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탐방 ⑨치열한 역사현장을 온몸으로 부대껴 온 방랑시인
"생애의 절반쯤은/나그네였다". 시집 '남과 북' 첫 장에 실린 서시 저녁 첫 구절이다. 그랬다. 고은 시인은 생애의 절반, 아니 칠십 평생이 길손처럼 흘러왔다. 김승희 시인 표현대로 "우리 당대에 가장 이름 붙이기 어려운, 이름 붙일 수 없는, 명명불가한 에너지의 한 현상"으로 고은 시인은 다가선다. 60년대 허무주의 괴수, 그로테스크한 악마주의자, 연이은 자살 미수, 유미주의자, 청진동 무교동 술집 골목에서의 현란한 스캔들의 극치. 60년대 여대생들에게 성(聖)고은으로 불렸고, 남도 여기저기서 가짜 고은이 출몰했을 정도로 고은 신드롬은 대단했다.
환속을 했으면서도 여전히 논리를 초월하고 신비주의로 채색된 시인은 '남과 북' 시집 역시 지난 99년 버클리대학에 있을 때 꿈속에서 만난 시상을 정리해 7월 한 달간 무려 135편의 시를 쏟아내 한 권의 시집으로 묶었다. 그렇게 꿈을 먹고사는 시인은 현재 150여권의 저서를 갖고 있다. 이제 몇 권 째인지 세는 것도 포기한 상태라며 너털웃음을 짓는 그이는 맘만 먹으면 하루에 원고지 200장 정도를 써 갈기는 괴력과 여력의 소유자이다.
하얀 원고지만 보면 줄창 설레인다는 정열의 화신, 다작의 상징. 그이는 말한다. "시인이란 무릇 시를 통해 끊임없이 변모하는 세계를 노래하기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라고. 그렇게 마침표 없는 시, 거침없는 강물처럼 흘러왔고 흘러가고 있는 한 시대의 풍운아, 이 시대의 방랑시인 고은.
* 어릴 적부터 떠도는 일에 익숙해진 시인의 기구한 운명
그이는 1933년 전북 옥구군 용둔부락에서 태어났다. 다섯 살 때 이웃에 사는 머슴에게 글자 몇 개를 배워 책을 읽어버림으로써 신동으로 불리기도 했다. 월반을 거쳐 군산중학에 수석입학했던 그이는 일본 교장이 장차 무엇이 되겠느냐고 묻자, 천황이 되겠다고 대답해 퇴학 처분을 간신히 넘긴 일화도 있다.
어릴 적부터 미술반으로 그림 그리기에 능했고 화가가 꿈이었던 그이는 그림을 그리면 비행기, 배, 기차 등 떠나는 것만 그려 아버지가 "넌 왜 늘 떠나는 것만 그리느냐?"고 해서 기와집이나 초가집을 어쩔 수 없이 그리기도 했단다. 그런 그이가 미룡 초등학교(지금 군산대 자리) 시절 누군가 길에 흘리고 간 '한하운 시초'를 주워 밤을 새워 읽으며 울었던 적이 있다. "가도 가도 황톳길..."이라는 구절은 소년의 심장에 주술처럼 와 닿았다. "그래 나도 한하운처럼 문둥병에 걸려야겠다, 시인이 되어야겠다"고 마음 먹은 게 그 시절이다.
10리 황톳길을 걸어서 학교와 집을 오가며 마주한 그 호젓한 시골길은 그이의 유일한 친구였다. 어쩌다 만난 소달구지, 장꾼들 말고는 텅 빈 고향 길이었다. 시골 하늘에 수탉 홰치는 소리, 거미줄에 매달린 이슬 보석, 대낮의 갑작스런 적막, 밥 짓는 저녁 연기... 이런 풍경들이 일찍부터 그이의 감수성을 자극했고 먼훗날 시의 밀알이 되었다. 저녁은 늘 슬프고 숭고한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그이 시에는 유난히 저녁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한다. 그리고 한국전쟁이 터졌다. 더 이상 호젓한 황톳길 대신 이녁 또래 인민군 병사와 민청 등 붉은 완장에 익숙해져 갔다.
