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을 찾아서⑩
나희덕 시인의 찬비 내리고 어두워진 날들의 초상
고아원에서 자라 젊은 날부터 슬프고 애틋한 날들을 시로 노래하는 시인
나희덕 시인을 만나러 가던 광주에는 겨울비가 내리고 있었다. 무등산 자락을 깔고 앉은 조선대학 캠퍼스 마른 대지와 나뒹구는 플라타너스 잎들이 뜨거운 입김을 뿜어내고 있었다. 나 시인의 시 몇 구절이 언뜻 스쳤다. "뜨거운 대지가 몸을 식히는 소리며/바람이 푸른 빛으로 지나가는 소리며", "바람에 불려가는 저 잎새 끝에도/온기는 남아 있어/생명의 물기 한점 흐르고 있어"라는. 지금은 그런 흔들리는 것들과 젖어드는 것들로 포근한 겨울 캠퍼스. 안으로 뜨거워지는 겨울 광주에서 최루탄 세대인 그이의 연구실은 아니러닉하게도 518호였다. 광주와 인연을 맺은 것은 봄 학기부터.
그에게의 처음의 광주는 막연히 역사 속의 강하고 두렵고 부담 많은 땅이었단다. 시간이 흐를수록 따뜻한 도시로 다가온 광주는 이제 시와 삶이 체화되는 곳이다. 어느새 예향 빛고을 사람이 되어 버린 그이는 틈틈이 학교 뒷산 무등산을 오르며 시름도 풀고 시심도 건져 올리곤 한단다. 그러면서 신작시 한 편을 컴퓨터에서 꺼내 보여주었다.
"동쪽 창으로 멀리 보이던 無等/갈매빛 눈매는 성글고 그윽하였으나/그 기억의 분화구를 들여다 보기가 두려워/한 번도 가까이 가지 못했다/너무도 큰 죽음을 보아버린 눈동자가/저리도 평화로울 수 있다니,/진물 흐르는 가슴이 저리도 푸르다니,/그러나 오늘은 그가 먹구름 속에 들어계셨다"("그는 먹구름 속에 들어 계셨다" 중에서)
*홀로 창작훈련을 하며 일군 독특한 시세계
그이에게도 무등산의 의미는 남달랐던 모양이다. "가난이야 한낱 남루에 지나지 않는다"는 서정주 시인의 무등을 보며를 시작으로 김현승, 문병란, 이성부, 송수권, 정일근에 이르기까지 여러 시인들이 평등, 신념, 긍지의 산으로 묘사한 무등산. 나희덕 시인에게 무등산은 성처 입은 짐승처럼 잠이 들면 조금씩 내려와 그이의 잠자리를 지키는 내유외강의 포근한 산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 시에서 풍기듯이 나희덕 시인의 시는 늘 튼실한 영혼의 언어들이 피라미떼처럼 잔잔하게 물살을 가르는 그런 푸르고 상큼한 가락과 이미지로 그려진다. 그런 시의 생명력이 시의 정직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이끌어내고 있다. 거기에 특유의 따뜻하고 담백한 인상까지 더해져 시집을 든 사람들은 편안한 느낌을 받게 한다. 그는 조금 특이한 점이 있었다.
여느 시인들이 습작 시절에 앞서간 시인들의 작품을 반복적으로 베끼면서 볼펜을 쥔 손마디에 굳은살이 박힌 것을 이르는 소위 펜혹의 추억도 없다고 했다. 혼자서 작품을 읽고 익히면서 자기만의 창작 훈련을 해온 것. 연세대 국문과 시절 커리큘럼에서 방법론 강의를 들었지만 그것이 창작의 문제를 다 해결해주지는 못했다. 결국 스스로 개척해온 것. 그 과정이 불행 중 다행으로 독창적인 작품을 양산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이런 시 쓰기는 남이 따라하기 힘든 나희덕식 정형화라는 단점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일사불란한 시의 틀에 맞춰 반복적으로 언어적 유희를 일삼으면서 비롯되는 시의 신선도나 신뢰도를 떨어뜨리는 여타 시들과는 구분된다.
어쨌든 이런 독특하고 상큼한 시의 색채가 신춘문예 등 작가 지망생들에게는 시 창작 교과서로 큰 호응을 받고 있는 터이다. 색다른 틀도 틀이지만 그 틀 속에 들어 있는 시어의 힘과 진솔성이 독자들에게 감동을 배가시켜 주고 있다. 그러나 가장 큰 감동은 체험에서 비롯됐다는 사실이다. 아주 앳되어 보이는 이미지와는 달리 어릴 적부터 퍽 쓰디쓴 시간의 거리를 거닐어 온 나희덕 시인.
