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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가 있는 풍경 ⑤ (곽재구-사평역에서)

섬과 문학기행/시가 있는 풍경

by 한방울 2004. 2. 12. 1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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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라산 기차역(사진=섬문화연구소DB)

 

[詩가 있는 풍경] ⑤ 사평역에서

- 톱밥 난로처럼 서로에게 情주는 한해였으면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 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 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 두고
모두들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 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 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 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 지
그리웠던 순간을 호명하며 나는
한 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 곽재구, '사평역에서' 전문

한 해가 기우는데 괜스레 쓸쓸한 마음을 안고 동해안 일주에 나섰다. 정처 없이 떠돌던 길에 막차가 끊기면 하루도 소멸했다. '눈 시린 유리창'으로 내다보던 낯선 간이역에 내려 '청색의 손바닥'을 여관방 아랫목에 밀어 넣었다. 창밖에 눈발처럼 한 해의 아쉬운 기억들이 스쳐 지났다.

낯설음도 정들면 그리움으로 다가서는가. 동해 최북단 등대 아래서 아침해를 맞았다. 먼바다를 헤쳐왔을 파도가 저 바다에 햇무리를 풀무질했다. 모두가 함께 보듬으면 저렇게 뜨겁게 끓어오를 수도 있던 것을.

이 시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한결같이 가난하고 소외된 우리네 이웃들이다. 밤늦도록 막차를 기다리며 움츠린 가슴들은 삶에 지친 그림자이다. 피곤에 지치고, 감기에 쿨룩거리고, 아예 침묵하는 사람들의 군상. 저마다 무거운 삶의 무게를 감당하는 시간들이다.

알고 보면 누구의 삶인들 고달프고 힘들지 않으련. 살다보면 한 때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고 밝은 세상을 그리워하는 법이다. 그러나 회상에 오래 매달려본들 상처 입은 가슴뿐인 것을. 하여, 지금의 외로움과 수고로움을 파도처럼 털면서 내일을 위해 톱밥 한 줌씩을 던져보는 것이거늘.

서로 엉겨 타오르는 난로처럼 우리 서로에게 잔정을 내밀면서 불꽃 튀는 휴머니티를 만들어 보면 어떠할는지. 춥고 어려울수록 따스한 날들을 호명하며 삶의 기차를 타고 내일로 달려가 보는 것이다.

기다려도 기다리지 않아도 새해는 밝아왔다. 서로의 결핍된 사랑을 서로 메우면서 행복의 불꽃을 피워볼 때이다. 불꽃 파닥이면서 서로 어깨동무하며 달리는 저 철길처럼 그렇게 어깨를 펴고 희망의 기적소리를 불러제껴 보는 것이다. 그렇게 이 시대의 한복판을 달려가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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