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가 있는 풍경 24] 이육사 作, '청포도'
- 청포도 사랑과 희망
내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 가는 계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절이 주절이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 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 (이육사, ‘청포도’ 전문)
1904년에 태어나 44년에 운명했으니 시인은 불혹의 문턱에 청초한 생을 마감한 것이다. 일제에 항거하며 17번 감옥에 갇혔던 시인이고 보면 이 시가 전해준 청명한 삶이나 철학이 얼마나 고고한 것인가를 되새김질하게 해준다.
생전에 34편의 시를 남겼던 시 가운데 1939년 <문장>에 발표했던 이 시는 청포도가 익어가는 계절적인 감각에다가 조국의 광복에 대한 희망과 환희를 상징적으로 담고 있는 대표작 가운데 하나이다.
시인의 고향 경북 안동, 청포도가 익어가는 그 고향마을은 분명 아름다웠을 게다. 유년의 사랑이며 추억이며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그런 꿈들이 알알이 들어와 박히는 고향의 풍경이었을 것이다.
가정의 달, 가족과 함께 모처럼 짬을 내서 서울근교 풍경을 따라 드라이브를 마치고 저녁 찬거리를 사려 마트에 갔다. 순간, 가슴에 파도소리를 들려주는 것이 있었으니,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는” 것이 있었으니, 식품 코너의 청포도였다.
푸른 채소들이며 방울토마토 참외 수박 파인애플 등 각가지 싱싱한 과일들이 진열된 한 가운데 이슬 머금은 듯 초롱초롱한 눈동자를 돌리던 청포도. 오래 전부터 전해준 이 시의 영상 이미지 탓에 그날 청포도의 눈빛은 더욱 강렬하게 와 닿았을 터이다.
‘청포도’라는 시는 조국 광복을 염원하는, 그리고 평화로운 삶을 소망하는 내용이다. 그러면서 특히 주목받은 것이 색채의 대조를 잘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마트에서도 금방 눈에 띄었던 것은 이러한 푸른색이 주는 강렬한 이미지 탓이다. 칠월이라는 무더위 속의 상큼한 청포의 대조도 그렇다.
세상이 좋아져 봄날에도 청포도를 만날 수 있게 되었고, 식민지 시절의 ‘고달픈 몸’의 상징이 된 청포도이지만 시의 흐름 속에서는 어둠을 밝히는 등불처럼 묘사되고 있다. 특히 푸른 빛, 흰 돛단배, 하늘, 푸른 바다, 청포, 모시 수건, 은쟁반 등의 시어들이 시 전체 풍경을 더욱 맑고 밝은 빛깔을 우려내주는 장치로 쓰이고 있다.
마트에서 돌아와 우리 가족은 식탁에서 일부러 은쟁반에 청포도 몇 송이를 놓고 이 시를 이야기했다. 순간, 문득 나의 유년시절이 떠올랐다. 교육자이시던 아버지 탓에 초등학교 시절을 거의 농어촌 분교사택에서 보냈었다.
3학년 때는 영암 월출산 산자락 아래 있는 영암 농업중고등학교 분교에서 살았는데 숲 속에 집이 있고 주위에는 온통 학교 실습장이었다. 운동장 울타리 삼아 마련된 곳이 바로 청포도 실습장이었다. 아직 익지도 않은 포도송이를 따 먹는 일은 방과 후의 소일거리였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그 포도밭으로 갔던 이유는 더 있었다. 포도송이 위로 펼쳐지던 그 푸른 하늘, 하늘가를 맴돌던 산새들의 비상, 그리고 포도밭 주위에 거대한 몸짓으로 솟구쳐 재잘재잘 잎새들이 켜대던 바람소리.... 그것은 자연의 포근함이며 평온함, 그 자체였다.
공존의 숲에서 마주한 푸른 것들은 죄다 희망이었다. 푸른 하늘에 돛단배처럼 흘러가던 구름에 넋을 놓고 있었던 것은 어쩜, 그 무엇인가에 대한 외로움과 그리움이 깊었기 때문일 거다. 이웃 없던 사택 시절에 친구들을 찾아 민들레 흐드러지게 핀 강을 건너거나 송진 내음 가득하던 산을 넘어 친구들을 찾아가야만 했던 그리움의 목마름 같은 것이 있었다.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청포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시대상으로 광복에 대한 그리움이지만 어쩜, 인간의 본질적이고 원초적인 고향에 대한 그리움, 인간에 대한 그리움이 깊게 묻어 있는 것일 게다.
고향을 그리워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게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약지이든 강자이든 그 누구든 그리워하는 것은 바로 고향이다. 청포도 사랑은 그래서 고향사랑이다. 오늘 그렇게 알알이 알알이 청포도를 까다가 푸른 산 숲으로 알알이 알알이 물장구를 치며 흘러내리던 고향의 계곡물 소리 따라 아련한 향수에 젖어가는 것이다.
글․사진: 박상건(시인, 계간 섬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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