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풍경 28] 오세영作, ‘바닷가에서’
사는 길 막막하거든 부서지는 파도를 보아라
사는 길이 높고 가파르거든
바닷가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를 보아라.
아래로 아래로 흐르는 물이
하나 되어 가득히 차오르는 수평선.
스스로 자신을 낮추는 자가 얻는 평안이
거기 있다.
사는 길이 어둡고 막막하거든
바닷가
아득히 지는 일몰을 보아라
어둠 속에서 어둠 속으로 고이는 빛이
마침내 밝히는 여명.
스스로 자신을 포기하는 자가 얻는 충족이
거기있다.
사는 길이 슬프고 외롭거든
바닷가.
가물가물 멀리 떠 있는 섬을 보아라.
홀로 견디는 것은 순결한 것,
멀리 있는 것은 아름다운 것,
스스로 자신을 감내하는 자의 의지가
거기 있다.
-(오세영, ‘바닷가에서’ 전문)
해마다 섬에서 시인들과 일반인들이 어우러져 섬사랑시인학교 캠프를 연다. 올 여름에는 덕적도 바닷가에서 주민들과 함께 촛불 시낭송을 했다. 분교 아이들은 신기한 눈빛으로 종이컵 안에서 피어 문 작은 불꽃들이 온 강당을 밝히는 모습에 신기한 눈빛이다.
조무래기를 무릎에 보듬은 주민들 앞으로 오세영 시인이 촛불을 켜들고 나와 시 한편을 낭송했다. “사는 길이 높고 가파르거든/바닷가/하얗게 부서지는 파도를 보아라.” ..... 환갑을 넘긴 중후한 삶의 나그네가 던진 화두였기에 저마다 경건하고 큰 파도소리로 다가온다.
캠프장 밖은 바로 바닷가였다. 밀려오는 파도소리 따라 시인의 낭송은 계속된다.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를 보아라./아래로 아래로 흐르는 물이/하나 되어 가득히 차오르는 수평선./스스로 자신을 낮추는 자가 얻는 평안이/거기 있다.”
아래로 낮추는 파도소리와 스스로 낮추는 사람들과 비교한 사이에 촛불 속에 비추는 노시인의 음성은 더욱 간절하게 들려온다. 사람들은 땀방울 범벅이가 되어 정상으로 정상을 향한 걸음걸이를 하며 살지만 저 파도는 정말로 아래로 부서지고 있음을 안다. 파랗게 철썩이던 파도는 이내 하얀 물보라로 부서져 백사장의 여백에 젖어들고 있음을 안다.
하룻날 썰물과 밀물이 두 차례씩 비우고, 비웠기에 그 빈 자리에 채울 수 있음을 안다. 그래서 바다는 수평을 이루는 것임을 안다. 내 욕망을 위해 타인의 욕망을 강요하지 않은 채로 공전하는 바다. 스스로 낮춰서 생성하고 소멸하는 바닷가의 풍경.
“사는 길이 어둡고 막막하거든/바닷가/아득히 지는 일몰을 보아라.” 누구든 온 바다 뻘겋게 물들이는 적막한 바닷가에서 침묵할 수밖에 없다. 적멸의 순간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영원한 끝은 아님을 안다.
“어둠 속에서 어둠 속으로 고이는 빛이/마침내 밝히는 여명./스스로 자신을 포기하는 자가 얻는 충족이/거기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지금 지는 것은 영원히 지는 것이 아님을 안다. 그래서 슬퍼하거나 절망할 일이 아니다. 지는 해는 내일 다시 떠오를 것임으로.
“사는 길이 슬프고 외롭거든/바닷가./가물가물 멀리 떠 있는 섬을 보아라.” 내가 홀로이면 섬도 섬으로만 다가서는 법. 외로울 때 지극히 외로운 섬으로 그리울 때 지극히 그리움에 잠 못 이루어 파도만 부서제끼는 것으로만 보인다. 슬픔만 더욱 도지는 외딴 섬으로 보인다. 그래서 어른들은 예로부터 길 뜬 삶에 저려진 나그네의 삶을 강조해왔을 터.
고독은 감내했을 때 비로소 고독으로서 빛을 발한다. “홀로 견디는 것은 순결한 것,/멀리 있는 것은 아름다운 것,/스스로 자신을 감내하는 자의 의지가/거기 있다.” 이제 섬은 홀로 아리랑이 아니다. 올망졸망 섬들은 바다와 동행하며 철썩철썩 장단을 맞추며 휘몰이를 하고 있다. 생동하는 섬, 희망의 섬이다. 한 편의 시와 섬은 그렇게 하나로 출렁이고 있었다.
박상건(시인. 계간 섬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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