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마음 머물지 못할 때 걷던 그 강둑길

섬과 문학기행/시가 있는 풍경

by 한방울 2005. 6. 21. 10:56

본문


 

[詩가 있는 풍경 27] 박재삼 作, ‘울음이 타는 가을 강’

마음 머물지 못할 때 홀로 걷던 유년의 그 긴 강둑길



마음도 한 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가을 햇볕으로나 동무삼아 따라가면,

어느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 나고나.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강을 보겄네

저것 봐, 저것 봐,

네보담도 내보담도

그 기쁜 첫사랑 산골 물소리가 사라지고

그 다음 사랑 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고,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와가는,

소리죽은 가을강을 처음 보겄네.


- (박재삼, ‘울음이 타는 가을 강’ 전문)



이 시는 1974년에 나온 시집 ‘천년의 바람’에 실린 시이다. 그 시절 농촌의 강둑이며 바다는 맑은 빛깔에 서럽도록 푸른 들풀이며 나무들이 찰랑였다. 이 시를 읽을수록 푹 빠져 드는 것은 유년의 추억이 이 장면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이다.

영암 월출산 아래 분교 사택에서 살았던 시절이 있었다. 사택은 푸른 숲으로 둘러싸여 진종일 새소리와 함께 자고 일어나던 시절이었다. 숲을 건너면 그대로 긴 강둑이었다. 그랬다. 마을과 떨어져 있던 사택으로 돌아오면 늘 홀로였던 나는 까닭 없이 서럽고 외로워 손풍금을 쳤고, 그러다가 다시 긴 강둑을 따라 걸었다.


“마음도 한 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가을 햇볕으로나 동무삼아 따라가면,”은 그대로 그 시절 유년의 재현이다. ‘울음’은 자연적이다. 돌멩이 사이 비틀고 물풀 쓰다듬으며 찰랑찰랑 흐르는 물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그냥 ‘울음’이 나온다. 그런 섬세하고 여린 감성의 상징어인 ‘울음’은 이따금 슬픔이 되고 아픔이 되기도 한다.


그 울음의 뿌리는 외로움이나 그리움이다. 그런 것들이 녹아가는 것이 ‘물줄기’라는 기호로 상징되고 다가오는 것이다. 그런 열정 혹은 그리움이 미치고 환장할 정도가 되면 강의 끝자락인 바다에는 노을이 풀무질되고 있었다. ‘울음이 녹아나고’, 마침내 뜨거움으로 ‘미칠 일’하나 뿐이다. 삶도 사랑도 그렇게 뜨거워지고 나면 수평선 저편으로 지는 해는 뒤로 하고 터벅터벅 그 강둑을 따라 귀가하곤 했다.


‘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강’ 건너편이 망월리였다. 이름만 대면 다 알 수 있는 잘 나가던 가수와 배우가 태어난 전형적 농촌이다. 그 아버지가 이장이었고 김장철 어머님이 담가준 김치포기를 보듬고 그 집을 들락거리곤 했는데 그 마을로 가는 길은 강의 징검다리를 건너야했다. 이 마을과 우리 가족이 친해진 데는 이 징검다리가 각별하게 징검다리 역할을 했다.


폭우가 쏟아지던 어느 날, 사택 뒤편 언덕배기에서 물에 잠긴 징검다리를 사이에 둔 채로  저편 마을 사람과 이 편 아이들이 안타까운 손짓만 해댔다. 그래서 어머님은 이 애들을 사택으로 데리고 와서 하룻밤을 재웠다. 장롱에서 온갖 옷가지를 꺼내 제 몸에 맞지 않은 옷을 입고 있는 조무래기들의 풍경은 가관이었다.


그렇게 비가 오는 날이면 이 마을 아이들은 당연히 사택으로 가는 날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햇살 쨍쨍한 날에는 그 징검다리를 서로 힘껏 벌여서 가재를 잡으며 친해졌다. 서로 먹을 것을 배달하러 오고 가는 사이가 되었다. 나는 링겔 병에 물풀과 붕어를 넣어두고 그 징검다리 아래 파묻어 두었다가 살아있는지 여부를 확인하는 일이 방과 후의 일상이 되었다.


그렇게 2년의 세월이 흘러 아버님은 다시 낭주골이라는 독천 산자락 아래로 전근을 가게 되었다. 나도 또 다시 이별을 해야 했다. 달구지에 마을 아이들을 태우고 기차놀이를 하던 그 강둑, “마음도 한 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 긴 외로움을 눌러 죽이며 걷던 그 강둑에서서 이삿짐 동여맨 트럭을 향해 손 흔들며 눈시울 붉히던 마을 사람들이 눈에 선하다. 망월리 저 편에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처럼 오래도록 내 가슴에서 불 밝히고 있다.


지금, 그 징검다리 아래 링겔 병에 갇힌 붕어의 일생이 어떻게 되었을까. 저희들의 세상으로 방생하지 못하고 떠난 원죄가 이 시 한편을 읽을 때마다 쿵쿵 가슴 한 짝을 두들긴다. 토속적 시어와 인간의 알 수 없는 한의 깊이로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는 이 한편의 시에서 많은 그리움과 서러움을 되새김질한다. 누구든 어린 시절의 추억을 되살리기에 충분한 시편이다.


글․사진: 박상건(시인. 계간 섬 발행인)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