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골에서 ‘천천히’ ‘느릿느릿’ 산다는 것
지리산골 농사꾼 민재웅씨의 농사짓는 법
“어물전 개조개 한 마리가 움막 같은 몸 바깥으로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죽은 부처가 슬피 우는 제자를 위해 관 밖으로 잠깐 발을 내밀어 보이듯이/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중략)//누군가를 만나러 가고 또 헤어져서는 저렇게 천천히 돌아왔을 것이다//늘 맨발이었을 것이다” -(문태준, ‘맨발’ 중에서)
‘맨발’이라는 시 구절이다. 개조개 한 마리가 맨발을 내밀었다가 다시 천천히 조개 속으로 제 발을 거두어 들여가는 모습을 그린 시이다. 뻘밭에서 집게발을 내밀고 거두어 가기를 반복하며 무심히 살아가는 모습은 첨단의 시대에 간편하게 쉽고 빨리 살아가기를 구가하는 요즈음에 ‘천천히’, ‘느림의 미학’이 무엇인지를 되새김질하게 하는 것이다.
경상남도 거창군 학리구례는 지리산자락에 나지막이 엎드려 있는 산골 마을이다. 지리산 가야산 덕유산 세 줄기를 이어받아 벌판으로 이어지는 모양새는 예나 지금이나 ‘농자천하지대본’을 꿈꾸며 묵묵히 살아가는 대다수의 우리 농부들의 혈맥을 그대로 보여주는 곳이다.
적막한 산골에는 동박새, 파랑새, 까치, 딱따구리가 떼로 날아들어 울고, 개불알꽃과 영춘화, 수선화, 능소화, 산수유, 단풍 등 야생화와 풀꽃들이 사계절마다 그 모양새를 달리할 뿐 늘 그 자리에서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고 한줌 햇살에 눈부시게 반짝이며 사는 자연의 유토피아가 무엇인지를 호올로 연출하고 살며시 사그라들기를 반복한다.
아침이면 숲의 가지마다 이슬이 반짝이고 낮이면 그 이술 빛을 허공에 퍼 올리면서 계곡물 소리로 위대한 교향악 혹은 신들리든 듯한 휘몰이를 하면서 들판으로 물살을 처 올린다. 그렇게 살아 생동하는 산골은 묵묵히 살아가는 농부들의 터전이다. 물꼬를 트는 농부들이나 과수원의 가지치기를 하는 혹은 열매를 따는 농부들의 등허리에서 허리께에서 자연은 풍물패 놀이를 하듯이 힘겨운 시간들을 위로하는 협주곡을 켜기도 한다. 그 오솔길과 논두렁을 따라 도시에서 찾아온 손녀와 바둑이까지 여유와 넉넉한 평화가 무엇인지를 엿보게 해준다.
이런 후미진 산골의 평화는 이따금 이 협곡을 오르내리는 등산객들이 잠시 부러움으로 눈짓을 하고 사라질 뿐 일상은 인적이 끊긴 적막한 들판이다. 이처럼 천천히 살아가는 일에 안빈낙도를 실감한다면서 자연의 패러다임에 자신을 던져 놓고 살아가는 사람. 자연의 생태에 맞춰 삶을 일구어 가는 느림의 미학을 즐기는 농사꾼이 민재웅씨(67)이다. 한사코 사진 찍기와 취재를 마다했던 그이는 첨단의 농사기법을 지양하는 특이한 농사꾼이다.
사과밭 3,000평과 토마토밭 200평이 그의 모든 삶의 터전이다. 자연에 모든 것을 맞춰 농사를 지어야 한다는 신념을 버리지 않은 지 오래이다. 다만 그런 농사짓기를 사람들은 유기농이니 첨단 농사짓기이니 그 나름의 이름 짓기를 하는 것을 안 것은 최근의 일이다.
“이 산골에 오면서 많은 것을 바라지 않았습니다. 단지 계절에 역행하지 않는 농사를 짓고 싶었습니다. 태양과 바람과 비를 맞아가며 사는 그런 과일을 생산하고 싶었습니다. 자연의 섭리를 역행하지 않는 일은 사람 사는 일이나 농사짓는 일이나 매 한가지라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렇게 계절에 따라 성장하는 농산물과 자연을 벗 삼아 남은 삶을 살고 싶다는 그이는 본디 농촌지도소 관정기사였다. 물이 귀한 농촌지역에 지하수를 뽑아 올리던 기술자였던 것. “예전에는 지하수를 이용하기 위해 깊은 구멍을 일일이 파야 했습니다. 그것이 우물이지 않습니까? 매우 힘들고 노력이 많이 필요한 작업이었어요. 그 장비를 일반적으로 보오링 장비라 불렀는데 전문용어로는 천공기입니다. 천공기로 구멍을 뚫어 지하수가 있는 곳까지 약 50~100M 정도를 파내려가 구멍 안으로 수중 모터를 삽입시켜 모터를 작동시키는 전기나 발전기를 연결했던 것이죠.”