좌우로 갈려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이데올로기 참상, 마을 청년들 지시에 따라 생매장한 시체들을 짊어지기도 했다. 어린 날부터 제정신일 일수가 없었다. 그래서 근원적으로 그이 시의 본적지는 폐허이고 시의 현주소는 폐허의 기억을 묻은 미완의 역사 현장이었다고 회고한다. 허무에 사로잡힌 시대의 유랑아, 그런 환경에서 바다에 몸을 던지기도 하고 엿장수, 거지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5세 신동답게 최종 학력 군산중 중퇴자로서 중학 교사로 특채돼 영어와 국어를 가르친 일도 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길에서 만난 스님을 따라 출가했던 그이. 법명은 일초(一超), 그의 나이 19세 때의 일이다. 6년 후 효봉 대종사를 은사로 모시고 득도 후 12년간의 참선과 방랑의 세월을 보냈다.
* 떠돌고 울며 가슴으로 노래하는 시와 시인의 삶
정녕 삶은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가는 것이었다. 그러기에 왜 문학을 하느냐?고 묻는 일은 최소한 그이에게 부질없는 짓이다. 어차피 문명은 항해일 터이니까. "두고 온 것 무엇이 있으리요만/무엇인가/두고 온 듯/머물던 자리를 어서어서 털고 일어선다"(두고 온 시)처럼 떠도는 것이 삶이요, 운명이었던 그이의 삶. 그래서 "시는 책과 이론 속에 들어 있는 게 아니라 가슴으로 노래하고 가슴속 울림 그 자체"라 말한다. 그렇게 울어서 시가 되었고 시가 울면서 늘 삭지 않은 열정에 취해서 사람들의 감탄사를 자아내게 하며 고희의 문턱에 이르렀다는 말이다.
두고 온 시간들 속에 방황의 시절이 대부분이었던 그이가 결핵을 앓고 있던 친구를 위하여 폐결핵이라는 시 한 수를 지어준 일이 있었다. 도스토예프스키를 좋아하던 화가 친구였다.
"누님이 와서 이마맡에 앉고/……/기침은 누님의 간음"이라는. "이 시에서 누이는 전설적 누이죠. 이 시는 허구이자 또 하나의 현실이었고 새벽 기침 소리가 유난히 좋았어요. 평론가들은 고은의 누이 콤플렉스라고 지적했지만 그것은 거짓말이었어요." 세월이 흘러 그이가 "나에게 누이는 없었다"고 말하자 평론가들은 당황스러웠다. 어릴 적 외삼촌에게 들은 드넓은 만주 벌판과 그이에게 있어 누이는 밤하늘에 떠 있는 별처럼 달처럼 그 어떤 명상 속의 적막함으로 자리잡은 자기만의 상징적 대상이었던 것이다. 어찌보면 그것은 어린 시절 끝 모를 열망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이녁 건강 진단을 해보니 한쪽 폐가 없다는 말을 들었다. 떠돌고 술 먹고 하는 사이 폐결핵이 찾아왔다가 떠나간 것. 결국 그이가 염원한 허구는 현실로 다가섰던 셈. 또 하나의 에피소드는 폐결핵에 걸린 친구가 이 시를 한국 시인협회에 투고한 바람에 운명적으로 조지훈 시인의 천거를 받아 문단에 데뷔하게 된 것. 그렇게 '시인 고은'이 되었다.
자신의 문학을 "폐허를 떠도는 자의 비가(悲歌)"라며 그래서 "나는 떠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고 규정하는, 그 떠남의 철학은 비움이요 버림이며 잊혀짐이다. 속세를 떠난 그이가 다시 절간을 떠나면서 "떠난 아버지여 늘 살아 있는 스님이여/이제 저는 저대로 따로 동행자 하나 얻어야겠습니다"(송별)라고 노래한 바 있다. 그 떠남의 연속... 그런 떠남 속에 그이가 늘 있었다. 떠남과의 동행이라고나 할까.
