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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상예보에 운명 맡긴 채 고향을 찾는 섬사람들의 애환

섬과 등대여행/섬사람들

by 한방울 2006. 1. 26.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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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건의 섬과 등대이야기 51] 설날 고향 찾는 섬사람들의 애환

기상예보에 운명 맡긴 채 고향을 찾는 섬사람들의 애환

승용차와 여객선 번갈아 타고 다시 목선 타고 찾는 고향집


설날이 왔다. 연어가 모천을 찾아가듯이 서울에서 방방곡곡으로 이어지는 긴 차량행렬이 그려진다. 차창 밖으로 고향을 그리며 가는 객지의 혈육들이 한 장 낙엽처럼 스치는 대한민국설날만의 진풍경이다.


그 풍경 속에 한편으로는 가슴 들뜨고, 한편으로는 자신이 탄 승용차가 당도하는 포구에 폭풍주의보 깃발이나 내걸리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는 것은 섬사람들의 공통된 마음이다. 내 정녕 마음만 고향집으로 나부끼다가 돌아서지나 않을까 포구의 깃발을 떠 올리며 섬으로, 섬으로 향하는 것이다. 그렇게 가슴 졸이며 가는 섬사람들. 그것도 버스 종착역이 있는 섬이 아니라 다시 배를 타고 가야하는 작은 섬, 거기서 또 작은 배를 타는 거의 무인도 같은 곳에서 태어난 후예들마저 있다.


분명, 어머니는 아궁이에 장작불을 지피며 손주 녀석들이 하룻밤 묵을 아랫목을 데피고 있을 것이다. 작은 고모 큰 고모 토방에 둘러앉아 지지고 볶으며 조카들을 기다릴 것이다. 그렇게 모처럼 시골 굴뚝에는 따뜻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객지의 혈육들이 그곳 핏줄과 하나 되기 위해서는 포구에서 손을 흔들며 마중 나온 마을 사람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어야 할 일이다. 


그렇게 오로지 기상예보에 모든 것을 맡긴 채 가슴 졸이며 고향을 찾는 섬사람들. 때로는 그랬다. 이쪽 포구에서 저쪽 포구를 바라보며 손만 흔들고 돌아서야 했던 것이다. 아직도 문명의 저편에서 고향집을 찾아가는 작은 섬에 사는 사람들의 애환이 설날이면 되살아나는 것은 하릴 수 없는 일인가.


세상이 좋아지면서 섬에서 섬으로 이어지는 다리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를 연육교가 부른다. 주 5일제를 맞아 도시사람들의 여행코스는 날로 세련되어 가고 섬들을 잇는 다도해 해상국립공원 계획도 있다. 하지만 모든 섬사람들이 아직 그 혜택을 누리는 것은 아니다.   


부천시 소사동에 사는 주부 최현옥씨(46)는 신안군 팔금도가 고향이다. “바람이 불면 영락없이 목포항에 여관에서 며칠 묵고 귀경길로 되돌아서지요. 떠나기 전에 기상예보 때는 괜찮았는데 바다 날씨가 워낙 변덕이 심해 현지에 도착하면 해양경찰들이 출항을 허가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면서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다가 배가 떠날 수 없어 전화 한통으로 안부 전하고 맥 빠진 채 귀경길에 오르곤 했다”는 것이다.


시흥과 방조제로 연결된 대부도, 다시 대부도와 영흥도를 연결하는 영흥대교가 2001년 완공되면서 선재도와 영흥교가 이어졌다. 이들 섬들은 인천항에서 배를 타지 않아도 기상예보와 관계없이 고향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 섬에서 다시 작은 배를 타고 가는 사람들은 가상예보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특히. 선재도 '측도'라는 작은 섬. 측도는 물이 맑아 섬 아랫도리가 훤히 보이고 늘 가까이 있는 섬이라는 뜻이다. 해망산 서쪽 뿌리에서부터 570m 정도의 갯벌을 사이에 두고 있는 섬이다. 썰물 때는 선재도와 측도 사이에 모래와 자갈로 된 모세 현상이 일어난다. 하루에 두 번씩 물이 빠지는 데 측도 사람들은 그 때 이 섬으로 들어갈 수 있다.


측도와 비슷한 생활을 하는 곳이 55가구에 주민 180여명이 사는 충남 서산의 웅도이다. 이 곳 역시 하루에 두 번씩 열리는 물길에 따라 섬으로 들어갈 수 있다. 해남 땅끝을 더 지나면 해남군 남창리. 작은 방조제로 달도와 연결돼 마지막 육지이다. 이곳 달도에서 완도군을 잇는 다리가 완도교이다. 1968년 한강 인도교를 철거해 완도대교로 만든 것이다. 그렇게 완도와 연결돼 서울 혹은 광주에서 완도까지 국도 13호선을 타고 달려 고속버스가 완도항까지 닿게 된 것이다.


