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과 등대기행 ⑦ 대진등대
동해 최북단 해안의 평화스러운 풍경들
여행은 한가함을 찾아 떠나는 일이다. 동해바다처럼 깊고 푸른 바다 앞에서는 더더욱 번거로움과 번잡한 일상을 확 날려버려야 한다. 그 때 한가함은 진정 철학의 어머니임을 깨닫게 된다. 깊은 바다 앞에서 깊은 생각을 하는 일은 번데기 앞에서 주름 잡는 일일 터이니. 해맞이 교통체증을 슬쩍 피해 평일에 3박4일간의 동해 해안선 일주에 나섰다. 동서울터미널에서 강원도 고성군 대진등대로 향했다. 설악산을 뚫고 진부령 고개를 넘어섰다. 육지의 섬이 산이라면 바다의 산은 섬이리라.
대진항은 입구부터 철책이 둘러 퍼져 있었다. 철책 앞 바위에는 "67년 무장공비 노동당 간부 3명이 사살되는 곳"이라는 표지판이 섬뜩하게 서 있었다. 나 같은 이방인에게 이 곳에 철책을 두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웅변해주고 있는 듯 했다. 분단의 아픔을 넌지시 일러주면서 그러니 제발 오해는 말아달라는....
일상탈출로 사색과 심신단련에 안성맞춤인 해변
군부대와 철책이 없다면 최전방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고요한 포구. 북쪽에는 길이 350m, 넓이 3,200여 평의 백사장이 있는데 참 희고 고운 모래들로 반짝였다. 물빛 또한 더없이 깨끗하고 얕은 수심은 괌이나 사이판에서 만나던 그런 이국적인 바다의 아름다움을 뽐내주고 있었다. 수심이 얕아 가족단위 여름 해수욕으로는 제격이었다. 그래서 평상시에는 개방하지 않지만 매년 여름(7월 10일∼8월 20일)에는 한시적으로 개방하는 해변이다. 대진항 남쪽 지점인 대진5리에도 이런 아담한 백사장이 펼쳐져 있었다.
대진항은 고요함으로 미루어 도심의 일상에서 탈출해 사색하고 심신을 단련하기에는 안성맞춤인 해안이다. 동그랗게 휘어진 포구 또한 아름답다. 아무튼 대진 앞 바다는 이런 등대의 포근한 불빛을 받으며 예전보다야 못하지만 명태가 많이 잡히는 곳이고 겨울 바다 강태공들에 따르면 여전히 가자미 낚시가 일품이라는 것이다. 물론 포구에서도 갓 잡아온 여러 생선회를 아주 값싸게 맛볼 수도 있다.
그렇게 동해 최북단에 위치한 대진등대에 다다랐다. 이곳에서 조금만 더 올라가면 해금강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통일전망대. 남북 긴장지대라는 생각 때문인지 적막하기 그지없었다. 절벽 위에 서 있는 대진 등대에서 내려다 본 감청색 바다가 절경이었다. 날씨가 좋은 날에는 북녘 어촌이며 바다를 구경할 수 있다고 했다. 대진등대는 동해 최북단 유인등대로 높이 31m 상공에서 12초마다 한번씩 불빛을 발사한다. 동해바다로 쭉 뻗어나가는 빛이 가 닿는 거리는 자그마치 20마일(37km)에 이른다.
분단의 아픔과 어부들 삶의 길을 동행하는 대진등대
이곳 등대에서 빛으로 동해안 북방어로한계선을 표시하고 있는데 저진도 무인등대와 거진등대까지 원격조정하고 있다. 평온한 바다에 파도는 쉴새없이 밀려왔다가 결국 사람이 사는 평화로운 포구에 엎드렸다. 포구에는 오징어 배 집어등 불빛이 출렁이면서 바다의 체온을 더욱 따뜻하게 데워주는 듯 했다. 언젠가 북녘의 어부들도 이 공동 어로지역을 통과하여 서로 불빛 달고 소리치고 손짓하면서 동족의 핏줄을 마음으로 이어가겠지...서로 파닥파닥한 고기들을 잡아 올려 함박웃음 지으며 뱃머리를 맞대고 소주잔을 기울일 수 있겠지.... 그런 소망의 불빛 켜두고 밤이 깊어가도록 허공을 빙빙 돌아가던 등대 빛무리....