사흘을 빈속으로 떠돌며 철길 위에 몸을 눕히고 죽음을 기다린 적이 있었다. 그 때 길을 가던 한 노파가 "여보쇼, 여보쇼...죽고 싶어 환장했소잉"라며 혀를 끌끌 찼다. 그리고 초췌한 한 젊은이를 구해냈다. 그렇게 그이는 환속 후 선(禪)과 사회의 이음새 사이에서 상당한 갈등을 겪었다. 그이 표현대로 "빙빙 겉도는 사회적 사생아였다". 그러다가 다시 자살 충동이 도져 목포에서 제주도로 가는 배를 탔다. 배에서 수없이 술병을 들이키다 쓰러졌다. 뱃고동 소리에 깨어보니 항구였다. 자살을 뜻대로 이루지 못한 그이는 공동묘지에서 4년의 세월을 보냈던 기이한 인물. 그렇게 불면의 밤을 술로 지새웠다. 그렇게 광란의 세월이 흘렀다.
그리고 서울살이...무교동 골목 낙지집에서는 시뻘건 낙지에 곁들인 소주, 나뒹구는 술병들의 추억이 때로는 지나온 삶의 편린으로 다가선다. 그러던 어느 날, 술병 사이에 구겨진 신문 쪼가리에 마주한 청년 전태일 분신 소식, "일꾼(노동자)도 사람이다!"라는 그 외침. 술독에 빠져 지내던 그이에게 가히 큰 충격이었다. 허무는 마침내 투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뜨거운 가슴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당대의 찬란한 역동의 역사와 조우했다.
'광란'은 유신 독재를 시작으로 자유실천문인협회, 한국인권운동협의회, 민주쟁취국민운동본부, 민예총 등 민주화의 열정으로 불꽃이 되어 되살아났다. 이제 그에게 시는 국가보다 높은 것이고 높은 것이기 위하여 쓰는 것으로 다가섰다. 시인으로서 늘 모국어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그이는 80년 초 민족문학작가회의 사무국에서 성명서를 낭독하면서 "즉각 석방하라" 구호를 "당장 내놔라"라는 구어체 표현으로 바꿔 불러 청중을 사로잡기도 했다.
어느 시인에게 편지를 쓰다가 남색 잉크가 떨어져서 빨간 잉크로 편지를 썼다가 그 시인이 빨갱이로 몰릴까봐 편지를 불태워버린 일화도 있다. 그 시절 시인 고은은 문인 주소록에서는 아예 지워질 정도로 공포 시대 가장자리에 있는 핵 폭탄 같은 인물이었다. 물론 피할 도리 없이 결국 감옥의 단골 고객이 되었다. 그 때마다 굴절 없는 초월의 언어들을 화살 삼아 쏘아댔다. "우리 모두 화살이 되어/온몸으로 가자/허공 뚫고/온몸으로 가자/가서는 돌아오지 말자/박혀서/박힌 아픔과 함께 썩어서 돌아오지 말자"('화살').
* 울어야 새 세상이 온다, 감옥에서 구상한 대작 만인보
79년 YH사건 때 국보법 위반으로 감옥에서 한 쪽 귀의 고막이 터져 청각이 마비됐다. 이어 80년 5월 17일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와 동시에 김대중내란음모 사건 주동자로 남한산성 육군교도소 제7호 특별감방에 갇혔다. 창 하나 없는 그 방은 김재규가 사형 직전까지 머물렀던 곳. 또 다시 죽음이라는 단어가 스쳤다. 오로지 이녁에게 향하는 운명의 발자국 소리만을 기다렸다. 그곳은 늘 생각해왔던 무덤 같은 것이었다.
감옥에서 유일한 탈출구는 옛일을 회고하는 일이었다. 만에 하나 살아나간다면 지나간 길목에서 마주한 이들을 시로 써서 되살리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뿐이었다. "이 오랜 땅에서/서로 헤어진다는 것은 확대이다/어느 누구도 저 혼자일 수 없는/끝없는 삶의 행렬이여 내일이여//오 사람은 사람 속에서만 사람이다 세계이다"('만인보' 서시).
