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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흔들리고 싶다

섬과 문학기행/시가 있는 풍경

by 한방울 2005. 4. 18. 1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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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있는 풍경 23] 구재기 作, “가끔은 흔들리고...”


지난밤의 긴 어둠

비바람 심히 몰아치면서, 나무는

제 몸을 마구 흔들며 높이 소리하더니

눈부신 아침 햇살을 받아 더욱 더 푸르다

감당하지 못할 이파리들을 털어 버린 까닭이다

맑은 날 과분한 이파리를 매달고는

참회는 어둠 속에서 가능한 것

분에 넘치는 이파리를 떨어뜨렸다

제 몸의 무게만큼 감당하기 위해서

가끔은 저렇게 남모르게 흔들어 대는 나무

나도 가끔은 흔들리며 살고 싶다

어둠을 틈 타 참회의 눈을 하고

부끄러움처럼 비어있는 천정(天頂)을 바라보며

내게 주어진 무게만을 감당하고 싶다

홀가분하게 아침 햇살에 눈부시고 싶다

대둔산 구름다리를 건너며

흔들리며 웃는 게 눈부실 수 있다

가끔씩 온몸을 흔들리며

무게로 채워진 바위

그 무게를 버려가며 사는 게 삶이다

지난날들의 모자가 아직 씌워져 남아있는

푸념의 확인, 구름다리 밑의 아찔한 거리로

가끔은 징검징검 흔들리며 살고 싶다


- (구재기, ‘가끔은 흔들리며 살고 싶다’ 전문)


봄이 오는 길목에서 장약용 선생의 유배지였던 강진 토하골에서 미곡처리장을 운영하는 손곱친구로부터 4㎏짜리 유기농 쌀 두 포대가 왔다. 요즈음 이 친구가 정성들여 보내준 토종쌀로 우리 가족은 아침 식탁을 맞는다. 그러나 아침마다 즐거움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친구가 언젠가 섬 여행길에 동행하면서 민박집에서 주고받던 술잔을 부딪치며 내뱉던 말 “쌀이 안 팔려 죽겠다”라는, 그 한마디가 오래도록 귓전에 맴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디 안 팔리는 게 쌀 뿐이겠느냐? 요즈음은 모두가 힘들어하는 것 같다”는 한마디가 고작 친구의 위로였다. 그래서 4월 봄날에는 ‘가끔은 흔들리고 살고 싶다’는 이 시를 읊조려 보게 된다. 청명을 시작으로 봄을 여는 4월이다. 청명은 날이 풀리기 시작해 화창해지는 시기로, 농가에서는 분주해지기 시작한다.


아지랑이가 힘껏 대지의 향기를 끌어 올릴 시기이건만 수십 년 동안 가꾼 아름드리 숲들이 산불로 잿더미가 되고 완연한 봄빛 대신 황무지의 시름으로 바꾸어 놓고 있다. 살다보면 이렇게 긴 겨울나기를 하고서도 봄이 왔다고 소리치지 못할 때가 많다. 


그래서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고 부르고 싶은 사람들이 많을 터이다. 우리에게 4월은 유난히 많은 것들을 기리고 다짐하고 싶어 하는 달이다. 임시정부수립일, 4․19혁명 기념일, 충무공 탄신일, 보건의 날, 과학의 날, 정보통신의 날, 법의 날, 장애인의 날 등이 포진해 있는 달이 바로 4월이다.


그래서 엘리어트가 황무지에서 노래한 ‘잔인한 달’ 4월의 의미를 다시금 되씹어보게 한다.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추억과 욕정을 뒤섞고/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이 시는 우리의 마음을 차분하게 다스려주는 측면이 있다. 참회와 일깨움을 필요할 때라고 일러주고 있는 것. 조용히 우리를 뒤돌아보면 “네 탓이오”라는 무감각과 무관심, 절망과 시기질투의 흔적을 발견하곤 한다. 그것이 때로 문제의 본질일 수 있다는 인식을 하게 한다.


앞서 인용한 구재기 시인의 시는 노장사상을 밑바닥에 깔고 있다. 비움의 철학이다. “지난밤의 긴 어둠/비바람 심히 몰아치면서, 나무는/제 몸을 마구 흔들며 높이 소리하더니/눈부신 아침 햇살을 받아 더욱 더 푸르다/감당하지 못할 이파리들을 털어 버린 까닭이다”라는. “참회는 어둠 속에서 가능한 것/분에 넘치는 이파리를 떨어뜨렸다/제 몸의 무게만큼 감당하기 위해서/가끔은 저렇게 남모르게 흔들어 대는 나무/나도 가끔은 흔들리며 살고 싶다”라고 노래한다.


우리 흔들릴 때까지 흔들려 보자. 그러나 이 봄날 너무 슬퍼하거나, 절망하지는 말자. 키에르케고르에 따르면 절망은 다시 반항을 불러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절망은 다시 절망을 부른다는 것이다. 이 봄날에 꽃처럼 아름다운 향기로운 희망을 소망해보자. 희망은 희망을 부르는 법. 희망은 가능성에 대한 정열을 이름이니. 이 봄날 모든 것이 채우는 범주에서 바라보지 말고 찬란한 봄날을 소리 없이 스스로 내려놓는 낙화의 의미도 되새김질해보자.


“가끔씩 온몸을 흔들리며/무게로 채워진 바위/그 무게를 버려가며 사는 게 삶”이고, “지난날들의 모자가 아직 씌워져 남아있는/푸념의 확인, 구름다리 밑의 아찔한 거리로/가끔은 징검징검 흔들리며 살고” 싶은 게 우리네 인생이 아닐까.


다산 정약용은 1809년 가뭄에 겨울부터 이듬해 봄을 거쳐 입추가 되도록 들판에는 풀 한포기 없던 강진 들판에 유랑민의 행렬이 이어지자, 지식인 선비로서 참담함을 어쩌지 못하고 시가(詩歌)로 읊조리곤 했단다. 그것은 “풀벌레와 함께 울면서 바른 이성과 감성으로 천지의 화기(和氣)를 잃지 않기 위한 일”이었단다. 그런 시편을 모은 것이 ‘전간기사’라는 것이다.


이 봄날 강진의 친구, 산불 피해를 본 이름모를 산촌 사람들 그리고 이도저도 아닐지라도 봄은 봄이로되 봄이 아니라고 느낀 모든 분들에게 “홀가분하게 아침 햇살에 눈부시고 싶”은 그런 봄날을 기다려보자고 말하고 싶다. 그러니 다시 쇠스랑 콱, 콱 찍어쌓으면서, 절망이 썩혀낸 두엄더미를 이 봄의 들녘에 뿌려보자고. 그렇게 희망의 시간을 일구어 보자고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다. 


글․사진: 박상건(시인, 계간 섬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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