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과 등대기행 ⑨ 강구항 방파제 등대
- 영덕대게 맛보고 동해안 일주도로 달려보자
강원도 최북단에서 시작된 동해안도로는 경상도로 접어들면서 그 절정을 이룬다. 특히 경북 영덕군 강구면 강구마을에서 축산마을을 잇는 918번 지방도로는 환상적 드라이브 코스다. 이 도로는 각각의 마을 앞 자를 따서 '강축도로'라고 부른다. 시종 푸르게 출렁이는 동해바다와의 아름다운 동행. 대관령이나 진부령 고개에서 만난 꼬불꼬불 산자락과 흡사하지만 높지도 깊지도 않게 야트막히 바다를 옆에 두고 달리는 길. 차창으로 파도가 물보라쳐 올 것만 같은 가까운 바다의 풍경. 이따금 햇살이 내리면 찬란한 바다의 향연이 눈부시다.
강원도 최북단에 대진항이 있듯 이곳 경상도에도 대진항이 있었다. 이 포구에서 26km에 이르는 해안선은 가히 세계적인 미항임을 넉넉하게 보여준다. 굽어 내려가는 길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어촌. 지붕도 울긋불긋 이색적이다. 마치 초가지붕 시절은 호랑이가 담배 피던 시절이라며 비웃는 듯 하다. 어촌도 살만한 세상이면서 진한 향수가 베여있는 모습.
앞마당엔 오징어 과메기 길에는 활어차가 달리고
마을 앞마당마다 '덕장'을 설치해 피데기(반 오징어)와 과메기를 널어둔 풍경에서 분명 '원조 어촌'임을 느낄 수 있다. 마음씨 좋은 버스 운전사는 정류장도 아닌 곳에서 학생들과 군인들
을 태워주고 얼마 아니 가서는 머리에 짐을 이고 걷던 아낙들을 태워주기도 했다. 동해안 풍경은 이처럼 사람도 자연도 정겨워 보였다. 이따금 활어를 실은 트럭이 갯물을 흘리며 내달릴 때 우리네 모든 어부들이 저렇게 생동하는 삶을 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으련. 그런 생각을 하면서 끝간 데 없이 펼쳐진 수평선과 어깨를 견주며 오는 길을 감싸안은 강구항에 도착했다.
상한 발목에 고통이 비듬처럼 쌓인다
키토산으로 저무는 십 이월
강구항을 까부수며
너를 불러 한잔하고 싶었다
대가지처럼 치렁한 열 개의 발가락
모조리 잘라 놓고
딱, 딱, 집집마다 망치 속에 떠오른 불빛
게장국에 코를 박으면
강구항에 눈이 설친다
게발을 때릴수록 밤은 깊고
막소금 같은 눈발이
포망마차의 국솥에서도 간을 친다.
- (송수권, '겨울 강구항' 전문)
그렇다. 강구항의 추억은 뭐니뭐니해도 대게이다. 포구에 도착하자 아니나 다를까 대게 찌는 수증기가 피어올라 이채로움을 연출했다. 게 찌는 풍경을 구경하고 있자니 그 내음에 시장끼가 바로 발동한다. 이방인임을 금방 알아차린 듯 게집 주인이 빨리 들어 오라 손짓한다. 몇 마리 갈매기들도 나그네 어깨를 스치어 이내 하늘로 긴 포물선을 긋는다. 반갑다는 눈치가 아닐까. 영락없이 아름다운 어촌의 파노라마가 그렇게 펼쳐졌다.
풋풋한 삶과 낭만, '그대 그리고 나' 드라마 촬영지
사실 이런 어촌 풍경화는 오래 전 '그대 그리고 나'라는 드라마를 통해서였다. 민규(송승헌)의 꿈과 희망이던 등대. 그 등대가 바로 강구마을 오포등대. 민규(송승헌)가 애견(도규)과 함께 바다로 고기잡이를 떠난 아버지(최불암)를 기다리던 등대와 해변의 추억이 아름답다. 어릴 적 나의 추억을 자꾸 되새김질시켜 주면서. 때마침 어선이 포구로 들어올 즈음 어린 시절 삼촌과 할아버지가 그물에 걸린 꽃게를 잡아오면 그 속살 맛있게 비우고는 집게다리를 장난감 삼아 놀던 시절이 스쳤다.