대작 만인보의 구상은 그렇게 시작됐다. 시 만인보는 만인의 삶의 족보로 머슴, 구두쇠, 게으름뱅이, 욕쟁이, 노름꾼, 창녀, 배고파서 하루 이틀 꼬박 굶고 물배만 채우던 고향 사람들, 의병, 인민군 이야기 등 민중의 역사이다.
그런 생각 속에서 고문으로 짓이겨지는 시간들은 계속됐다. 생각해보면 맵고 짜고 독했던 낙지에 소주 맛, 통행금지 사이렌이 울리면 그냥 술 탁자에 퍼 질러 자다가 시멘트 바닥에 떨어져 지새우던 그 밤의 저력(?)이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서 견뎌내게 한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군법회의에서는 종신형을 선고받고, 6년의 세월이 흘러 사면, 석방되었다.
그리고 만인보는 시대의 고통을 함께 짊어지며 온 실천적 지식인의 노래로 이어져 또 하나의 근현대사라는 평가를 받으며 계속 되살아나고 있다.
"나는 이 기간 20년의 시련과 부자유에도 불구하고 가장 축제적이고 가장 자유로웠다고 말 할 수 있어요. 아마도 이 기간의 내 시와 삶은 총체적으로 규정되어도 좋다고 여겨요". 그런 그이는 82년 특사로 풀려 나와 다음해 안병무 박사댁에서 중앙대 이상화교수와 결혼식을 올렸고, 이문영 교수가 물색해 놓았던 지금의 안성 마정리 대림동산 장미골에 둥지를 틀었다.
그렇게 20여 년째를 이곳에서 살고 있다. 이곳은 공동묘지가 있던 자리로 허무, 절망, 죽음이라는 그이만의 심미적 탐닉의 대상으로 안성맞춤이다. 그이가 죽음을 택했던 그 시절의 아픔과 함께 다시 태어나 자리를 잡은 행복한 터전이다. 이곳에서 만인보와 백두산 대작이 나왔다. 백두산은 5만 2,000행, 7권에 이르는 항일무장투쟁에 몸바친 가족 2대의 삶과 투쟁을 그린 대 서사시이다.
그이는 민주화가 어느 정도 진척되던 최근에는 현대문학 살리기, 언론개혁 운동, 미 공군 폭격 연습장으로 만신창이가 된 매향리 사격 철조망 주변에 '희망의 매화나무심기'운동, 동강 살리기, 남북정상회담 방북단 참가 등 시민운동과 통일운동을 새로운 각도에서 참여하고 주도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하여튼 그렇게 하염없이 헤쳐 온 길은 그 자체로 그이 삶의 심벌이기도 했다. 그 길은 그대로 시의 발상지였고 삶의 무기였다. 허무가 소멸하는 길 위에는 강렬한 역사 의지가 타올랐다. 그래서 죽음이나 묘지의 개념은 삶의 끝이 아니라 삶의 연장이었다. 모든 공간이 어둠과 밝음의 프리즘으로 다가서는 창이었다. 어둠이 눈발을 불러모으고 다시 눈이 어둠을 지우듯이.
꽃이 지고 씨알이 겨울을 통과하여 움트고 꽃피어 집필실 앞마당 담장을 타오르듯이, 줄기에 줄기로 어깨동무하며 나아가듯이 그런 굴곡의 시대를 거쳐왔다. 자연의 섭리에 늘 주목해온 그이는 멋드러진 앞마당도 앞마당이지만 집 앞 호숫가를 거닐면서 수심 아래 가득 모인 시심을 건져 올려 보는 일도 빼놓을 수 없다고 말한다. 강연이 많은 요즈음 집에서 15분 정도 걸어서 대림동산 입구에서 버스를 타고 남부터미널까지 오고가지만 나들이가 없는 날이면 창을 통해 밖에서 눈 오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어 무척 좋다고 말했다.
