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시인탐방-황동규

섬과 문학기행/시인을 찾아서

by 한방울 2004. 2. 21. 08:31

본문

시인탐방 ⑧ 이별과 여행으로 다진 시인의 존재의 가벼움에 대한 40년 창작생활

겨울나무처럼 외롭고 쓸쓸한 삶을 지성으로 노래하는 시인


관악산 곳곳에 낙엽이 지고 있다. 지나간 날들을 그리워하듯 푸른 하늘에 눈빛 몇 점 떨군 채 포물선을 긋는다. 서울대 인문관 2동 3층 황동규 시인 연구실에 들어섰을 때 손 때 묻은 누런 책들이 어지럽게 나뒹굴고 서재의 이 빠진 모습이 이미 짐 정리 중임을 말해준다.

올해 나이 예순 다섯. 그이는 68년부터 몸담았던 이 대학을 6개월 후면 떠난다. 풍장에서처럼 생사의 갈림길은 아닐지라도 긴 세월 정든 교정을 떠나려니 덧없는 세월은 주마등처
럼 스치운다.

봉준이가 운다, 무식하게 무식하게/일자 무식하게, 아 한문만 알았던들/부드럽게 우는 법만알았던들,/왕 뒤에 큰 왕이 있고/큰 왕의 채찍!/마패 없이 거듭 국경을 넘는/저 보마(步馬)의 겨울 안개 아래/부챗살로 갈라지는 땅들/포(砲)들이 얼굴 망가진 아이들처럼 울어/찬 눈에 홀로 볼 비빌 것을 알았던들,/계룡산에 들어 조용히 밭에 목매었으련만./눈이 내린다, 우리가 무심히 건너는 돌다리에/형제의 아버지가 남몰래 앓는 초가 그늘에/귀 기울여보아라, 눈이 내린다, 무심히,/갑갑하게 내려앉은 하늘 아래/무식하게 무식하게.
(삼남(三南)에 내리는 눈 전문)

* 애증의 시대를 노래한 베스트셀러 시인

바야흐로 봉준이처럼 중무장한 가슴으로 신춘문예를 준비하는 계절이다. 그이는 신춘문예 심사를 맡고 있는 중앙문단의 대표적인 시인이기도 하다. 특히, 삼남(三南)에 내리는 눈은 1978년 민음사에서 출간된 이래 지금까지도 7만 권이 넘게 팔린 스테디셀러이다. 많은 신춘문예 준비생과 대학생들의 인기를 차지한 시집이다.

길거리 리어카에서도 장엄한 성우의 목소리에 배경음악이 깔려 나오던 애송시 낭송 테이프 중의 하나이기도 했다. "봉준이가 운다,무식하게 무식하게...."라는 그 성우의 목소리가 군홧발 뒷꿈치에서 튀던 유신시대를 지나 5공화국으로 접어들면서 눈보라치는 겨울과 애증이 얼버무려진 시편은 가슴을 축축이 적셔주기에 충분했다.

우리 나라를 일컫는 삼남의 시린 삶이나 민족적 한(恨)을 노래하고 있는 이 시집 속에는 이런 흐름의 시로 계엄령 속의 눈, 비망기, 전봉준, 태평가 등이 더 있다.

황동규 시인은 1938년 평남 영유군 숙천에서 태어났다. 평양에서 40리 떨어진 대동군 재경 초등학교 1학년 때 해방을 맞았고, 이듬해 가족과 함께 남하했다. 고교시절 마종기 시인과 친하게 어울렸고 교과서 대신 타고르 예이츠 영문시집 읽기에 푹 빠져 지냈다. 그러면서 전교 1, 2등을 놓치지 않았고 서울대 문리대에 수석 입학했으니 수재이자 문재였던 셈. 대학 진학 때 법대나 의대 쪽 보다는 문리대를 원했고 아버지는 "후회하지 않을 길이면 가라" 했다. 일제 말엽 자신도 다른 아이들처럼 히라가나를 가르쳐 달라고 졸랐을 때 아버지가 울던 기억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그이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소나기, 타인의 후예로 유명한 국민작가 황순원 선생의 아들, 그리고 동시대 대표적 지식인이면서 동시에 독자대중을 이끌고 있는 보기 드문 시인이다. 올곧은 인생철학과 처신, 순수 문학정신으로 일관했던 선생의 뜻을 기르기 위해 후학들이 사회장으로 치르자고 했을 때 상주인 황동규 시인은 이를 정중히 거절했었다. 평소 아버지와 비교되는 것을 꺼려했던 그이지만 겸손과 소박함으로 일관한 부친의 세세한 삶의 흐름만은 놓치지 않았던 셈.

