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풍경이 있는 아침] ⑪정호승, ‘기쁨이 슬픔에게’
무관심과 흘릴 줄 모르는 너의 눈물을 위해, 기다림을 주겠다.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
겨울밤 거리에서 귤 몇 개 놓고
살아온 추위와 떨고 있는 할머니에게
귤 값을 깎으면서 기뻐하던 너를 위하여
나는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 주겠다.
내가 어둠 속에서 너를 부를 때
단 한 번도 평등하게 웃어 주질 않은
가마니에 덮인 동사자가 다시 얼어 죽을 때
가마니 한 장조차 덮어주지 않은
무관심한 너의 사랑을 위해
흘릴 줄 모르는 너의 눈물을 위해
나는 이제 너에게도 기다림을 주겠다.
이 세상에 내리던 함박눈을 멈추겠다.
- 정호승, ‘기쁨이 슬픔에게’ 중에서
1979년 창작과비평사에서 19번째로 출간한 ‘기쁨이 슬픔에게’라는 첫 시집의 표제작이다. 시인은 ‘슬픔’을 이타적 존재, 소외된 이웃,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로 표현한 반면에 ‘기쁨’은 이기적 존재, 타인에게 무관심한 몰인정한 마음으로 교차시켜 시상을 전개했다.
나는 1984년 상경하여 종각역 리어카에서 팔던 카세트 시낭송 테이프를 샀는데 그 시모음집에 들어있던 이 시를 구로공단 후미진 단칸방에서 밤새 반복적으로 감상했다. 세상 밑바닥 정서를 그대로 전해주는 울림이 온몸에 전율했다. 억압된 사회적 분위기 탓에 두 주먹 불끈불끈 쥐게 했다. 시낭송 테이프가 유행하던 그 시절, 작품성과 함께 문학대중화에 크게 기여했다.
시인은 “이 어렵고 괴로운 세상을 살아가면서…나는 이 시대의 한 사람의 시인으로서 얼마만큼 슬픔과 기쁨을 함께 나눌 수 있을 것인지” 라고 후기에서 고백했다. 시인은 ‘슬픔을 위하여’라는 시에서 “슬픔을 위하여/슬픔을 이야기하지 말라/오히려 슬픔의 새벽에 관하여 말하라”, “슬픔이 우리들을 완성하기까지는/슬픔으로 가는 새벽길을 걸으며 기도하라/슬픔의 어머니를 만나 기도하라”라고 노래했다. 그래서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 “슬픔의 힘에 대한 이야길하며/기다림의 슬픔까지 걸어가겠다”라고 노래한 것.
사회 비판의식을 담아내면서 서정성을 잃지 않는 이 작품은 세월이 지나도 변하지 않은 우리네 삶과 진정한 슬픔과 위안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되새김질케 해주고 있다.
글, 사진: 박상건(시인. 동국대 언론정보대학원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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