*보육원에서 성장기 보내고, 아버지는 필경사 어머니는 보육원 총무
그이는 66년 충남 논산 연무대 에덴원이라는 보육원에서 태어났다. 고아 아닌 고아로서 말이다. 아버지는 회사에서 결재서류 서식 등을 의뢰 받아 밤새도록 철필을 긁어 글씨를 쓰던 필경사였다. 청년시절에는 종교 이상주의를 꿈꾸던 교회 종지기였다. 순수 신앙공동체를 꿈꾸었고 함석헌 선생의 글들에 매료되었던 분이었다. 아버지는 신앙 공동체에서 어머니를 만나 결혼했다. 어머니는 친지가 운영하는 보육원 총무 일을 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그이도 고아 아닌 고아로 이곳에서 태어나 열살 때까지 자랐다. 서울 면목동으로 이사와 스무 살 처녀 때까지 어머니 천직을 따라 애향원이라는 보육원에서 성장했다. 부모는 있었지만 부모 없는 외로운 아이들과 함께 공동체적 분위기에서 젖어갔다. 자신의 끼를 발산하고 투정 부리던 시절도 생략된 채 부모 없는 아이들과 똑 같이 밥 먹고 옷 입으며 지극히 평등한(?) 시절을 보냈다. 또래의 마음을 헤아리면서 생활하고 감정을 절제하는 법까지 터득했다. 너무 일찍 철이 들어버린 소녀 나희덕. 소녀는 유달리 예뻤다. 그래서 양자나 양녀를 구하려 온 사람들에게 늘 먼저 지목 받곤 했다. 그 때마다 부모님은 소녀를 숨기곤 했다. 그럴 때마다 부모와 그이가 불편하고 불안했던 것은 다른 아이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타인을 향한 생각뿐이었다. 또래들을 생각하는 마음은 아직도 깊고 커서 그 때의 일들을 시의 소재로 쓰지 않고 있을 정도이다. 행여 친구들에게 마음의 상처를 줄까봐서 말이다.
그러나 때로는 울적했고 그 울타리를 벗어나고 싶을 때도 있었다.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 어린 나이였을 게다. 생활 환경과 풋풋하고 높은 꿈을 꾸며 살던 시절과의 거리에서 오는 정신적 혼란을 겪었다. 어느 가을날 보육원을 나서 노을 길을 따라 혼자 걷던 적이 있다. 툭 뚫린 여러 갈래의 길이 보였다. 지금 생각하면 그 길이 호남고속도로 인터체인지였다. 보육원으로 돌아와 혼이 났던 소녀는 그네를 뛰며 마음을 달래곤 했다. 그 때의 기억을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산 너머 고운 노을을 보려고/그네를 힘차게 차고 올라 발을 굴렀지" 그리고는 "아름다움에 취해 땅끝을 찾아갔지/그건 아마도 끝이 아니었을지 몰라"라고.
그 시절을 거치면서 남루한 생활도 생활이지만 아버지에 대한 사랑 또한 애틋했다. 그 사랑이 절절하게 그려진 시가 누에의 방이다.
"가리방 긁는 소리가 밤새 들리던 밤/목에 둘렀던 수건을 감아 뜨거운 전구알을 갈던 모습이며/쥐가 난 다리를 뻗어서 두드리던 모습이며/전구 위에 씌웠던 종이갓이 검게 타 들어가던 모습이며/자줏빛으로 죽어가던 손마디와 팔꿈치를 문지르던 모습이며/내가 반쯤 뜬 눈으로 보고 있었다는 것을/아버지는 알고 계셨을까 그 방을 벗어나고 싶어했다는 것을"
희미한 백열등 아래서 가리방(철필)으로 긁어가며 대신 글을 써주는 게 생업이었던 아버지는 좁은 방에서 뒤척이는 식솔들의 잠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그 시절 곳간이나 헛간에서 쓰던 아스라한 십오 촉 불빛에 기대어 일을 했다. 그나마 종이와 수건으로 전구를 감싼 채 눈을 부벼가며, 손마디와 팔꿈치를 문질러 가며 밤을 지샜다. 그 모습을 훔쳐보고 가슴 아파하는 큰딸, 한편으로 가슴이 저렸고 한편으로는 이런 삶으로부터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아버지는 본디 글을 쓰고 싶어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딸이 법대에 가서 아버지의 못 다한 삶을 보상하여 주길 바랬다. 우리시대 모든 아버지가 그랬듯이.
