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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기행-주문진 등대

섬과 등대여행/동해안

by 한방울 2004. 3. 15.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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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 박상건, 박상건 

 

[섬과 등대기행16] 주문진 등대
- 가난한 시절 애증 안고 영원한 어부의 등불 되어

주문진 등대를 찾아간 것은 그해 봄이었다. 진종일 망상에 잠겨 있다가 뜬금없이 동해바다로 달려가고 싶었던 것. 그렇게 강남고속터미널에서 심야버스를 탔다. 버스는 3시간만인 새벽 4시에 강릉에 도착했다. 참으로 어중간한 시간대였다. 강릉에서 주문진 가는 버스 편은 새벽 6시가 첫차였다.

여관으로 들어가기도 어중간하고 해서 새벽 찬바람을 비집고 도회지를 헤매다가 반짝이는 비디오방 간판에 빨려 들어갔다. 많은 젊은이들이 그렇게 비디오방에서 시간을 축내고 있었다. 난생 처음으로 비디오방이라는 데를 가보았으나 이내 답답한 마음 어쩔 수가 없어서 그곳을 나왔다. 터미널 주변을 청소하던 미화원 아저씨에게 담뱃불을 붙여주고 그 아저씨의 마음만큼이나 정갈한 경포대의 아침을 맞았다.

경포호수 건너 멀리 반짝이는 동해 바다는 참으로 푸르기만 했다. 철썩철썩 파도소리를 따라 긴 백사장을 걸었다. 저 편으로 대관령이 한 폭의 풍경화로 다가섰다. 경포대는 밤이면 벚나무가 꽃망울을 터뜨려 분위기를 자아낸다고 하지만 홀로 맞는 아침 풍경도 만만찮았다.

* 피난길에 등대를 분해해 짊어지고 갔던 영원한 등대지기
다시 강릉에서 주문진행 버스에 탔다. 서울에서 출발 전에 내심 만나고 싶은 분이 있었다. 36년 동안 등대지기 생활을 하다가 정년 퇴직한 최선행 선생(72). 오래 전부터 뵙고 싶었고 그이는 언제든지 찾아오라는 전갈을 받은 터였다. 등대지기를 천직으로 삼아 살던 그이는 전쟁이 일어나자 등대의 불빛을 반사시키는 핵심 부품인 등면기를 분해해 부산 피난길에 애지중지 짊어지고 갔던 분이다.

그이의 집 거실에서 커피 한잔 놓고 돈주고도 들을 수 없는 희한한 등대의 애환을 들었다. "등대마다 불빛 주기가 다른 데 북한의 원산과 주문진 등대 불빛 주기가 거의 비슷했죠. 그런데 전쟁 후 전력이 모자라 주문진 등대가 돌다 멈추다가 반복하면서 불빛 주기가 원산과 같았던 거죠. 이를 보고 일본에서 원산으로 가던 밀수선이 주문진 등대를 보고 원산인줄 알고 잘못 들어왔다가 잡힌 적이 있어요".

"그 뿐입니까? 60년대 초 묵호등대로 영국 상선이 기자재를 싣고 들어오는데 묵호등대 불빛이 10초마다 깜박여야 하는데 14초만에 깜박이다 다시 10초, 7초마다 깜박이며 불규칙한 불빛 주기로 돌아간 거죠. 전력이 모자라던 시절에 저녁에 집집마다 전기를 켜니 등대를 밝혀야 하는 동력이 모자라서 발생한 일이죠. 그러니 영국 상선은 헷갈릴 수 밖에요. 그들은 곧 영국 대사관에 연락을 취해 '위치를 모르겠다. 묵호 같은데....'했고, 대사관은 한국 치안당국에 연락을 했고 치안당국은 다시 묵호등대에 전화를 걸어 '여기 치안국인데요, 등대 잘 돌아갑니까?'라고 물었죠. 당연히 등대지기는 '예, 잘 돌아갑니다'라고 말했죠."

지금 생각해보면 배꼽 잡게 하는 일화이다. 그러나 눈 여겨 볼 대목이 있다. 당시 1년 걸려야 아시아의 작은 항구 주문진까지 올 수 있었던 영국 상선이었지만 신사의 나라답게 당황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리고 해당 나라에 정중히 문의했던 일이다. 항해자의 신사조약이랄 수 있는 등대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는 점이다. 또한 이런 일이 최근에 벌어졌다면 국제 문제로 비화될 수 있는 일이라는 점과 등대의 역할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점을 일깨워주고 있다.

그렇게 등대의 역사를 한 몸에 지닌 선생 소식이 궁금하던 차에 며칠 전 해양수산부 석영국 사무관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그분은 몇 년 전 작고했어요"라고 말했다. 그 때 그이와 함께 간 주문진 등대를 그래서 이래저래 잊지 못할 것 같다. 마지막 동행이었으니 말이다.

