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이야 '퀵서비스'이니 '택배'이니 하여 고향에 보내온 옥수수 갓김치 홍어 오징어 말림 따위도 쉽게 받아먹는 세상이다. 이런 일상 탓에 그것에 대한 고마움도 안타까울 정도로 쉬이 반감되곤 한다.
내 어릴 적 멀리 서울에서 보내온 고모의 손목시계를 방학 선물로 받기도 했고 얼굴을 알 수 없는 필리핀 누님으로부터 펜팔 편지에 묶인 책을 받았는가 하면 '우리들 세상'이라는 어린이 프로그램에 편지를 보낸 후에는 전국 곳곳에서 막무가내로 오는 동생 누나 형들의 편지를 받곤 했었다. 하두 편지가 많아 시골 우체국장으로부터 상을 받았는데 그 때 선물이 편지지 뭉치와 학용품 세트였다. 편지가 많이 오다보니 엇비슷한 이름의 이웃마을 사람의 편지까지 나에게 배달되곤 했는데, 언젠가는 원양어선을 탄 미국의 어느 아들이 어머님에게 소액환을 동봉해온 우편물이 우리 집으로 배달돼 덜컹 겁이 나서 집배원 아저씨를 뒤쫓아 가다보니 내가 먼저 그 마을 그 집에 도착해 배달하는 촌극도 있었다.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언덕길을 달려 내려가는 집배원 아저씨야 배달 코스가 여러 군데인지라 나보다 늦을 수밖에 없었던 듯 하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집배원 아저씨가 할머니집 골목길을 달려 내러오다가 사립문 밖에서 울려주던 자전거 브레이크가 마찰음 소리였다. 그 소리는 "상건아! 집배원 아저씨 왔다" 하는 신호음으로 들렸다. 간혹 다른 자전거 소리에 마당에 뛰쳐나왔다가 실망이 이만저만 아니었고 멀리 신작로 길을 달려온 아저씨를 텃밭에서 확인 한 후 진정 그 집배원 아저씨가 마당으로 들어설 적엔 배낭은 행복의 보따리였고 꿈꾸는 보물섬이었다. 아저씨의 얼굴은 늘 천사의 얼굴이었다. 아저씨는 꼬맹이에게 온 편지뭉치가 늘 신기하다는 눈치였다. 오늘은 그러한 먼 시골구석에서 어느 노(老)시인이 만년필을 소포로 보내왔다. 서울에서 맞이하는 집배원 아저씨이지만 그 만년필이 담긴 소포를 풀면서 그 옛날 어린 시절 추억까지 배달되어 온 느낌이었다.
어린 날 입학 선물로 혹은 졸업선물로 파카 만년필을 받을 때는 대단한 선물을 받는 것으로 알았다. 그 때 펜촉에 잉크 발라 쓰던 시절이었는데 그럴 필요가 없는 외제 만년필에 대한 자부심은 대단했던 듯 하다. 노시인께서는 작은 쪽지도 함께 보내왔는데, "박형! 늘 맑고 그윽한 그 눈망울을 마주하는 것은 나의 기쁨이요 무언가 좋은 일이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을 주곤 한다오"라고 씌어 있었다. 참으로 민망할 정도의 격려에 찬 과찬을 늘어놓고 계셨다.
최소한 그런 눈망울을 닦으면서 가능한 맑고 푸른 하늘을 많이 바라보며 살라는 뜻으로 다가왔다. 좋은 글 좋은 그림을 그리면서 세상을 더욱 따뜻하게 보듬고 살라는 뜻으로 가슴에 물살 일었다.
명주암투(明珠暗投)라는 말이 있다. 아무리 빛나는 명주(구슬)일지라도 어두운 밤에 집어던지면 아무 빛을 발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즉 어떤 귀중한 것일지라도 남에게 주는 방법이 바르지 못하면 오히려 원망을 산다는 뜻이다. 어제는 부패방지를 위해 공무원들이 친구와 만나 식사하는 것도 일정 금액 이상을 넘으면 제재를 받는다는 소식을 접했다. 언제부턴가 주는 일이 강제성을 띤 법적 감시대상이 되었다. 그래서 자정결의가 통과의례로 통했던 것이다. 누군가에게 주는 일은 행복한 일이다. 그런데 조건이 문제이다.
김장철 한 그릇의 김치를 안고 강을 건너 이웃마을 이장 댁에 배달 다녔던 나의 어린 시절의 그 빠알간 고추냄새의 김치다발이 아닌 '돈다발' '돈세탁' 이라는 단어로 전이되는 세상의 변화에 잠시 쓰라린 가슴을 쥐어 잡게 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선물이라는 것, 문제는 가는 선물이 오는 선물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아닐까. 행복은 무조건 가는 것이리라. 가없이 주고 더 없이 주어야 하는 것이리라. 선물은 그 사람의 길을 너그럽게 하며 또 존귀한 자의 앞으로 인도한다는 잠언의 표현처럼 친구가 되어 따뜻한 가슴이 전이되어 되어 오는 것이 아닐까. 오늘 너그러운 한 분의 시인에게 받은 만년필이 세상에서 어떻게 사랑을 구하고 베풀면서 진정한 친구가 되어 가는 것인가를 오래도록 되새김질하게 해주었다.
선물! 그것은 분명, 인생이라는 이름에 정갈한 마음으로 다가와 기쁨이라는 기름을 붓는 삶의 램프가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