그러나 딸은 시인이 되었다. 아버지가 가고 싶어하던 길을 딸이 시인의 이름으로 간 것이다. 그것도 남루한 가난을 가난인 채 울러 매고 운명적으로 걷는 시인 말이다.
*가슴 아픈 대학시절, 삶의 체험에서 우러나는 글들 각광
그이가 처음 문학과 인연을 맺은 것은 중3 때의 일이다. 선생님 권유로 백일장에 나가 상을 받으면서였다. 고등학교 때는 문예반 활동에 푹 빠졌고 방학이면 종로서적이 바로 도서관이었다. 아침 일찍부터 종로서적으로 등교(?)하기를 되풀이했다. 저녁이 오도록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김춘수 박재삼 김수영 강은교 시인 등의 시집과 세계시인선을 읽었다.
대학에 입학하자 최루탄, 돌멩이들이 기다렸다. 그 시절 이녁은 글쓰기에는 너무나 평범한 학생이라고 생각했다. 그이의 꿈은 학자였다. 그러나 80년대 캠퍼스 상황은 그리 쉽게 놔두지 않았다. 한 때 사회과학 동아리에서 활동한 적도 있었지만 2학년 때 문학회로 옮겼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그 때 돌 던지고 최루탄을 덮어 쓴 채 분노하고 남들처럼 돌멩이를 마음껏 던져보지 못했던 일, 어깨에 어깨를 걸고 거리로 뛰쳐나가 보지 못한 일들이 빚으로 남아있다고 말했다.
"움켜쥐고 살아온 손바닥을/가만히 내려놓고 펴보는 날이 있네/지나온 강물처럼 손금을 들여다보는/그런 날이 있네/그러면 내 스무 살 때 쥐어진 돌 하나/어디로도 굴러가지 못하고/아직 그 안에 남아 있는 걸 보네//가투 장소가 적힌 쪽지를 처음 받아들던 날/그건 종이가 아니라 뜨거운 돌이었네/누구에도 그 돌 끝내 던지지 못했네/한번도 뜨겁게 끌어안지 못한 이십대/화상마저 늙어가기 시작한 삼십대/던지지 못한 그 돌/오래된 질문처럼 내 손에 박혀 있네"(뜨거운 돌 중에서)
80년대 대학 시절은 시대적 아픔 못지 않게 개인적 고통도 깊고 질긴 것이었다. 다섯 개의 아르바이트까지 해가며 학비를 벌어야 했고 대학을 다니며 가족까지 부양했다. 집안의 종교적 분위기와 겹쳐 정신적 갈등을 견뎌내기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수도원, 기도원 생활을 하기도 했지만, 결국 모든 운명이나 숙명이라는 것이 스스로 깨닫고 헤쳐나가야 한다는 것을 확인했을 뿐이다. 그러나 그런 젊은 날의 아픔과 갈등이 결국은 시의 불꽃을 긋는 큰 전기를 만들어 주었다. 삶의 연륜에 비해 버겁기만 했던 특이한 가족사와 사회적 격랑을 한 몸에 끌어안고 오갔던 나희덕 시인.
그런 삶의 편린들이 마침내 가슴속에서 시로 우러나오고 있다. 그것이 시인 나희덕의 작품의 특징이기도 하다. 아무리 잘 나가는 시인이라도 한 생애에 대표작은 두어 작품에 불과하다는 말이 있다. 그런데 지금 그이는 가래떡을 뽑아내듯이 희고 고운 시편들을 쏟아내고 있다. 꺼이꺼이 울다 지칠 때마다 속울음으로 꽉꽉 눌러 죽인 울음들을 비로소 터뜨리듯이 말이다. 연이은 문학상 수상 소식은 그런 질곡의 시간들이 강물처럼 카타르시스화 되는 모습이다. 최근 김수영 문학상에 이어, 김달진 문학상, 현대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한동안 그렇게 문단의 주목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캠퍼스에서 못 던진 돌멩이 대신에 차돌처럼 단단한 시적 토대를 만들어 가는 나희덕 시인. 쉬이 울지 않고 쉬이 언어화하지 않으면서 절제되고 안으로 굳어진 의식의 씨알들이 상상력을 타고 시의 대지에서 시나브로 피어나고 있다. 그것은 나름의 창작 원칙을 지키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시라는 것은 구체적이고 현실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시의 소재를 착상하면 안에서 우러나올 때까지 기다린다. 마음 속에 오래도록 간직해 두는 편이다. 생감이 홍시가 될 까지. 홍시감이 찔근찔근한 곶감이 다 되도록, 시상이 영혼과 함께 익어가 영혼의 언어로 발효될 때에야 작품을 발표한다. 시란 삶과 일심동체라고 믿는다. 삶이란 것이 세워 둔 계획표처럼 진행되는 것이 아니듯이 시 역시 방향을 정해 놓고 만드는 것이 나리라고 믿는다. 하루 하루 열정을 다하는 삶이듯이 시에 있어서도 그 어떤 의도성을 배제한다.