* 태백산 마지막 끝자락에서 불빛을 밝히는 등대
주문진은 본디 강릉 신리면 주문진리에 속했으나 이곳에 나루가 있다해서 주문진으로 변경되어 지금까지 불리어지고 있다. 주문진 등대가 위치한 곳은 서쪽 태백산맥 산줄기의 끝자락이다. 산맥이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 마지막 줄기이자 바다와 만나는 첫 지점이다. 그 해안절벽에 불빛을 반짝이는 등대라는 사실만으로 신비로운 일이 아닌가.

주문진 등대는 그렇게 어촌을 한눈에 굽어보고 있었는데 1918년 봄날에 석유등으로 불빛을 밝힌 이래 강원도에서 가장 오래된 등대로서 86년간 어민들과 고락을 함께 해오고 있다. 이곳 등대는 7.5초마다 한번씩 불빛을 반짝인다. 빛이 가 닿는 거리는 31마일에 이른다. 이 빛을 받아 실제 항해에 활용하는 선박의 거리는 20마일(37km) 해상이다.

먼 곳에서 우연히 등대 불빛을 바라보았던 사람들에게는 아주 작게 깜박이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이처럼 강렬한 불빛으로 광활하고 검푸른 파도 위를 대낮처럼 밝혀주는 것이다. 특히 낮선 밤바다에서 표류중이거나 악천후를 만난 선박에게 다가와 환하게 비추어지는 이 불빛이야말로 구원의 등불인 셈이다.

* 바다에 생명을 맡겼던 어부들의 든든한 희망의 불빛 되어
폭풍우나 안개가 자욱한 날에는 공기압축기(에어싸이렌)를 통해 60초마다 한 번씩 5초 동안 긴 고동소리를 울린다. 이 소리가 선박에게 가 닿는 거리는 3마일(5.5km)해상. 이러한 역할이 특히 필요했던 곳이 주문진 앞 바다였다.

조선시대와 일제시대에는 어선들이 돛을 달고 바람의 힘에 의해 항해했다. 또 바람의 방향 등을 가늠해 가며 해상 날씨를 육감으로 예측했다. 오직 자연에 항해자의 목숨을 걸고 살았던 것이다. 그렇게 바다에 생명을 담보해두고 살았던 어부들에게 주문진 등대는 희망의 등대일 수밖에 없었다.

주문진은 동해 중부지방 해안에서 가장 발달한 항구이고 선박의 입출항이 날로 늘어났고 지금도 증가추세를 보이고 있다. 그래서 주문진 등대는 2000년에 선박의 정확도를 10미터 거리 이하까지 향상시킨 인공위성을 이용한 최첨단 항법장치인 DGPS(디퍼렌셜 지피에스)이라는 시스템을 가동하기에 이르렀다.

작은 등불에서 시작한 주문진 등대는 이제 인공위성을 통해 정확한 길잡이로서 항해하는 선박의 뱃머리까지 다가서는 아주 세심하고 따뜻한 동행자가 된 것이다. 오래 전 아련한 등대지기 추억과 함께 첨단 등대지기 시대의 상징으로 그렇게 다가선 주문진 등대.

* 식민지 시절과 분단의 아픔이 배여 있는 등대
주문진등대는 10미터 높이를 흰 벽돌로 쌓아 만들었다. 건축학에서 말하는 연와조 기법이다. 그런데 해방 이전 조선 총독부가 세운 탓에 일본식 건축 양식을 사용했다. 안정감 있는 계단을 기반으로 철근을 사용하지 않고 벽돌로만 쌓은 등탑이라는 점이 특징이고 기둥과 지붕 모양의 문양이 철제 출입문을 감싸고 있다는 독특한 양식을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부인할 수 없는 일은 한국사의 부끄러운 흔적을 한 몸에 껴안고 있는 등대라는 점이다. 일본식 건축양식도 그러하거니와 일본의 끝없는 대륙 진출의 야망이 짙게 드리어져 있다. 민족정기를 말살하려고 곳곳에 쇠말뚝을 박았던 그네들은 뱃길의 길목과 항구마다 등대를 만들어 일본 패권주의의 망상을 끊임없이 드러냈던 것이다.

이 곳 등대는 6.25 때는 미군정 아래 놓쳤다. 동족끼리 총부리를 겨누었던 쓰라린 생채기를 상징하듯 기관총 탄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그 흔적들을 바라볼수록 후손들에 무언가를 말해주려는 그런 몸짓으로 다가섰다. 그 작은 구멍들은 아픈 기억의 눈동자로 부릅뜨고 서 있었다.

* 등대 아래 해안도로 드라이브 코스, 낚시 포인트로 각광
그렇게 등대는 가없는 세월 속에서 세상 비바람이며 물살을 헤쳐온 파도처럼, 혹은 그 파도를 묵묵히 바라보며 인내한 사건만큼이나 많은 시련의 세월 속에 서 있었다. 이런 저런 생각의 갈피를 파도소리로 펴면서 주문진항 왼편 옆구리 섬모롱이를 내려서는데 "하긴, 후손들에게 우리 역사를 되새김질시킬 수 있는 기회를 준다는 점으로 그나마 주문진 등대는 위안으로 삼을 수 있겠지..."하는 생각에 미치기도 했다.