이 다리가 연결되기 전에는 기상예보에 배가 뜨지 못해 200미터 남짓 한 바다 거리에서 서로 손을 흔들며 뒤돌아서던 풍경들이 옛 완도 섬사람들의 설날 풍경이었다. 그러나 완도는 201개의 작은 섬을 보듬고 있다. 이 섬에서 201개 섬을 오가는 사람들은 다시 배를 타야 한다. 철부선 등이 오고가는 큰섬에서 이도 없어 마을에서 개인 배로 오고가는 섬사람들이 많다. 


완도토박이 김정호씨(45. 완도신문 편집인)는 “설날 풍경만 그런 것이 아니고 사실 읍네 학교를 다니던 고마도 사후도 모도 등 작은 섬에서 사선을 타고 학교 다니던 친구들은 바람이 불면 마을에서 오고가던 연락선이 출항하지 못해 학교에 나오지 못한 것이 다반사였다”면서 “그런 섬에서 사는 사람들은 어릴 적부터 남다른 애환이 많다”고 말했다. 최근 완도, 신안, 진도 등 크고 작은 섬 지역에 연륙교가 많이 늘어나면서 성수기에는 민박집 등 관광수요가 줄어서 걱정이고 그렇다고 연육교가 생기지 않으면 섬사람들의 고향을 찾는 길이 불편하니 이도저도 문제인 것이 섬사람의 생활 문제라는 것이다.


어쨌든 육지에서 섬으로 들어갈 수 있는 귀성길은 행복한 것이다. 그렇게 찾아간 섬마을 고향집에는 그런 그리움을 품은 듯 객지 사람들의 편린처럼 오래도록 묵히고 익히는 상징물이 있었으니 그것이 장독대이다. 작은 항아리는 노잣돈을 보관하기도 했고 할머니 어머님, 고모네들이 밤새 콩을 삶고 절구통에 빻아서 담은 된장과 메주와 함께 발효시킨 검은 간장이 출렁이곤 했다.


가난한 시절 저녁상은 늘 밀죽이었는데 먹다 남은 밀죽은 늘 그 장독대 위에 놓여 있었다.

다음날 아침 팥이 들어간 그 식은 밀죽을 먹어보지 않는 사람들은, 요즈음 도시에서 파는 칼국수에만 입이 길들여진 사람들은 어머니 손맛이 깃든 기 밀죽의 참맛을 잘 모를 것이다.


장독대 옆에는 장두감나무가 있었다. 아직 설익어 된장 풀어 담가두면 이삼일이면 잘 익곤했다. 또한 장독대 앞에는 샘물이 있었고 냉장고가 없던 시절에 수막을 달아놓으면 냉동고 역할을 했고 논밭 일을 하고 온 장형의 등물을 껴 얹던 추억이 배여 있는 곳이다. 그 뒷편으로 나무를 쌓아두는 곳 그리고 건너편에 텃밭이 있었다. 그 텃밭 가로질러 신작로가 있었고 할머니와 어머니는 자식들을 고대하며 연신 이마에 손을 얹고 그리움을 달랬다.


신작로는 그런 그리움을 물고 꼬불꼬불 이어졌고 비틀거리며 달리는 마을버스는 우리네 서민들의 흔들리는 삶의 동행자였다. 그렇게 우리네 고향집으로 가는 길목을 이어주었다. 어쩜, 모두가 힘든 여정을 마다 않고 고향을 찾아 나서는 것은 성묘의 의미도 있겠지만 끝내 삭일 수 없는 그리움 혹은 모성애를 되새김질하기 위한 귀중한 시간의 투자 행위이다.


그러기에 설날은 즐겁고 성스러우면서 겸허한 나와, 따뜻한 가족과의 만남이라는 그런 공돛체로 내일을 꿈꾸는 희망 다지기 행위이리라. 때로 객지에 살면서 버겁고 힘들고 지쳐 있었을지라도 더 낮은 곳에서 낮게 낮게 가슴 내려놓고 사는 시골사람들의 어질고 낙천적인 삶을 배우는 소중한 시간과의 만남인 것이다. 그래서 “어린것들 잇몸에 돋아나는/고운 이빨을 보듯” 내 스스로 당당하고 희망찬 새해를 다짐하며 귀경길에 오를 수 있는 것이리라.


“오늘 아침/따뜻한 한 잔 술과/한 그릇 국을 앞에 하였거든//그것만으로도 푸지고/고마운 것이라 생각하라.//세상은/험난하고 각박하다지만/그러나 세상은 살 만한 곳//한 살 나이를 더한 만큼/좀 더 착하고 슬기로울 것을 생각하라.//아무리 매운 추위 속에/한 해가 가고/또 올지라도//어린것들 잇몸에 돋아나는/고운 이빨을 보듯//새해는 그렇게 맞을 일이다.”

- (김종길, ‘설날 아침에’ 가운데)


글․사진: 박상건(시인. 계간 섬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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