한동안 시간을 내어 그 시가 걸어온 뒤안길을 바라보면 이녁이 걸어온 길이 보인다. 그것이 바로 이녁의 인생 길이다. 걸어온 길, 흘러온 그 강물만큼 한 흐름을 바라보는 삶의 관조 앞에서 시는 신성할 수밖에 없다. 시인은 경건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 지, 시가 이야기해 주고 시가 내 마음의 갈피를 갈무리해 주는 삶. 그것이 그이와 그이 작품의 일체화가 아닐런지.
*어두운 삶을 밝고 맑은 소리로 풀어내는 시인
그이를 인터뷰하러 간 날은 때마침 안도현 시인의 특강이 있는 날이었다. 수업이 끝나고 학교 앞 메종이라는 호프집에서 뒷풀이가 있었다. 학생들 질문이 쏟아졌다. 백일장 특차생으로 입학한 소위 백일장 킬러 등 여러 문학도들이 있었다. 그 자리에서 나희덕 교수는 이런 답변을 했었다.
"글은 무엇을 확인해 주는 것이 아니다. 읽어주고 보여주는 것도 아니다. 충족감이다. 스스로의 만족이다. 외적인 것을 기대하면 스스로 소외되고 실망한다. 성적은 몇 등이라고 점수를 매겨주지만 문학은 그런 것이 아니다. 상을 위해 상금을 위해 백일장에 나가고 그런 성적에 얽매이면 바람직하지 못하다. 글을 쓰는 업으로 살아야 한다" 라고.
그렇다. 문학은 그런 것이다. 그런 문학가의 작품이 아름답다. 쓰고 차디찬 시대의 한복판을 지나쳐 온 그이는 어려운 고개를 넘으면서도 그런 시를 쓰기 위해 늘 전업의 길을 꿈꿨다. 대학 졸업 후 생활이 어려워 교사를 택했고 해당 학내 복잡한 문제에다 전교조 창립 문제 등으로 골치가 아팠던 시절, 아이를 키우는 엄마이기도 했다. 이중삼중의 고통이 뒤따랐다.
한 때 방송작가 일도 했지만 피폐한 자신과의 싸움을 위해 전업의 길을 걷고자 했던 것. 늘 그랬던 것처럼 학비 대책도 없이 대학원에 진학했다. 생활이 나아진 것이 없었지만 장애물을 피해가려는 마음은 손끝만치도 없었다. 생업으로써 일주일에 무려 20시간을 뛰어다니던 시간강사 시절도 거쳤다. 본디 학자가 되는 것이 꿈이었던 그이는 지금, 이제 그 길을 걷고 있다. 꿈꾸는 무등산에 등 기대고 삶도 학문도 푸르게 푸르게 짙어가고 있다. 강사시절보다 강의 부담이 없어 조금은 쉼 호흡을 하면서 걸을 수 있게 됨에 감사한다.
그렇다고 시간과 생활이 넉넉한 것만도 아니다. 하지만 지금 이렇게 꿈꾸는 세상이 아름답고 그런 세상과 아름다운 동행에 만족한다. 96년 3년간 머물렀던 진명여고를 떠나면서 학생들에게 마지막 인사말로 던져준 말이 있다. "습관으로서가 아니라, 매순간 새로운 충격과 활기 속에 살아가십시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스승으로 삼아 열심히 배우십시오". 9년간 교사 생활을 하며 갖고 있던 그 생각은 대학 강단에 서서도 변함이 없다.