등대 아래 갯바위에 턱 괴고 앉아 담배 몇 개비 태우며 상념에 잠겨 있는데 등대 빛은 영락없는 영혼의 파닥임처럼 다가왔다. 등대 불빛 사이로 파도가 밀려와 솟구쳤다가 하얀 포말로 부서지기를 반복했다. 어쩜 산다는 것은 저렇게 넘어지고 부서지는 일이리라. 막힌 생각이 포말처럼 터지고 나면 다시 퍼렇게 눈뜨고 일어서는 바다의 깃발이 되어 파도치는 것이리라.
그렇게 대진 앞 바다는 포말을 일으키고 눕히면서 고깃배에 힘을 불어넣는 것이었다. 스크루가 포말을 감아 돌릴수록 배는 힘차게 전진했다. 어선의 엔진소리에 대진항은 두근두근댔다. 한일어업협정으로 바다의 씨알이 말라버렸다는 어부들의 푸념 소리를 알아들은 뒤 파도는 철썩이다가 이내 엔진소리가 멈추자 포말도 숨을 고르며 평온한 바다에 파문을 잠재웠다. 고깃배가 들어올 때 가장 먼저 그 바다로 뻗어나가 귀항을 맞는 것은 방파제 등대이다. 왼쪽 항구를 일러주는 붉은 등대와 오른쪽 위치를 일러주는 하얀 등대가 뱃머리를 인도하며 변함없이 어부들의 길잡이가 되는 것이다.
만선의 고깃배 들어오자 생동하는 포구
그 두 개의 등대 사이로 고깃배가 들어와 어부가 포구에 닻줄을 던지자 경매인이 성급히 다가서고 종소리를 울린다. 중간 상인들이 몰려들어 파닥이는 고기를 앞에 두고 손가락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하며 흥정을 시작한다. 몇 초만에 낙찰이었다. 찬바람 거센 바다 헤쳐온 만큼 고기 또한 싱싱할 터. 밤잠 설치며 항해한 어부의 삶의 무게는 그 순간 그렇게 가벼워지는 것이다. 그 홀가분한 마음을 위해 먼바다로 출항했을 터.
어부는 갑판에 묻은 고기비늘이며 쭉정이들을 청소하고는 바로 포구 선술집으로 향했다. 노동 후에 맛보는 따스한 고봉밥이며 그 막걸리 맛을 어느 누가 알랴. 고깃배 돌아온 그 바다 너머에 이글거리는 태양의 찬란함이 보인다. 어쩜 어젯밤 저 바다로 나간 어부들이 아침 하늘에 찍어두고 싶은 영혼의 인두자국인지도 모른다. 이글거리는 하늘을 공동 연출하는 것은 갈매기 떼이다. 포물선을 그어 가는 모습을 보노라면 춤추는 무녀들 같다. 그렇게 갈매기들은 어부의 고단한 어깨 위에서 늘 희망 그리기를 하는 어촌의 한 일원이었다.
해가 중천에 뜰 무렵 포구에 정박한 고깃배를 기웃거리며 물 좋은 횟감을 찾는 이방인들이 보인다. 외지에서 온 관광객들이다. 그렇게 평온한 대진항에는 분주함과 생동감이 교차하기 시작했다. 방학이 시작되면서 연로한 어부들 잔치이던 포구도 아들놈 손녀들까지 옹기종기 모여 그물손질하는 모습이 더욱 정겹고 따뜻해 보였다. 그물 일 하는 사람들은 저마다 큰 기름통을 뚫어 만든 장작불 화로를 곁에 두고 있었다. 대화를 가만히 엿들어 보니 텔레비전에서 이따금 듣던 그런 함경도 사투리였다.