이 곳 등대는 2002년 숙소를 새로 짓는 등 등대주변을 말끔히 단장했다. 동해 일출을 감상할 수 있는 전망대도 만들었다. 등대 아래 해안도로는 드라이브 코스로 적격이다. 아무 갯바위에서나 낚시줄을 던지면 물 좋은 고기를 만날 수 있다. 평일에도 많은 낚시꾼들이 몰렸고 특히 방파제에서는 가을철이면 남종바리(돔의 일종. 강릉사투리)가 많이 잡힌다고 했다.

내친 김에 수산시장에서 갓 잡아온 횟감에 소주 한 병을 사들고 갯바위 강태공 옆에 앉아 살짝 붙어 앉았다. 큰 술잔 같은 파도 앞에서 소주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다보면 누구나 언젠가 한번은 만났던 사람처럼 서로가 친해지는 법이다. 그이는 이곳 본토박이로 50대 중반을 줄달음치는 인생이라고 했다. 그렇게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며 입질을 기다리는데 통통배들이 항구로 들어오고 있었다.

* 파닥이는 물고기와 사람이 생동하는 어촌
항구로 들어오는 배들은 잡어를 실은 1톤 미만의 어선에서부터 수 백톤 가까이 이르는 배들이 오징어를 비롯하여 각종 어류를 잡아 들어온다고 설명했다. 여름에 난류성 어류, 겨울에는 한류 어종이 주로 잡힌단다. 그렇게 잡은 고기들을 가득 싣고 들어오면 종소리 딸랑거리는 경매장에서 어부들은 최후의 만선의 기쁨을 맛보며 돌아간단다. 물론 해녀들이 직접 따온 미역과 성게, 해삼, 전복 등도 수산시장에서 만날 수 있다고 덧붙였다.

그렇게 살아 파닥이는 활어에 소주잔을 기울이며 보낸 갯바위의 추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파도소리를 들으며 한잔 술에 세상사를 잊는 일처럼 아름다운 일이 또 어디 있으랴. 누구나 함께 할 수 있는 푸른 바다와 대화는 늘 신선하고 정겹기만 하다. 오징어 성수기 때는 집집마다 그리고 해안도로 마다 덕장에 오징어를 말리는 풍경도 이색적이다. 그렇게 살아 파닥이는 항구, 주문진.

물고기처럼 힘찬 파도들이 갯바위로 처 올라올 때마다 그 물보라는 삶의 청량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태백산맥의 뜨거운 맥박소리를 이어받아 동해의 파도소리로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주문진 앞 바다에는 진종일 산뜻한 교향악이 연주되었다. 그 여울진 가락에 젖어보고 싶거들랑 지금 당장 주문진 등대 앞 바다로 떠나자. 인간과 자연이 함께 만들어 내는 그 아름다운 해조음 속에서 모든 것이 살아 꿈틀대고 있을 터이니 말이다.

● [미니상식] 낙지와 해삼에 대하여

어시장에서 만나는 해산물 가운데 술꾼들이 즐겨 찾는 것이 낙지와 해삼이다. 낙지는 몸길이가 약 60cm. 몸통·머리·팔로 이루어져 있다. 머리에 8개의 발이 있다. 둥근 주머니 같은 몸통 안에 각종 장기가 들어 있다. 몸통과 팔 사이의 머리에 뇌와 두 개의 눈이 있다.

교미하는 팔은 숟가락 모양이다. 몸빛은 회색이지만 주위 빛에 따라 색이 바뀐다. 위험에 처하면 먹물을 뿜어대며 도망간다. 진흙 속 깊이 굴을 파고 살며 먹이를 잡을 때는 팔을 밖으로 펼쳐 먹는다.

멍게와 함께 안주로 자주 나오는 해삼. 바다의 인삼으로 불리는 극피동물이다. 외국에서는 길쭉하다 해서 '바다의 오이'라고 부른다. 먹이와 서식처에 따라 색깔이 다ㅓ른데 홍해삼, 흑해삼, 청해삼 등으로 구분한다.

해삼 맛은 처음 딱딱한 듯 하지만 나중에는 부드럽고 잘게 씹힌다. 19도 이하에서 왕성한 성장을 하고 24도 이상에서 여름잠을 자며 활동을 멈춘다. 그래서 해삼은 12월∼4월이 가장 맛 좋은 시기이다.

● 주문진 등대로 가는 길

① 승용차
○ 영동고속도로→동해고속도로(주문진 현남톨게이트)→7번 국도 하행선→주문진등대
○ 강릉→7번 국도 상행선→사천→연곡→주문진 시장→주문진등대

② 대중교통
○ 강릉버스 터미널(직행버스)→주문진 버스터미널 하차→주문진등대(주문진 터미널에서 직행버스 10분 간격 운행)
○ 강릉 시내(31번,31-7번 시내버스)→주문진 수협사거리 하차→주문진 등대(도보 5분 소요)
○ 강릉역(31번, 31-7번 시내버스)→주문진 수협사거리 하차→주문진 등대(도보 5분 소요)

***새책 소개 박상건의 [빈손으로 돌아와 웃다]-당그래 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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