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건의 섬과 등대 이야기] ② 가덕도
절대고독의 상징, 영혼의 불빛 등대
-떠남의 아쉬움까지 그 빛으로 따스하게 말려
해양수산청 행정선 광성호를 타고 우리 나라 제1의 항구 부산항을 서서히 빠져나갔다. 이 행정선은 부산에서 울산, 진해 일대에 이르는 넓은 해상에 설치된 등대와 뱃길의 신호등 역할을 하는 항로 표지시설 등을 점검하고 등대에 생필품을 실어 나른다.
행정선 선장 정도억 씨는 바닷가 출신으로 어릴 적부터 마도로스를 꿈꿨고 78년 외항선을 탄 후 지금의 해양수산청 보급선 선장으로서 250㎢ 이르는 해상을 누비며 선박의 안전과 등대원들의 생활을 지원하는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그가 입사할 당시 배의 규모나 속력, 장비 등은 매우 열악하여 바람이 거세고 해일을 만날 때면 생명을 바다에 맡겨야 할 형국이었단다. 물론 지금은 성능 좋은 엔진 탓에 순간적인 배 회전이 빠르고 운행의 정확성이 매우 뛰어나나고 한다.
그러나 여전히 이 일대는 선박의 입출항이 잦고 해류의 변화가 심하다. 거센 파도와 잦은 안개 등 기상 악조건을 감수해야 한다. 이런 지역인 만큼 행정선과 등대의 역할은 커질 수 밖에 없다.
♧ 등대원의 보급품 실어 나는 행정선을 타고...
언젠가 이런 일도 있었다. 오륙도 앞에 있던 한 척의 배에서 연기가 피어올라 직감적으로 불길한 예감을 느끼고 현장으로 다가가 낚싯배 승객 10여명을 행정선으로 옮겨 태운 후 얼마 후 불길이 치솟고 불에 탄 배가 바다 속으로 가라앉더라는 것이다.
또 연료가 바닥나 표류하던 어선을 발견해 연료를 지원한 적도 있고 높은 파도를 만나 뱃길을 벗어나 표류중인 배를 구조하는 등 행정선은 이 바다 지킴이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광성호 뒷편에는 작은 목선이 하나 매여 있었다. 바람과 거센 파도로 인해 해안 접안이 어려울 때 이 배를 띄워 운반작업을 한다 했다. 이도 저도 배를 띄우기가 어려울 때는 인근 해안기슭에 짐을 부려 놓고 가면 등대원들이 지게를 지고 등대로 운반한다고 한다.
부산청 김민철, 김명환 선생님과 선상에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가덕도에 도착했다. 가덕도는 해발 459.4m의 연대봉과 국수봉, 문필봉, 갈마봉 등이 있다. 산등성이를 타면서 바다 구경하는 맛이 일품이다. 묵은 체증을 다 씻어주고도 남는다.
툭 트인 저 바다의 아름다운 풍경도 그렇지만 해안마다 낚시 포인트이다. 볼락, 감성돔, 게르치, 망상어 등을 70여 마리를 낚을 정도였다. 가덕도 등대로 가는 길은 동백나무와 해송의 향기가 그윽한 숲길이다. 숲을 10여분 걸어 도착한 가덕도 등대는 툭 트인 섬모롱이에 보무도 당당하게 서 있었다.
♧ 솔 향기 그윽한 등대 앞마당에서 아름다운 만찬
등대 동쪽으로는 다대포, 서남북으로는 거제도, 북으로 진해시와 접해 있는 해상교류의 요충지이다. 가덕도 등대는 임진왜란 때 치열한 격전장이기도 했는데 일본군이 군사적 목적으로 대한제국 말기인 1909년 12월에 건립한 것이다.
일본이 우리 나라를 상륙하기 전 고려, 조선을 정탐하던 곳이었으면서도 삼국시대에는 신라, 백제가 일본으로 건너가기 전에 해상의 기상을 예측하던 곳이었다. 결국 가덕도는 삼국시대부터 고려 중기까지는 빛나는 섬이었고, 고려 후기부터 구한말까지는 굴욕의 역사를 경험한 셈이다. 2003년 태풍 피해가 휩쓸고 간 그 자리에 해군 전초기지가 있고 해양청 등대가 서 있는 것으로 보아 가덕도의 앞날은 중요하면서도 빛나는 미래를 열 섬임이 분명하다.
이 등대는 우리 나라에서 가장 높은 45미터에 이르고, 12초마다 한번씩 불빛이 반짝이는데 이 등대 빛은 자그마치 35마일 거리까지 비춘다. 등대에는 고수진 소장 외 이종학, 서정일 등대원이 근무하고 있었다.
이날은 아주 특별한 날이었다. 이곳 등대원들이 부산 지역 부모 없는 아이들을 초청한 것이다. 이종학 등대원은 바닷가에서 잡아온 고동을 삶아 아이들에게 대접했고 영문학도 출신인 낭만파 서정일 등대원은 기암절벽을 따라 해상 체험을 돕기도 했다.