배추벌레 한 마리가 배추 속에 갇혀 못 나오면 어떡하나를 걱정해 배추를 동여매지도 못하는 사람, 흩어지는 잔디씨에도 그림자는 있다고 노래한 시인, 자연에 놓인 그 자체를 하찮다고 하더라도 인정하고픈 사람, 그런 눈높이 사랑과 나눔 정신, 삶의 지혜들에서 길러내 고스란히 시로 쓰는 시인이 바로 나희덕 시인이다.
그런 삶의 오솔길이 아름다운 것은 달려온 젊은 날들이 깡그리 어둠에 갇혀 있었음에도 늘 밝음을 지향하며 노래하는 시인의 정신 때문이다. 쉼 없이 뒤척이고 소리치며 밀려온 파도가 밤새 조약돌을 들이치고 마침내 그 조약돌 사이로 스며드는 화해와 포용의 아침을 맞는 것처럼 말이다. 그것이 자연의 이치이다. 그래서 해조음은 아름다운 것이고 젊은 날 핏줄 선 기개만 불거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네 부뜨막의 연탄불 기운으로 다가서는 시의 매력은 아름다운 것이다.
그렇게 시로써 우리네 겨울밤을 데워주는 그이는 이렇게 말했다. "어둠도 시에 들어오면 어둠만은 아닌 게 되는지, 때로 눈부시고 때로 감미롭기도 했죠. 그런 암전(暗電)에 대한 갈망이 이 저물녘의 시들을 낳았나 봐요. 어두워진다는 것, 그것은 스스로의 삶을 밝히려는 내 나름의 방식이자 안간힘이었던 셈입니다". 어둠이 빛을 찾아 몸부림치는 사이에 빛이 어둠에 스며드는 인생의 반전 같은 것. 그래서 세상은 살만한 것이 아닐까. 빛과 어둠의 사이좋은 조화. 그렇게 구체적인 체험이 깃든 시이기에 더욱 실감을 더해준다.
거기에 서정적 리듬을 깔면서 독자의 가슴으로 후벼 든다. "숨을수록 햇빛은 더 크게 소리쳤다", "바람에 눈이 찔린 나무", "아주 먼 데서 온 바람이 숲을 건드리자", "시들기 직전의 꽃들이 내지르는 향기" 등처럼 자연을 묘사하되 힘없이 주저앉지는 않고 톡톡 쏘는 경쾌하고 상큼한 메시지가 들어있다. 건강한 생명력이 일렁인다.
그런 일면을 잘 보여준 시가 그 복숭아나무 곁으로라는 작품이다. 복숭아나무 여러 겹과 인간의 여러 마음을 대비시켰다. 너무 여러 겹의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다가서기 싫다고 우화적으로 노래하고 있다. 그러나 시인은 이내 편견을 버리고 복숭아나무 그늘 아래서 깨달음의 저녁을 맞고 서 있다. 새해를 맞는 우리 모두에게 던져주는 삶의 메시지일지도 모른다.
너무도 여러 겹의 마음을 가진
그 복숭아나무 곁으로
나는 왠지 가까이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흰꽃과 분홍빛을 나란히 피우고 서 있는 그 나무는 아마
사람이 앉지 못할 그늘을 가졌을 거라고
멀리로 멀리로만 지나쳤을 뿐입니다
흰꽃과 분홍꽃 사이에 수천의 빛깔이 있다는 것을
나는 그 나무를 보고 멀리서 알았습니다
눈부셔 눈부셔 알았습니다
피우고 싶은 꽃빛이 너무 많은 그 나무는
그래서 외로웠을 것이지만 외로운 줄도 몰랐을 것입니다
그 여러겹의 마음을 읽는 데 참 오래 걸렸습니다
흩어진 꽃잎들 어디 먼 데 닿았을 무렵
조금은 심심한 얼굴을 하고 있는 그 복숭아나무 그늘에서
가만히 들었습니다 저녁이 오는 소리를
(그 복숭아나무 곁으로 전문)
■ 나희덕 시인은........................................
1966년 충남 논산군 연무읍에서 출생, 연세대 국문과·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8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창현고·진영여고를 국어교사를 거쳐 현재 조선대 국문과 교수로 있다.
시집으로 "뿌리에게",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그곳이 멀지 않다", "어두워진다는 것", 산문집으로 "반 통의 물" 등이 있다. 김수영문학상, 김달진문학상, 현대문학상 등을 수상했으며 시힘 동인으로 활동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