선적 풍류 기질이라고나 할까. 그런 시간은 또한 가슴으로 자연과 맞닿아 함께 속으로 우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래서 말한다. "시인이라면 모름지기 울음이 속 깊게 들어 있어야 해요. 우리 나라에서는 새가 노래한다 라고 하지 않고 새가 운다고 하지요. 후르시초프 회상록을 보면 숲 속에 가서 실컷 울고 오면 훨씬 나을텐데, 울어야 할 숲조차 없구나하는 데서 크게 공감했어요.
울음이란 이처럼 인간의 맺히고 흐트러진 삶을 정화시켜줘요. 그렇게 울고 나면 새로운 세상으로의 출발이 가능하죠. 실컷 울고 나면 새로운 세상이 펼쳐져서 아! 이 일상을 다시 가야 되겠구나하는 생각이 들곤 하는 거죠"
*술 먹지 않는 요즈음 젊은 시인들을 질책하는 눈물 많은 시인
고은 시인은 눈물이 많은 편이다. 젊은 날 친구 하숙집에 찾아갔다가 등꽃이 흐드러지게 핀 마당에 확 달빛이 쏟아지는 것을 보고 새벽 3시까지 운 적이 있었단다. 다 울고 나니 울음이 말라버릴 정도였다. 친구는 "우리 방에 귀신이 들어서 안 된다며 나를 쫓아내 10년 동안 절교한 적이 있어요". 미당 담론의 당사자였던 그이는 미당 빈소를 찾아가 천장만 올려보다
끝내 눈시울을 붉히고 말았다. 눈물의 화해라고 말해도 무방할까... 최근 그이는 "요즈음 시인들이 너무 술을 마시지 않는다"는 아쉬움을 토로한 적도 있다. 물론 작금의 시들이 가슴에서 터져 나오지 않고 머리에서 짜여져 나오는 문학행위에 대한 질책이었다. 울음 울 수도, 불취의 정신과 정서의 나눔도 없는, 메마른 젊은 시인들에 대한 자기반성, 자기검열을 촉구한 것이다. 그이의 주(酒)철학은 이런 것이다.
"술이란 다음날 고단한 몸과 지독한 환멸을 가져오죠. 그러나 술을 마신다는 것은 몸을 한번 바쳐보는 거죠. 자기를 아끼고 현실로부터 거리를 두는 존재의 계산법이 아니라 자신을 던졌던 낭만주의, 혁명시대의 시인들이 빛나보일 때가 있는 것 아닌가요?"
보들레르 시인도 자신의 시적 영감이 메말라 가는 걸 보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취해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세상의 예술가들이란 분명 술에 빚지고 사는 셈인데, 고은 시인은 두 홉들이 소주 4, 5병을 정도를 마셔야 술기운을 느낀다고 한다. 그러면서 "자고로 시인은 술을 마셔야 경계가 없어지고 마음을 여는 것이야말로 건강의 지름길"이라고 일러준다.
시는 신명의 예술, 그래서 시의 즉흥성 자체가 과학이요 치밀하게 계산된 예술이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그 '계산'은 자연으로의 배설을 의미할 터이다. 환속 한 시인이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여전히 산문(山門)의 기억 한 자락 깔고 있는 듯한 강한 인상을 던져 준 고은 시인.
그런 속세의 탈출 의지가 하버드대학과 버클리대학 객원교수를 지지내며 한 때 한 해 의 3분의 2 이상을 해외에서 보냈던 그이. 노벨문학상 후보이기도 했던 그이는 고희를 맞아 44년간의 문학을 총 정리하여 시, 산문, 자전, 소설, 기행, 평론 등 38권에 이르는 국내 최대 규모의 전집을 출판한 바 있다. 원고지 12만매 분량의 이 전집 전생 연보에서 그이는 스스로 먼 옛날 세습 방랑시인이었고 고백한다.
2002년 10월 30일 출판 기념회에서 그이는 의미있는 화두를 던졌다. "한때 문학과 역사를 동일시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역사로부터 해방되는 문학을, 문학 그 자체로부터도 해방되는 문학을 하고 싶다. 온갖 말들의 껍질을 벗겨내고 뼈와 가시만으로 남고 싶다."라고.