얼마 후 진해 쪽으로 노을이 뚝, 떨어지고 있었다. 우리는 노을에 젖어간 등대 앞마당에서 청소년들과 어울려 시를 낭송하고 등대원들이 손수 잡고 만든 바다 요리로 아름다운 만찬을 즐겼다. 티없이 맑은 아이들의 얼굴이 노을에 붉게 물들어 갔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속으로 말했다.
♧ 파도에 씻겨 윤기 나는 삶, 우리네 삶도 파도처럼 살아갈 일
그래 소년 소녀들아! 저 노을이 하루를 열심히 살고 가듯이 우리 잠시 외롭고 슬플지라도 우리 뜨거운 사랑으로 내일의 옹골찬 희망을 꿈꾸자구나... 저 광활한 바다에 태양이 다시 떠오르듯이 우리의 희망은 늘 가능성에 대한 정열임을 잊지 말자구나.
아이들아! 우리 함께 희망을 믿으며 세상의 바다에 당당히 기다림의 닻을 던져 보자구나. 조약돌이 파도에 씻기어 윤기 나듯이 우리들 삶도 이 세상의 바다에서, 이 풍진 바다에서 저 둥근 돌처럼 구르고 구르면서 닦이고 닦이어 아름다운 삶의 길을 떠나 보자구나....
알고 보면, 산다는 것은 바둥바둥 파도치는 것. 해안선에 부서지고 부서지면서 멍든 파도가 수많은 세월을 몸 던지고 나뒹굴며 살아온 것처럼, 아이들아! 우리도 넘어지면 일어서고 밀려와 다시 밀려가는 저 파도 같은 삶을 살자구나. 우리 어깨동무하고 늘 푸른 섬이 되자구나....
군고구마 껍질 벗기듯이 우리는 밤새 정담을 나누며 하룻밤을 지샜다. 그렇게 아침해가 떠올랐다. 바다에 부서지는 햇살은 영락없이 꽃밭에 물 뿌리던 조리개처럼 넓은 바다를 차근차근 은빛물살을 일으키며 몰려왔다. 그렇게 서서히 데피면서 전율하는 바다에 통통배가 포말을 감아 돌리며 힘찬 항해를 하고 있었다.
그렇게 가덕도의 아침은 희망으로 가는 포구였다. 포구는 항해의 시작이자 정박의 끝을 의미한다. 어둠 속에서 불빛 밝히며 한결같이 아낌없는 사랑을 퍼주던 등대는 이제 그 바다가 대신 던져준 햇살에 등 기대어 고단한 밤을 내려놓고 밀린 잠을 청하고 있다.
저 속 깊은 사랑의 등대 아래서 청소년들을 초청해 아낌없이 음식과 마음을 나누어주던 등대원들의 깊고 애틋한 손길이며 아름다운 마음은 오래도록 내 기억 속에 파노라마로 남아 있을 것이다. 잠들지 않는 물결로 오래도록 내 가슴에서 파도칠 것이다.
사람은 만나면 떠나기 마련이다. 발길마다 남는 것은 아쉬움뿐. 등대는 그 아쉬움까지도 따스한 불빛으로 비추고 말려준다. 이름 모를 사람들의 길라잡이가 되어 늘 그 자리에 서있다. 등대는 절대적 사랑이며 절대고독의 상징이다.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영혼의 꽃이며, 영혼의 불빛이다.
생활상식/ 선박 이야기…가덕도 가는 길
기원전 55,000년경 소나무를 파내어 만든 카누를 이용해 호주대륙으로 건너갔던 뉴기니의 원주민들로부터 시작된 배의 역사는 본디 물건을 실어 나르는 데 사용되었다. 그러나 배는 점차 군사적 경제적인 전쟁의 대상이자 수단이 되었다.
대서양을 가로질러야만 했던 스페인, 태평양을 가로질러야 했던 미국 등은 장기간의 항해 부담 탓에 전쟁을 시작할 때는 제일 먼저 보급선 문제를 해결했다고 한다. 적기에 보급선이 올 수 있느냐는 문제는 곧 군사들의 사기 문제와 직결되었다.
이러한 보급선을 노린 해적들이 생겨나 카리브해를 중심으로 국가간의 충돌 또한 잦았고, 포클랜드 해전에서는 독일과 영국간에 보급선 방어와 탈취 작전으로 거듭됐으며,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적군의 보급선이 상륙할 수 없도록 막아 굶주린 왜군들의 사기가 땅에 떨어졌다. 이러한 보급선의 역할 탓에 미국은 모든 함선에 한달 이상의 식량을 적재토록 했고 최근 이라크 전쟁 때도 보급선 문제를 가장 먼저 고려했다는 후문이다.
가덕도 등대는 진해 용원선착장에서 외항포행(배삯은 편도 2,400원)을 타면 된다. 포구에서 내려 30분∼40분 정도 산길을 걸어야 하는데 등산과 바다 구경하기에 참 좋은 코스로 동백 자생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