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가 있는 풍경 31] 박남철作, ‘들판에 서서’
빈 들판의 애환…우리는 땅의 후예들
어쩌리, 들판에 서면 떠나지 못하네
작은 가슴 미어지게 들판이 비어가면
설움 깊어져서 못내 돌아보고
떠나지 못하는 무엇이 있을까
기어이 뿌리치지 못하는
정든 것이 있었을까
노여움이었구나
똑바른 정을 다해 들판을 키웠는데
거름내고 흙을 갈고 씨 뿌리고 김을 매며
땀 흘리던 저 일손들, 들판을 채우던 저 알곡들
어느 것 하나 성하지 못하니
들꽃들 스스로의 허리꺾고
흩어져서는 울고 있는지
눈물 감추며 더욱 아픈 마음들
부르면 달려오는 것일까
들판에 가면 이제 알겠네
‘저 건너 묵은 밭에
쟁기 벌써 묵었느냐
임자가 벌써 묵었느냐‘
빈 들판 울러대는 찬 바람 잠 재우며
거기 씨 뿌리던 어머니의 손길
떠나지 못하고 묻어 나오는지
태어나서 오직 한길 들판에 호미로 사시던 이
어째서 어머니는 빈 들판이 되셨는지
짓밟혀도 깨어져도 피 뚝뚝 흘려도
봄이면 새싹 틔워 우리 힘 되어준 땅
거둔 농사 빼앗겨도 지켜야 할 땅이기에
평생을 빈 들판으로 어머니는 사셨지만
제게도 그 순종을 미덕이라 하셨지만
들판 믿고 당당히 살아야 할
떳떳이 물려주어야 할 내 땅이기에
힘차게 두 팔 걷고 꽉 찬 들판 키워내며
하늘 빛을 닮은 그 들판 곁에 서서
지는 해 바라봐야지요 그러믄요
뜨는 해 바라봐야지요 손뼉쳐야지요
- (박남철, ‘들판에 서서’ 전문)
텅 빈 겨울들판. 허수아비도 눈물에 젖은 겨울들판. 그런데 왜 그 빈 들판에 “기어이 뿌리치지 못하는/정든 것이 있었을까” 아무 것도 없는 들판인데, 이내 “흩어져서는 울고 있는지/눈물 감추며 더욱 아픈 마음들/부르면 달려오는 것일까”
“들판에 가면 이제 알겠네/……/거기 씨 뿌리던 어머니의 손길/떠나지 못하고 묻어 나오는지/태어나서 오직 한길 들판에 호미로 사시던 이/어째서 어머니는 빈 들판이 되셨는지”
영글면 영근 대로 비료값 걱정이고 풍년이면 풍년인 채로 사는 일 매한가지이던 세월. 그러나 그 들녘을 떠나지 못하는 것은 “짓밟혀도 깨어져도 피 뚝뚝 흘려도/봄이면 새싹 틔워 우리 힘 되어준 땅”이라는 하나의 믿음 때문.
“그 순종을 미덕이라” 하시며 “들판 믿고 당당히 살아야 할/떳떳이 물려주어야 할 내 땅이기에/힘차게 두 팔 걷고 꽉 찬 들판 키워내며” 사는 땅 그리고 땅심을 믿는 후예들.
없으면 없는 대로 다 털어 내주고 남은 볏짚으로 겨울나기 초가지붕을 이어주고 마지막 빈 껍데기마저 두루뭉실 빈 들판을 지키고 서 있는데 농부님은 홀로 되뇌인다. “지는 해 바라봐야지요 그러믄요/뜨는 해 바라봐야지요 손뼉쳐야지요”라고.
바람도 눈발도 허수아비도 고개 숙인 채로 봄을 기다리는 것은 희망은 가능성에 대한 정열이라는 믿음 탓. 밥심으로 안빈낙도(安貧樂道)하는 사람들이나 살림에 신토불이(身土不二)를 실감하며 사는 도시민의 비밀은, 그 출생의 한계는 농민의 후예라는 사실인 것을.
박상건(시인. 계간 섬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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