나즈막히 들려준 이야기이지만 이제 노후를 서정의 눈발 흔들리며 그 눈이 죽음을 덮어 묵상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 듯 해 보였다. 마지막으로 수많은 작품 가운데 대표작 하나만 꼽아달라고 하자 '자작나무 숲으로 가서'를 추천했다. 이 시는 원로시인이 걸어온 길, 걸어갈 길을 아스라이 보여주는 자서전적 풍경화이다.
"광혜원 이월마을에서 칠현산 기슭에 이르기 전에/그만 나는 영문 모를 드넓은 자작나무 분지로 접어들었다/누군가가 가라고 내 등을 떠밀었는지 나는 뒤돌아보았다/아무도 없다 다만 눈발에 익숙한 먼 산에 대해서/아무런 상관도 없게 자작나무숲의 벗은 몸들이/이 세상을 정직하게 한다 그렇구나 겨울 나무들만이 타락을 모른다//슬픔에는 거짓이 없다 어찌 삶으로 울지 않은 사람이 있겠느냐/오래오래 우리나라 여자야말로 울음이었다 스스로 달래어온 울음이었다/자작나무는 저희들끼리건만 찾아든 나까지 하나가 된다/누구나 다 여기 오지 못해도 여기에 온 것이나 다름없이/자작나무는 오지 못한 사람 하나하나와도 함께인 양 아름답다//나는 나무와 나뭇가지와 깊은 하늘 속의 우듬지의 떨림을 보며/나 자신에게도 세상에도 우쭐해서 나뭇짐 지게 무겁게 지고 싶었다/아니 이런 추운 곳의 적막으로 태어나는 눈엽이나/삼거리 술집의 삶은 고기처럼 순하고 싶었다/너무나 교조적인 삶이었으므로 미풍에 대해서도 사나웠으므로//얼마만이냐 이런 곳이야말로 우리에게 십여년 만에 강렬한 곳이다/강렬한 이 경건성! 이것은 나 한 사람에게가 아니라/온 세상을 향해 말하는 것을 내 벅찬 가슴은 벌써 알고 있다/사람들도 자기가 모든 낱낱 중의 하나임을 깨달을 때가 온다/나는 어린 시절에 이미 늙어버렸다 여기 와서 나는 또 태어나야 한다/그래서 이제 나는 자작나무의 천부적인 겨울과 함께/깨물어먹고 싶은 어여쁨에 들떠 남의 어린 외동으로 자라난다//나는 광혜원으로 내려가는 길을 등지고 삭풍의 칠현산 험한 길로 서슴없이 지향했다"
('자작나무숲으로 가서' 전문)
■ 고은 시인은 ……
1933년 전북 옥구에서 출생, 군산북중 국어교사, 전등사·해인사 주지, 58년 현대문학으로 문단에 데뷔했다. <불교신문> 창간 초대주필, <동화통신> 부장대우, <문학과 지성> 편집위원, <실천문학> 창간, <시와 사상>편집위원, 미국 하버드대 방문교수, 버클리대 초빙교수, 경기대 국어국문과 교수를 지냈고 현재 민족문학작가회의 상임고문, 세계한민족작가연합 회장을 맡고 있다.
시집으로 해변의 운문집, 새노야, 문의마을에 가서, 부활, 입산, 새벽길, 만인보, 백두산, 조국의 별, 남과 북, 히말라야시편 등, 시선집으로 부활, 고은집, 님의 침묵 등, 소설로 수미산, 화엄경 등, 수필집으로 인간은 슬프려고 태어났다, 한 시대가 가고 있다, 한국의 지식인, 세속의 길 등, 평론집으로 한용운평전,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시와 현실, 역사를 꿈꾼다 등 150여권에 이르는 저서가 있으며 최근 총 38권짜리 고은전집을 출간한 바 있으며, 한국문학상, 한국문학작가상, 만해문학상, 중앙문화대상, 대산문학상, 만해상 시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화제의 책* 시인들의 작업실과 창작무대 취재기를 묶은 책이 나왔습니다. <빈손으로 돌아와 웃다/당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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