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가 있는 풍경] ⑥ 문정희, '첫눈'
- 새해 내내 기도처럼 내리는 눈발 같은 삶이길…
기도가 하늘에서 내려옵니다.
내 잃어버린 시간에
쓰러지는 눈빛으로
당신의 내의를 마련합니다.
조용히 그러나 뜨겁게 머뭇거리며
저만치서
눈감은 사랑
밤새도록 용납한
꿈이었다가
산이 되어
내 이름을 부르시는
아아 한 생애에 돌아오는
목소리입니다.
- 문정희, '첫눈' 전문
설을 앞두고 갑자기 서울바닥에 쏟아지는 눈발 따라 북악스카이로 향했다. 눈이 오면 설경을 아름다운 이곳을 찾곤 한다. 아들 녀석은 눈을 비닐봉지에 쓸어 담고 있었는데, 이유인즉슨 냉장고에 넣어두고 오래도록 눈싸움하기 위함이란다.
삼청터널에서 정릉으로 넘어가는 순간 빙판 길에서 차들이 갑자기 빙빙 돌며 박치기를 해댔다. 도랑으로 처박힌 승용차, 마주 오는 차에 뜬금없이 이마를 처박은 운전자도 모두 허허로운 웃음을 지었다.
함박눈 앞에서는 모두가 함박웃음이다. 그 때 이 시가 떠올랐다. "기도가 하늘에서 내려옵니다"라는. "내 잃어버린 시간에/쓰러지는 눈빛으로/당신의 내의를 마련합니다"라는. 차가운 눈발이 살갗 감싸안을 수 있는 내의가 되어 내릴 수 있다는 시인의 대단한 상상력...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돌부처가 흰 눈 속에서 웃고 있었다. 그렇게 포근히 쌓인 산에서 눈은 다시 "한 생애에 돌아오는/목소리"가 된다. 시각적 눈발이 청각적인 목소리로 휘날리는 시적 표현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문정희 시인은 다른 시에서도 '눈'을 '백설기'에 비유한 바 있다. 흰 시루떡 백설기는 잡귀를 쫓고자 100명에게 나누어주는 떡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설을 앞두고 모든 분들에게 백설기 같은 행복의 눈발이 내리길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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