부친이 타계하자 언론사의 인터뷰를 거절한 채 홀연히 백령도로 떠났던 그이는 아버지의 삶과 문학 혼을 짤막한 시로 남겼었다. 부동산은 없고, 몇 병의 술과 셔츠 하나, 그리고 웃으시는 사진 한 장뿐이었다는.

준엄했던 그 아버지를 뛰어넘기 위해 죽어라 뛰어 온 날들. 그렇게 대학 1학년 끝 무렵 갓 스무 살에 미당 서정주 시인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했다. 당시 폐허 속에서 명동이나 무교동 술집에서 오징어 명태 혹은 감자국에 소주를 마시며 윤동주 서정주 김수영 엘리어트 시를 섭렵하고 삶과 문학을 외치던 문학 청년시절이었다.

* 죽음 노래한 풍장을 넘어 우주로 관심 돌린 작품 세계로 미당문학상 받아

흐르는 물빛 같은 세월. 등단 당시 스승인 미당의 문학적 업적을 기르는 미당 문학상에 그이가 수상자로 결정됐다. 김현 평론가와 함께 늘 새배 다니던 미당. 친일 어용시비와 별개로 미당 시를 읽고 감동 받은 사람들은 그 감동을 진솔하게, 실존적으로 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이는 미당의 작품의 진정성, 나르시시즘, 토속어와 신라정신 등을 배웠다.

그이는 시란 머리가 아니라 온몸으로 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등단 이후 여러 변모를 거듭해온 시 세계는 이번 미당문학상 수상작 적막한 새소리처럼 풍장을 넘어 삶을 궤적을 뚫고 다시 우주와 내통한다. 예수, 석가, 원효, 니체 등 성(聖)과 인간의 속(俗)이 만나는 공간을 노래한다. 일반 독자들에게 이러한 변모는 급작스럽고 부담된 일임에도 한동안 이러한 시도는 계속 될 것 같다. "늦가을 저녁/산들이 긴 그림자를 거두어들일 때/검불 몇 날리는 바람 속에/목소리 막 지우기 시작하는/적막한 새소리."(적막한 새소리 중에서)처럼 시원(始源)의 노래를 불러제끼면서 말이다.

황동규 시인은 여행벽이 심하기로 널리 알려져 있다. 왜 여행을 좋아하느냐에 대해 논리적으로 간명하게 말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운명적으로 역마살이 붙어 있는 겔까? 여행의 동행자는 시대별로 다르지만 김현 김정웅 김병익 서승해(미당 아들) 김주연 홍신선 김명인 하응백 조정권 김윤배 등 평론가와 시인 그리고 건강이 편치 않을 시기에 아버지와 동행을 들 수 있다.

그이는 어릴 적 경의선의 조그만 역에서 십리쯤 더 들어가야 닿는 간리(間里) 마을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인데도 홀로 험준한 월명산 너머 산골 할아버지 댁을 찾아가다가 길에서 혼난 적이 있었다. 산허리쯤에서 늑대가 쫓아올 때는 농부의 도움으로 화를 면했고 이름 모를 적갈색 짐승이 아무리 돌을 던져도 계속 따라와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내달렸다. 밤중에 아버지가 동네 청년들과 횃불을 들고 와 그이를 찾아내고 크게 혼냈던 기억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1946년 5월 삼팔선이 채 굳어지기 전에 남한으로 내려와
아버지가 교편 잡던 서울 중학교(서울고) 사택에서 살던 때도 집을 벗어나 홀로 이화동, 돈암동, 청량리, 서대문 등을 헤매다가 경희궁 터 사택으로 울며 돌아오던 시절을 잊을 수 없다. 어릴 적부터 여행 벽은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이는 고 2 때부터 본격적인 여행을즐겼던 것으로 기억한다면서 "여행은 일상에 꽉 막힌 숨통을 트게 해줘요. 요즈음엔 여행 다니던 친구들이 저보다 빨리 늙었는지 떠나길 꺼려해 저 또한 여행 횟수가 부쩍 줄었디만요."라고 말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항구에 닿았다. 그런데 배들이 바다를 향해 뛰어갈 준비를 하고 있는 게 아니라 항구를 들여다보고 있는 게 아닌가. 처음으로 배들이 육지 쪽으로 머리를 둔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 동안 생각한 상징의 겉 구조가 벗겨지는 순간이었다. 젊은 날 방황과 막막함의 해방구로 꿈꾸던 시인에게 절망적이었을 터. 탈출의 기회라고는 없을 듯한 하늘에 자유롭게 날고 있는 새들을 마주한 것은 천만다행이었다. 이를 노래하는 시가 기항지 1이다.

