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진강(사진=광양시 제공)
[시와 풍경이 있는 아침] ⑫ 박재삼, ‘울음이 타는 가을 강’
마음 머물지 못할 때 홀로 걷던 그 강둑길
마음도 한 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가을 햇볕으로나 동무삼아 따라가면,
어느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 나고나.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강을 보겄네
저것 봐, 저것 봐,
네보담도 내보담도
그 기쁜 첫사랑 산골 물소리가 사라지고
그 다음 사랑 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고,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와가는,
소리죽은 가을강을 처음 보겄네.
- 박재삼, ‘울음이 타는 가을 강’ 전문
1974년에 나온 시집 ‘천년의 바람’에 실린 작품이다. 나는 이 시를 읽으면서 유년의 추억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초등학교 때 전남 영암 월출산 아래 분교 사택에서 살았다. 사택은 푸른 숲으로 둘러싸여 진종일 새소리가 지저귀고 뒤편은 월출산에 흘러온 물줄기 따라 긴 강둑이 바다로 이어졌다. 마을과 떨어진 사택이라 방과 후면 늘 홀로였다. 까닭 없이 서럽고 외로운 날에는 강둑을 따라 터벅터벅 내려갔다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마음도 한 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가을 햇볕으로나 동무삼아 따라가면,” 돌멩이 사이를 비틀고 물풀 쓰다듬으며 흐르는 물소리도 ‘울음’으로 들려왔고, 노을이 지면 소년의 속울음도 뜨겁게 타올랐다.
‘울음이 녹아나고’, 마침내 뜨거움으로 ‘미칠 일’ 하나 뿐인 것은, 우리네 삶이고 사랑이다. 삶도 자연도 세상에 태어나 기쁨과 슬픔의 강물로 뒤척이면서 낙엽지고 눈 내리고 다시 새 봄을 잉태한다. ‘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강’은 그런 삶을 뒤돌아보게 한다.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 속에는 가족 공동체의 그리움과 인간은 영원할 수 없다는 진리를 되새김질케 한다.
글: 박상건(시인. 동국대 언론정보대학원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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