이곳 주민들은 대개 영덕대게를 잡아 생계를 잇는다. 대게는 몸통에서 뻗어나간 8개의 다리가 대나무처럼 곧아서 붙여진 이름. 대게 중에서도 바다밑바닥 개흙이 전혀 없고 깨끗한 모래로만 이루어진 영덕해안에서 잡힌 것이 타 지역산보다 살이 가득 차고 맛이 좋다. 그래서 영덕대게는 부르는 것이 값이라는 말도 있다. 색깔은 누런 주황색, 약간 단맛이 있고 쫄깃쫄깃하며 체내 속살이 꼭 차 있는 게 특징이다. 암컷보다 수컷이 크고 맛있다. 어획 시기는 11월에서 다음 해 5월까지로 이 때 껍질이 가장 부드럽다. '수산자원보호령'에 따라 여름에는 대게 잡는 일이 금지되어 있다. 그래서 겨울철에 미식가들이 몰린다.
싱싱한 영덕대게가 배에서 옮겨지자 즉석에서 경매가 이루어졌다. 눈 내리는 겨울 해변에서 코트 깃 세우고 움츠리며 걷는 이방인의 가슴을 펴게 하는 것은 강구항 게발 때리는 소리 때문이다. 대장간 해머 두들기는 소리가 크고 둔탁하다면 강구항의 게발 치는 소리는 딱, 딱, 딱딱딱 리듬과 정겨운 어촌의 효과음까지 버물려 가슴에 따뜻하게 적셔준다. 그 소리에 귀 기울이다 보면 문득 고요한 시골 밤 작은고모와 할머니가 바꿔가며 두들기던 그 다듬이 소리 같다.
등대 아래서 한 손에 술잔 한 손에 영덕대게를 들고
산다는 것은 두들기는 일인지도 모른다. 누군가를 기다리고 그리워하면서. 힘든 오늘 잠시 잊고 내일을 기약하며 사는 여인네들. 그 무언의 다듬이소리. 그렇게 무심하게 사는 방법을 넌지시 일어주는 소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별의 별 생각을 다하며 방파제 등대로 발길을 옮기는데 굵은 팔뚝의 힘으로 대게를 마음껏 두들겨 패며 속살을 솎아내던 아주머니가 옷깃을 잡아끌었다. "에헤라...모르겠다. 점심은 이 자판 앞에 앉아 아줌마와 한잔 주고받는 것이다".
자영업을 하는 큰아들은 포항에서 회사원 작은아들은 마산에 산다고 했다. 아줌마 벌이로 먹고살 만큼 되어 손자 손녀 등록금이며 용돈도 이따금 집어 넣어줄 수 있단다. 퍽 다행스럽고 행복한 어부의 가운데 한 분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편했다. 집 앞 슈퍼에서 맥주에 게맛살 먹던 것도 좋았지만 이렇게 사는 이야기 주고받으며 소주잔 돌리는 맛, 특히 세계적인 영덕대게, 그 대게 잡는 분과, 고향 바다까지 떠올리면서 어머니 같은 분과 주고받는 술잔에 대한 추억은 오래도록 잊혀지 않을 것이다. 진나라 필탁(畢卓)처럼 오른손에 술잔, 왼손에 게발 뜯어 들고 두둥실 떠 있는 배에 오르지 못했지만 갈매기 이끌고 통통대며 들어오는 배들의 여유와 삶의 체취를 맡을 수 있는 일만으로 사는 기쁨에 취하는 일이리라.
