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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상사 가는 길

섬과 문학기행/붓가는대로 쓴 글

by 한방울 2004. 2. 12.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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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상사 가는 길

박상건(계간 '오크노' 발행인)

저 산자락에 자욱한 이내처럼 내 마음에 알 수 없는 슬픔 자욱했다. 제삿날 사립문 밖 이슬비 내리듯 내 마음의 슬픔이 잔주름 지고 있었다. 서울을 떠날 때부터 내리던 빗줄기는 인월을 지나 지리산 속 깊이 들어설 때까지 차창에 한 뼘도 물러서지 않고 있었다. 빗줄기는 차 오르는 격정만큼 거셌다. 신열의 땀방울만큼 차창에 자욱했다. 어쩜, 잠재된 외로움이거나 세상을 똑바로 쳐다볼 수록 배타적인 자아의 '무지'였을 게다. 아니 '진한 고독'과의 싸움에서 오는 '편견'이거나, 고독함이 부르던 '불안감'과 '무감각' 때문이었을 게다. 그것이 사유의 핏줄을 응고시키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현란하고 잡동사니 가득한 생각을 데블고 실상사 도법스님을 찾아가는 길이었다. 사람이 마음을 가라앉히는 데는 명곡과 조용한 풍경, 멋진 향기 이 세 가지라고 하지 않았던가. 학창시절 방황할 때였을 게다. 어느 날 山門 앞에 걸린 '초발심'이라는 단어에 감동한 적 있었다. 사람이 늘 처음처럼 산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를 이후 나날이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터였다.

스님은 좌우 이데올로기와의 화해를 위해 천일기도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사 백일 째를 맞는 날이었다. 山門에 이르자, 거짓말처럼 마음을 해짓던 빗줄기가 멎었다. 스님은 청정한 산그늘에서 손수 키운 민들레차 한 잔을 끓여 건네주었다. 그윽한 향기의 여울을 타고 오는 스님의 말씀에 두어 시간 침잠해갔다. 보수와 진보가 엇갈리고 언론에 줄대며 사는 지식인에 대한 생각을 여쭙자, "양심적 윤리의식이나 삶의 문제를 바람직하게 다뤄 가는 지성의 척박함의 단적인 예"라면서 "순간의 논리에만 집착하고 건강한 가치의식이 안 보인다"고 꼬집으면서 이런 잘못된 삶의 뒤틀린 토양 탓에 모든 게 뒤틀릴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실천불교의 대가다운 진단이었다. 스님은 이 사회의 공동체적 의식의 전환이 필요할 때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인드라망'이라는 화두를 던졌다. 인드라망은 연기적(緣起的) 그물이란 뜻으로, '연기'는 모든 사물이 연결되어 있다는 뜻이요, '망'은 그물을 의미했다. 요컨대, '나'라는 그물코와 '너'라는 그물코가 서로 얽혀 공생하고 살아간다는 뜻이다.
스님은 이 실천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이 '욕망'을 극복하고 조절하는 일이라고 했다. 자기성찰 없는 삶의 질은 절대로 좋아질 수 없다고 했다. 욕망의 본질은 무지였다. 부처님 말씀을 빌리자면 "한 치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무지의 어둠이 인류를 덮고 있다". 하긴, 팔만대장경에 나와있듯이, 욕심은 만족을 모르는 불가사리이며, 고통을 부르는 나팔이다. 떠날 때 스님에게 좋은 말씀 한마디 부탁했다. '세계일화 수희찬탄'이라고 했다. 우주 자체가 웅대한 한 송이의 연꽃이니 우리들 삶은 아름다운 꽃잎, 상대의 기쁨을 함께 기뻐하고 상대의 좋은 점을 기쁜 마음으로 찬탄한다는 뜻이었다.

떠나올 때 바라보는 실상사 또한 그랬다. 지리산 분지에 자리한 실상사를 에워싸고 있는 산줄기는 영락없이 연꽃 모양이었다. 요사채 뒷뜰에 뚝뚝 지던 꽃잎들도 선연했다. 그것은 허무 속에 타오르는 불꽃이었다. 지붕을 성기게 이으면 비가 새듯이 어쩜, 그날 내 마음속에는 성긴 욕망의 빗물들이 새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만물은 허무에서 나와 무한을 향해 질주한다고 했다. 그래, 그렇게 매화 꽃잎처럼 다시 타오르고 싶다. 마음 낮춰 낮게 낮게 누군가를 향해 다가서고 싶다. 이제는 뜨겁고 얼싸안고 싶다. 가능하다면 연등 하나 달아매듯 오래도록 불 밝히는 그대의 영혼이고 싶다.

<울산불교신문> 2002.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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