요즈음에야 집집마다 들판마다 쉽게 수도를 이용하고 있지만 가뭄이면 물이 귀하던 시절에 인근 저수지 물을 시간에 따라 자기 논에 물을 대기 위해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던 농사꾼들이 대부분이었다. 지금도 물이 귀한 일부 지역에서는 이런 농부들의 고통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예나 지금이나 농사를 짓는 농부들은 하늘에 크게 의지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그이에 따르면 지하수 개발을 위해 구멍을 뚫어 놓은 땅은 전국에 수천 개를 넘고 있을 것이란다. 구멍을 파면 대대로 물을 뽑아 쓸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물을 쓰다가 다 떨어지면 다시 구멍을 메우고 다른 곳을 뚫곤 한단다.
그래서 민재웅씨는 말했다. “관정은 구멍만 뚫는 일이 아니라 지하수 사용이 끝나면 오염원이 흘러 들어가지 않도록 관리하는 일까지 책임지는 것이죠. 수많은 관정이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식수염의 오염이 되고 있는 현실을 목도하면서 관정기사로서 죄의식마저 들 때가 많았어요.”
무슨 일이든 좋은 치지에도 불구하고 나중에 올 수 있는 후유증까지 헤아릴 줄 아는 농정이 중요하다는 우회적인 지적으로 들렸다. 아무튼 그이는 농부든 일반인이든 오염되지 않는 농산물을 먹고 싶다면, 좋은 토질과 맑은 공기와 숨 쉬는 자연 속에서 대대로 살고 싶다면 지하로 오염원이 섞이지 않는 땅 관리 등 자연환경 문제에 남다른 관심이 가져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고 하더라도 나는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했던가. 지리산과 덕유산 젓줄인 산골은 고랭지이다. 그이는 일교차가 심하고 물과 공기가 아주 맑은 이곳에서 사과 농사를 짓는다. 이슬을 머금고 자라는 사과는 자타가 인정하는 친환경농산물 중 하나.
거창 일대 수확기는 10월말부터 11월 초순경이란다. 사과 크기가 균일한 게 특징 중의 특징. 황백색 사과는 육질이 치밀하고 과즙이 많다. 좋은 사과는 맛과 향이 오랫동안 보존되는데 꼭지 부위가 말라 있지 않고 반대부위에는 녹색끼가 빠진 것 그리고 사과 껍질이 고르고 밝은 느낌을 주는 것이 좋다고 알려 주었다.
그는 토마토 농사도 짓고 있는데 농약을 사용하지 않는다. 매년 8월 육모를 시작하여 가을에 접어들면서 첫 수확을 시작한다. 다음해 6월까지 수확을 계속한다니 토마토의 생명력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를 알 수 있다. 햇볕에 빨갛게 익은 토마토만을 출하하고 있단다. 때가 이른 것은 그대로 때를 기다리는 느림의 삶을 즐긴다는 것. 출하시기 놓치는 것에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고 한다. 제 때가 되어야 제 맛이 나는데 출하시기에 억지로 맞출 수는 없는 일이라는 것.
가족과 친지들을 불러 과원에서 사과와 토마토 따기 그리고 토마토 치즈샌드, 새우 토마토 버거, 토마토 달걀 샌드위치, 토마토 해물 라이스, 토마토소스 떡볶기, 토마토 샐러드 라이스 등 70여 가지가 넘는 다양한 요리법도 일러준다. 가족과 손녀가 찾아오면 비타민C가 많아 주스, 케첩 등으로 만들어주기도 한다.
수확기뿐만 아니라 종자를 심은 지 두 달 정도 되면 꽃이 피기 시작하는데 그 꽃이 너무나 아름다워 가족들을 불러 사진도 찍고 자연 속에서 그동안 못 다 나눈 즐거운 대화 시간을 갖곤 한다. 사진 전문가이기도 한 그이의 아들 민병현씨(대구 미래대 교수)는 “꽃이 필 때도 아름답지만 한달 정도 지나면 이곳 농장이 토마토 열매와 함께 각종 야생화 열매도 주렁주렁 열려 참 아름다운 산골 풍경을 연출합니다. 그 아름다운 모습을 보기 위해 가족들과 자주 이곳을 찾아오곤 합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지리산 산골에서 자연과 함께 하는 일만으로도 더없는 행복을 느낀다던 그이와 그이 아들 민병현 교수. 부전자전인가. 자연에 빠져 사는 일에 매력을 느낀다니. 농촌지도소에서 30여년의 세월을 보내고 남은 삶을 그이가 그토록 찾아 떠돌던 농사꾼의 모습으로 돌아가 가족들과 함께 느릿느릿 사는 일이 무엇인지를 농사를 통해 깨닫는다는 노년의 농사꾼. 그이는 느릿느릿 지고 떠오르는 해와 함께 들판으로 나가고 돌아오기를 반복한다. 집게발을 느릿느릿 내밀며 사는 ‘맨발’의 농사꾼처럼 말이다.
그런 지리산 민초들의 삶을 눈여겨보면서 백두대간을 오르내리며 시를 쓴 ‘지리산의 시인’ 이성부의 시 한편이 불현듯 스쳐 지났다. “살아갈수록 버릴 것이 많아진다/예전에 잘 간직했던 것들을 버리게 된다/하나씩 둘씩 또는 한꺼번에/버려가는 일이 개운하다/내 마음의 쓰레기도 그때 그때/산에 들어가면 모두 사라진다/버리고 사라지는 것들이 있던 자리에/살며시 들어와 앉은 이 기쁨!” - (이성부, ‘내가 걷는 백두대간ㅡ기쁨’ 전문)
글․사진: 박상건(시인. 계간 섬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