"걸어서 항구에 도착했다/길게 부는 한지(寒地)의 바람/바다 앞의 집들을 흔들고/긴 눈 내릴듯/낮게 낮게 비치는 불빛./지전(紙錢)에 그려진 반듯한 그림을/주머니에 구겨 넣고/반쯤 탄 담배를 그림자처럼 꺼버리고/조용한 마음으로/배 있는 데로 내려간다./정박중의 어두운 용골들이/모두 고개를 들고/항구의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어두운 하늘에는 수삼개(數三個)의 눈송이/하늘의 새들이 따르고 있었다." (기항지 1 전문)

1967년에는 여수와 목포 같은 큰 항구에도 버스가 하루에 두 대 정도였다. 어려운 걸음으로 당도했던 작은 포구. 묶인 배들이 항구를 들여다보고 있다는 것은 우리를 막는 삶의 행위가 도처에 있다는 사실을 환기시켜 주기도 한다. 항해에 지친 배와 일상에 지친 시인의 모습이 오버랩된다.

그 쓸쓸함을 어루만지듯 불빛도 낮게 드리우고 눈이 내린다. 이런 사실적 풍경화를 그린 시가 겨울 항구에서, 낙법, 노래자이의 노래놀이, 망초꽃 등이다.

* 여행에서 시의 모티브 얻고, 14년간 전국 떠돌며 풍장 집필

1982년 가을 또 다시 끝이 보일 것 같지 않은 긴 여행길에 나섰다. 그렇게 10여 년간 서해와 남해 전국을 떠돌았다. 사십대 중반에 자신도 모르게 죽음 길들이 충동이 일어 목적지 없는 여행을 거듭했다. 일상을 떠나는 여행을 통해 삶에 대한 깨달음과 깨달음이 낳은 거듭남을 보았다. 특히 군대시절 자신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고 이화령 고개를 함께 넘기도 했던 친구 김정강의 죽음(자살)은 삶과 죽음의 문제에 더 집요하게 만들었다.

그 충격에서 벗어나면서 죽음이라는 것이 극히 일상적이라는 인식도 했다. 또한 부친상을 당하면서 인생관이 조금씩 바뀌었다. 부친은 잠들다가 운명한 탓에 유언도 없고 임종도 못하고 몇 시에 돌아갔는지도 몰라 참 허망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40대에 연작시 풍장을 썼다. 풍장은 섬 지방에서 아들이 보름이고 스무날이고 고기잡이 나갔을 때 부모가 세상을 뜨면 매장하지 않고 그가 돌아와 얼굴이라도 볼 수 있도록 한 일종의 의식 장치. 냉동시설이 없던 시절 땅에 묻지 않고 조그만 무인도에 초막을 짓고 풀로 덮었다가 나중에 땅에 묻는 것이다. 대학시절 보길도 선유도 등지에서 이 풍습에 보고 충격을 받았고 곧 풍장의 모티브가 되었다. 82년부터 14년 동안 그렇게 70편에 이르는 풍장 연작시를 집필하여 우리 문학사에 한 획을 그었는데, 죽음을 노래하면서 허무를 이야기하지 않고 서정성을 잃지 않았다는 점에서 더욱 좋은 평가를 받았다.

폴 발레리가 해변의 묘지에서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고 노래한 것처럼, 죽음이후 삶을 일깨우는 싱싱한 바
람소리로 가득한 작품이라는 평이었다. 연작시 가운데 그 첫 작품은 이랬다. "내 세상 뜨면 풍장시켜 다오/섭섭하지 않게/옷은 입은 채로 전자시계는 가는 채로/손목에 달아 놓고/아주 춥지는 않게/가죽 가방에 넣어 전세 택시에 싣고/군산에 가서/검색이 심하면/곰소쯤에 가서/통통배에 옮겨 실어 다오"

풍화작용에 이녁을 맡겨달라는, 상식을 뛰어 넘어 죽음을 넘어 자연과의 함께 하고 싶은 마음. 연작시를 쓰는 동안 친구인 김현 평론가, 황인철 변호사의 죽음을 보았기에 한동안 죽음의 침묵에 갇히기도 했다. 그러나 막스 삐까르 말처럼 침묵이란, "다만 무엇인가가 결핍된 것이 아니라 어떤 적극적인 것, 가장 깊은 감정은 항상 침묵에 있는 것. 결국 "죽음과 삶의 황홀은 한가지에서 핀 꽃…죽지 않는 꽃은 가화(假花). 삶의 황홀이 없다면 죽음을 맞아 끝나는 삶, 그 삶의 끝남이 무슨 의미를 지닌단 말인가"라는 화두를 던지며 침묵을 깼다.