가을동화 촬영과 김일성 별장 있는 화진포 풍경
해안선을 따라 걷고 또 걸었다. 30여 분을 걸었을까, 화진포 해양박물관이 있었다. 개장 시간을 넘겼지만 서울에서 예까지 왔노라니 여직원은 친절히 문을 열어주었다. 바다 속을 죄다 옮겨 놓은 느낌이었다. 물개부터 크고 작은 해저 생물들이 전시돼 있었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고 했던가. 작은 조개에 오래도록 눈길이 머물렀는데 이름들이 참 곱기도 하지. 바퀴고둥 밤고둥 비단가리비 꼬마꼭지고둥 주름예쁜삿갓조개 각시언청이고둥 젓빛구슬우렁이 목주름고둥 이색구슬우렁이 점박이고둥 능선조개 갈고둥 깨고둥 앵무조개 장군나팔고둥.... 손톱 만한 조개들의 이름이 이렇게 고울 수가 있을까. 저 깊은 바다에 저리도 많은 오색찬란
한 고둥들이 살다니...
다시 펼쳐지는 드넓은 백사장은 화진포였다. 72만평에 달하는 광활한 석호 호수를 배경으로 한 울창한 송림의 해안이 바로 화진포이다. 호수에는 잉어 숭어 향어 가물치 등이 풍부하고 천연기념물 고니 떼와 철새들이 장관을 이룬다. 이름 그대로 백조의 호수이다. 화진포 해변은 수 만년 동안 조개껍질과 바위가 부서져 만들어진 모래로 이루어졌다. 이중환의 택리지에서도 격찬한 그 바다. 앞 바다에는 섬 하나가 떠 있었는데 이름하여 금구도. 망망대해가 너무 외롭지 않도록 아담하게 섬 하나가 떠 있는 것일까?
화진포는 지난 2000년에 방영됐던 가을동화 촬영장소이기도 하다. 어린 시절 은서와 준서가 추억을 쌓던 그 바다. 준서가 은서를 업고 마지막을 보낸 라스트신의 그 바다이다. 화진포에서 노을을 맞았다. 밤 깊도록 밤바다를 거니는데 해안 절벽에 불빛 반짝이는 집 한 채가 보였는데 그곳이 바로 김일성 별장이었다. 지금은 안보관으로 꾸며 놓은 그곳을 구경하다가 다시 송림 사이로 홀로 걸어나가는데 다리가 절여 왔다. 바다에 너무 푹 빠져 걸었던 탓이다. 다음 일정을 궁리하며 담배 하나 꼬나 물었다. 결국 택시를 불러 잡아타고 밤을 밝히는 흰 파도소리 가득한 해안선을 따라 다음 일정의 포구로 향했다. 낯선 항구에서 여장을 풀고 내일 다시 떠오를 아침해를 생각하며 잠자리에 누웠다.
■ 미니상식/ 등대와 등표에 대하여…… 대진항 가는 길
육지에 신호등이 있고 차선이 있듯 바다에도 일종의 신호등인 등대와 등표라는 것이 있다. 전문용어로는 항로표지라고 부르는데 크게는 '광파표지'로 일컫는다. 인간의 눈으로 형상과 색상에 의해 식별이 가능하도록 개발했다는 데서 유래한 용어이다. 야간에는 탑 모양의 등대 위에 설치된 불빛으로 확인한다. 다양한 불빛 주기로 항구와 항로를 알려준다.
기둥 모양의 등대가 아닌 암초 위에 설치된 구조물을 등표라고 부른다. 불빛이 있으면 등표, 불빛이 없으면 입표라고 부른다. 물에 떠 있는 것도 있는데 이것을 등부표라고 부른다. 암초나 수심이 얕은 곳을 알려주는 역할을 한다. 항로 우측에는 빨간색(우현표지)으로 선박이 왼쪽으로 항해하라는 표시이다. 반대로 녹색은(좌현표지)은 오른쪽으로 항해하라는 표시.
대진항 가는 길은 동서울터미널->대진(평일 4시간 소요. 성수기 5시간30분 소요)/속초시외버스터미널->고성 현내면 초도리 시내버스(10분 간격 운행/1시간 10분 소요).
승용차는 영동고속도로 주문진 나들목(7번국도)->속초->간성->대진/서울(6번 국도)->양평(44번 국도)->홍천->진부령->대대검문소 삼거리(7번 국도)->대진항.
고성군청 문화관광과(033-681-2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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