내듯 결단내듯
치닫는 신세대도
어리광 받아주듯 손뼉쳐주고 싶다.

(누이중에서)

97년에 나온 그녀의 열 한 번째 시집 누이에 실려 있는 시이다. 한 지식인이 사회를 겨누는 예리한 눈빛이 살아있다. 한편으로 누이처럼 따뜻한 큰 강물같은 사랑이 흐르고 있다. 이 시집을 일러 어느 시인은 자아정체성의 서정적 탐구의 매력을 지녔다고 호평했다. 아무의 어리광이나 다 받아주고 싶은 우리의 누이 모습이다. 이제는 흘러온 강물의 뒤안길에서 유유히 흘러오고 흘러가는 강줄기를 바라보며 나즈막하게 세상을 보듬고 있는 어머니 모습 같기도 하다. 그렇게 가자며 사랑의 노래를 부른다. 강물처럼 철썩이며 하고싶은 말들이 너무 많아 그만 가슴이 멎어버린 듯, 최근에 펴낸 봄비 한 주머니라는 시집에 실린 시편들은 한결같이 짧고 투명 명료하다.

호흡이 긴 글에서 보아온 독자들에게는 화두가 짧다는 사실만으로 도발적이라고까지 생각케 한다. 강물을 뒤척이며 온 그 길에서 배인 시인의 내면은 주전자 뚜껑처럼 끓어오를 수 있을 것이지만, 그런 심적 반란을 숙성된 삶으로 발효시킨다.

눈물겨운 시간들이 50대의 끝자락에 당도하면서 용해되고 화해된다. 역설적으로 뼈저리게 체험하고 인식한 것들이 자아의 타협으로 누구도 쉽게 찍지 못할 마침표를 찍어 버린다. 그렇다고 잘못된 양태 앞에서 침묵하는 것은 아니다. 여성이지만 여성 분열적 정체성에는 반기를 든다. 물길을 틀어 보려 애쓰는 흔적이 역력하다. 살다보니 그러더라가 아니라 살아보니 이러하더라는 깨달음의 메시지를 던진다. 그래서 살고싶어 눈물나고, 불현듯 생피 쏟고 싶은 自害行動, 칼에 베인 듯 흐르는, 그저 동맥이나 썩둑 잘라 녹날 빗속 헤매는 도깨비 불티 번쩍일 겨울밤 빗소리 같은 현실 앞에서 유안진 시인은 알아버려 서글프다면서 너무 착해서 고통스럽지 않게, 잘못한 벌로 액땜으로, 더불어 껴안고 목메이고 말자 말자 한다.

그렇게 가슴 시린 세월들이 지혜의 새길을 여는 시어들로 칼날처럼 반짝이며 일어선다. 그런 시어들은 어찌보면 한 시대의 어른이 던져준 나무람 같기도 하고, 큰누이가 들려주는 마음의 손길 같기도 하다.

"시를 쓰는 축복에 감사하고 위대한 작품 하나 만들고 싶다"
유안진 시인은 90년대 탁 트인 시어들로 문단에서 각광 받았다. 그이는 새로운 시집을 낼 때마다 늘 다른 빛깔을 보여주고 싶단다. 시 한 편 한 편이 독립국가라고 말한다. 시인은 모국어의 창조자임으로 시어까지 달라져야 한다는 생각이다. 삶도 시도 적극적으로 의도적으로 변화하려하지 않으면 변화는 너무 느리거나 변화되기 어렵다는 것이다. 시인이야말로 끊임없이 거듭나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래서 이제는 그런 시 작업에 몰두하고 싶단다. "문학은
해볼 만 한 것이죠. 역사는 이긴 자의 기록이니까 사실의 기록이고 문학은 실패한 자의 기록이죠. 그래서 진실이거든요. 실패한 자가 큰 시, 위대한 작품을 내놓을 수 있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세상에 정말로 하고 싶은 것은 문학뿐입니다. 정말로 시다운 시, 제가 바라는 만큼의 좋은 시를 한번 써보고 싶어요. 소원이 있다면 그것뿐이에요"

이러한 새로운 길 위에서 논문이다 BK21에다 해서 행정적 업무 등아 가중된 교수직을 가능한 빨리 벗으려 결심했다. 글을 써서 집도 사고 그런 대로 괜찮은 생활일 터이지만 그이는 아직도 23년 동안 타고 다닌 중고 엘렌트라 몰고 방배성당 성마리아 상 앞으로 가서 두 손을 모아 기도했다. 시 쓰는 축복을 주셔서 감사하고 앞으로도 시에 복무하는 시인이 되게 해달면서....

■ 유안진 시인은 ……

1941년 경북 안동에서 태어났다. 65년 서울대 사대 및 동 대학원에서 교육심리학을 전공하고 75년 미국 플로리다 주립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65년 박목월 시인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했다.

시집으로 달하, 물로 바람으로, 달빛에 젖은 가락, 영원한 느낌표, 월령가 쑥대머리, 구름의 딸이요 바람의 연인이어라, 누이, 봄비 한 주머니, 시선집으로 꿈꾸는 손금, 풍각쟁이춤, 빈 가슴 채울 한마디 등이 있다.

수필집 우리를 영원케 하는 것은, 축복을 웃도는 것 등 다수, 장편소설 바람꽃은 시들지 않는다, 땡삐 등이 있다. 한국펜문학상, 정지용문학상, 월탄문학상을 수상했다.
현재 서울대 아동학과 교수로 재직중이고 시전문지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 공동주간, 섬문화연구소 고문이다. 유안진, 박상건, 박상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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