강구항은 횟집들은 대부분 회보다는 영덕대게를 주메뉴로 팔고 있었다. 집집마다 특수 설계된 수족관에 살아있는 대게를 스팀솥에 쪄서 판다. 물론 요즈음 대게 잡기가 만만찮은 것도 사실이다. 사람들은 자고로 몸에 조금 좋다면 씨를 말려야 직성이 풀리곤 하니 말이다. 너나없이 다 잡아내고 한일어업협정 탓에 멀리 나가지 못하게 되면서 수심 밑바닥서 건져낸 대부분은 껍질이 물렁물렁한 홍게(물게, 수게)들이란다.
그래서 영덕대게의 자존심을 지켜야 하는 어부들의 마음이란은 깊고 깊은 수심보다 더 깊은 것인지도 모른다. 60여 게 전문집이 줄지어 있었는데 대부분 중국산과 북한산 원산지 표시를 해놓고 팔고 있었다. 그 이야기를 들으니 씁쓸해지고 다시 쓸쓸한 겨울 바람이 살갗을 스쳐오는 것이다.
영덕항 앞 바다 도다리 우럭 가자미 포인트
아줌마와 영덕대게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후 담배 몇 개비 피우며 강태공들 곁으로 다가섰다. 많이 잡히느냐고 물었더니 봄과 여름에 씨알이 최고라면서 그래도 도다리 볼락 우럭이 올라온다고 흡족해 했다. 배타고 나가면 방어 가자미 돔도 많이 잡힌다면서. 강구항에서 5분 거리인 하저해수욕장 갯바위 낚시와 20분 거리에 있는 장사해수욕장 앞에서는 가자미 광어 우럭 등이 잘 잡혀 연중 낚시 포인트라고 들려주었다.
이밖에 대탄과 대진해수욕장은 수심이 얕아 어린이를 동반한 가족 단위 피서지로 적당하다고 일러주었다. 백사장 모래 질이 좋아 모래찜질도 그만이란다. 겨울에는 동해안 일주도로를 달리며 겨울바람을 뜨겁게 이기며 사는 저 바다와 어부들의 삶을 배우러 세상사는 맛과 멋을 즐겨보면 어떠할는지.
● 미니상식/ 바다 게에 대하여
게(crab)는 모래나 진흙 암석지대에서 생활한다. 번식기 외는 대부분 홀로 생활한다. 수심이 깊은 곳에 사는 게들은 멍게, 해삼에 의지해 살기도 한다. 머리가슴은 1장의 등딱지로 덮여 있고 배는 7마디로 돼 있는데 근육이 퇴화되어 새우나 가재처럼 운동기관으로 역할하지는 못한다. 가슴다리 5쌍이 운동기관이다. 제1 가슴다리는 집게다리, 다른 4쌍으로 걷거나 헤엄친다.
게는 전세계 4,500여 종인데 우리나라에는 180여종이 있다. 동해에서는 털게와 대게, 남해는 꽃게 민꽃게 칠게 방게, 제주도는 홍색민꽃게가 서식한다. 게는 풍부한 단백질과 지방이 적고 항암에 좋아 날로 각광받는 갑각류이다. 게장, 게찜, 게튀김 등 요리도 다양해지고 있다.
● 강구항 가는 길
1. 대중교통의 경우, 부산 대구 경주 포항터미널에서 동해해안도로 운행. 모든 버스 영덕·강구 정차(포항 20∼30분 간격, 부산 3시간 소요)/강릉, 울진 터미널에서 동해안도로 운행. 모든 버스 영덕·강구에 정차 (20∼30분 간격. 비수기 1시간 간격. 강릉에서 3시간 소요)/영덕읍=>강구항 10분 간격 군내버스 운행.
2. 자가용의 경우 경주=>7번 국도=>강동=>28번 국도=>포항 흥해=>7번 국도=>영덕=>강구항/강릉=>7번 국도=>남행=>영덕=>강구항/중앙고속도로 제천 IC=>5번 국도=>안동=>34번국도=>청송 진보=>영덕. 영덕군청(054-734-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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