* 이별을 슬퍼 말라는 시 즐거운 편지가 영화로 상영돼 화제

그이의 시는 초창기이후 전반적으로 분위기가 절망과 비극, 비관주의가 두드러지고 있다. 고교 때부터 혹독한 전쟁을 겪고 항무지가 된 서울에서 니체, 예이츠, 릴케 등의 영향 탓인 것 같다. 낭만주의자이기도 해 음대에 진학해 작곡가가 되려고도 했지만 친구 마종기 시인이 발성음치라는 사실을 지적하자 그 길을 포기했다. 학교에선 영미 모더니즘을 배우고 정작 시에서는 자기 방식으로 변형시킨 한국의 전통시를 쓰려하면서 갈등도 많이 겪었다. .

어쨌든 그이의 등단작 가운데 하나인 즐거운 편지는 58년의 연애시인 데 97년 두 편의 영화 편지와 팔월의 크리마스가 화제 개봉되면서 베스트셀러 순위에 진입하여 문단에서 두고두고 화제가 되었다.


1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 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

2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즐거운 편지 전문)

영화 편지가 개봉되었을 때 극중 최진실은 이 즐거운 편지를 읽었다. 이 소식을 당시 미국 버클리대학에 있을 때 접했다. 시집이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고교 3학년 때 사랑했던 연상의 여자에 대해 쓴 이 시의 매력은 사소한 진실로 진실로라는 단어에 있다. 일상의 사소한 일처럼 어디서 무엇을 하든 간에 너를 진실로 진실로 사랑한다는 것. 시를 생경하기 위해 앞 소절에 이런 낯설게 하기와 가볍게 하기라는 장치를 해 놓은 게 그이 시의 특징이기도 하다.

그러면서 "나 보기에 역겨워..."(김소월 진달래꽃), "아, 님은 갔습니다. 나는 님을 보내지 않았습니다"(한용운 님의 침묵), "가시도셔 오쇼서(가시자 마자 돌아 오십시오- 고려가요 가시리) 등 리듬이 우려 나온다. 그러나 지금은 떠나간 당신 언젠가 되돌아 올 날을 믿으며 한없이 기다리겠다는 전통 서정시의 구도나 연애시의 고정관념을 파괴시켜 버린다. 사랑은 늘 만들어 가는 것이지만 언젠가 인간의 끝처럼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으로 믿는다"고 단정한다. 그러면서 그 사랑의 끝이 세상의 끝은 아니라며 반드시라는 단어로 강조한다. 그러기에 더욱 눈물 나는 연애시일까. 이러 흐름의 연애시로 조그만 사랑 노래, 더 조그만 사랑 노래, 비린 사랑 노래 등이 있다.

그이는 "풍장이란 일종의 살을 버리는 행위"라 말했다. 그래서일까? "정년 퇴임하면 무엇을 할 것인가"라고 묻자 "더 살려는 혹은 무엇에 집착하려는 생각이랑 추호도 없다"고 잘라 말했다.

결국 최후에 뼈로 남는 삶의 부스러기들.... 금방 눈이 내릴 것만 같다. 앙상한 나무 위에 존재의 가벼움으로 눈발이 휘날린다. 가볍게 비우고 간 사람들의 어깨 위와 가슴마다 눈발들 사뿐히 내려앉는다. 이내 흔적도 없이 세상을 축축이 적시며 사라지는 눈발이여....

■ 황동규 시인은……………


1938년 평남 평원군 숙천에서 출생, 서울대 입학 영국 에든버러 대학 대학원을 졸업했다. 1968년 서울대 교양과정부 전임강사를 시작으로 현재 영문과 교수로 재직중이며 내년 1학기 마지막 강의를 끝으로 정년퇴임을 한다. 58년 <현대문학>에 미당 서정주 시인의 추천으로 시월, 즐거운 편지가 당선돼 문단에 데뷔했고 시집으로 어떤 개인 날, 비가(悲歌), 평균율 1, 평균울 2,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 악어를 조심하라고?, 풍장, 버클리풍의 노래, 몰운대行, 미시령 큰바람 등이 있다. 시론집 사랑의 뿌리, 시선집 열하일기, 시적 자서전 시가 태어난 자리, 산문집 겨울 노래, 젖은 손으로 돌아보라 등이 있다. 현대문학상, 연암문학상, 이산문학상, 대산문학상, 미당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섬과 문학기행 > 시인을 찾아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인을 찾아서⑩ 나희덕  (0) 2004.03.10
방랑시인 고은  (0) 2004.02.26
시인 죽이기  (0) 2004.02.20
쓸쓸하고 그리운 풍경들  (0) 2004.02.20
세상의 남자는 다 오빠...  (0) 2004.02.19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