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가 있는 풍경 29] 송수권作, ‘아내의 맨발’
앞만 보고 달리면서 잠시 잊혀진 이름, 아내여!
뜨거운 모래밭 구덩을 뒷발로 파며
몇 개의 알을 낳아 다시 모래도 덮은 후
바다로 내려가다 죽은 거북을 본 일이 있다
몸체는 뒤집히고 짧은 앞발바닥은 꺾여
뒷다리의 두 발바닥이 하늘을 향해 누워 있었다
유난히 긴 두 발바닥이 슬퍼 보였다
언제 깨어날지도 모르는 마취실을 향해
한밤중 병실마다 불꺼진 사막을 지나
침대차는 굴러간다
얼굴에 하얀 마스크를 쓰고 두 눈은 감긴 채
시트 밖으로 흘러나온 맨발
아내의 발바닥에도 그때 본 갑골문자들이
수두룩하였다
- (송수권, ‘아내의 맨발- 갑골문’ 전문)
거북의 발바닥은 온몸을 지탱하며 기어 다녔던 탓에 말발굽처럼 주름지고 주름진 만큼 무감각하게 탄탄해졌다. 순결한 시절에 꽃다운 나이로 시집 와서 간지럼을 타며 첫날밤을 보냈을 그 아내의 발바닥을 시인은 환갑을 넘기고서야 비로소 마주치고 있다.
그것도 “나이 쉰 셋/정정한 자작나무, 백혈병을 몸에 부리고/여의도 성모병원 1205호실”에서 생사를 오고가는 수술실을 향하는 침대차에서 아내의 발바닥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얼굴에 하얀 마스크를 쓰고 두 눈은 감긴 채/시트 밖으로 흘러나온 맨발”의 아내여.
가난한 시인을 위해 “진흙밭 삭은 잎새 다 된 발”, “말굽쇠 같은 발, 무쇠솥 같은 발”. 아내에게 못 다해준 세월들이 너무 원통해 “잠든 네 발바닥을 핥으며 이 밤”을 보내지만, 아내는 그 혓바닥의 감촉마저 느끼지 못한다. “캄캄한 뻘밭을 내가 헤매며” 홀로 울 뿐이다.
이 광경은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운명의 파노라마이다. 풍진세상을 살아가면서 가장 든든한 후원자이자 동반자인 아내. 너무 가까이 있음에 너무 긴 세월 앞만 보고 달리면서 잠시 잊어버렸던 이름 아내여. 이따금 한번씩 탈무드의 경구를 되새김하며 살 일이다. “남자의 집은 아내이다”
글, 사진: 박상건(시인. 계간 섬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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