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의여대 전기철 교수의 새 시집‘누이의 방’이 실천문학사에서 나왔다. 지금까지 선보인 시집과의 달리 쉬운 시어를 발굴하거나 차용했다. 특히 가족사를 솔직하게 털어놓는 대목이 눈길을 끈다. 사회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견지해온 시인의 신념이나 가치관의 본질은 일관성을 유지하면서, 세상을 보는 눈은 더 넓고 깊어졌다.
슬픈 가족사 담담하게 노래
시집의 발문을 쓴 우대식 시인은 먼저 가족사에 주목하고 이를 비중을 두고 기술하고 있다. 이를테면“배추를 다 팔지 못해 돌아오지 못하는 어머니”(한여름 밤의 꿈),“전쟁이 끝나도 돌아오지 못하는 아버지”(발해의 말 장수),“창문이 없는 영혼”(풀 하우스),“술집을 전전하는 나”(키치), 불행한 과거를 들쑤시고 살아가는 누이(부러진 봄) 등이 그렇다.
이러한 문장은 이 시집 전체를 관통하는 시인의 정서이면서 시집을 해독하는 키워드이자 정서적 철학적 관계망이다. 특히 표제작‘누이의 방’은 아내와 함께 백화점에 갔다가 가격이 너무 비싼 옷을 집는 아내를 바라보면서, 이혼하고 두 아이를 혼자 키우면서 팔십 만 원 짜리 간병인으로 살아가는 누이동생 얼굴과 대비시켜 가락을 깔아 잔잔한 스토리 전개를 긴장감 있게 끌어나가 독자의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누이의 한과 정치인 아버지
우리 민족 정서에 어머니와 누이는 동일성을 갖는다. 이는 한(恨)과 극복의 정서를 품고 있는 대표적 시어이다. 강물처럼 파도처럼 출렁일 수 있는 이 모성애와 민족정서를 더 길게 끌어가지 않고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게 하는 간결한 풍경처리도 이 시인의 시 쓰는 독특한 방법이다. 전기철 시인은“아내와 저만치/까맣고 조그만 0을 달고”,“둘이서 말없이 지하철을 타”고 가면서“오빠, 물속에서 누가 오래 찾을 수 있는지 내기할래?/백만원이다!”이라며 과거 파노라마 속으로 반전되는 대목이 더욱 그렇다.
이 대목은 시의 반전이라는 묘미가 있지만 스토리텔링 기법상 이야기가 갑자기 뚝, 끊어져서 커뮤니케이션의 단절이라는 단점을 노정한다. 커뮤니케이션에서 메시지는 전달의 명료성과 연속성을 통해 설득력을 얻는 메신저이다. 우대식 시인은 이러한 단절 현상을 시인의 어린 시절 트라우마에서 찾았다.
“아버지는 위험한 야당 정치인이나 따라다니느나/집에는 코빼기도 내밀지 않았고/어머니는 미장원에 가서 처녀 적/미모에 대한 거짓말을 늘어놓느라/밤이 늦도록 돌아오지 않았다”라는‘풀 하우스’,“나는 먼 왕조의 위장 간첩/내 안에 역사가 넘쳐/질질 끌고 다니는 기억들 때문에/두 뒤는 서로 다른 소리를 듣고/머릿속에서는 풀이 자란다”는‘굿모닝 충무로’ 등의 작품을 들어 시인의 뿌리 깊은 상처와 현실 부정 문제를 거론했다.
지식인의 고뇌와 방황
그러한 해석이 맞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지식인의 현실적인 고뇌와 방황의 자기고백이라고도 볼 수 있다.‘보일 듯 말 듯’,‘말할 듯 말 듯’묵언과 적멸의 의미를 일상에서 체득하며 사는 전기철 시인. 불교적 삶을 지향한 그가 시에서는 최대한 자제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독실한 천주교인인 유안진시인은 시를 불교적으로 수용하고 표출한다. 두 사람의 특성은 안으로 인고의 세월을 살아온 당사자들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전기철. 진보적 시인으로서 오늘을 살아가는 고뇌, 진보적 교수로서 사학재단 교수사회에서 살아가는 고뇌, 시골출신 가장이 도시인 가족을 책임지며 살아가는 고뇌...태생적 한계와 현실적 한계를 극복할 수 없는 이 시대에 분노하는 지식인의 리얼리티의 속살, 아픔의 속살 같은 것들이 이 시집에서 단말마처럼 들려오는 이유는 왜일까.
그런 일단의 표출일까? 점점이, 켜켜이 쌓인 남녘해안 출신 시인의 정한(情恨)이 마침내 이렇게 노래되고 있는 것은 말이다.
“아직 나는/유년의 대륙을 찾지 못해/고독을 어깨에 짊어지고/증오를 직업으로 삼은 채 갈 곳을 찾지 못하고 있다//왜 이렇게/그리움은 쉽게 마모되고/희망은 마약인가./가진 자들이 사이코패스가 되어 눈을 부라리는/엄혹한 세상에서/나는 저주받은 시나 쓴다.”(‘플라타너스’ 중에서)
이 시에서 등장하는‘유년의 대륙’,‘고독’,‘증오’,‘그리움’,‘희망’,‘마약’,‘가진 자’,‘사이코패스’,‘엄혹한 세상’,‘저주’,‘시’등은 살아온 날만큼 감정기복이 심한 자기고백의 함의어라고 해도 괜찮을 것 같다. 이 시어들은 모두 극과 극을 달린다. 어두운 부분을 빼면 밝음과 희망만 남는데 굳이 그렇게 처리하지 않고 희노애락을 다 섞었다. 삶도 자연도 다 마모되어 갈 때‘희망은 마약’이 아니냐고 반문한다.
50년대 출생한 장년의 가슴앓이
화자는 그렇게 뒤범벅된 이 사회 일원이고 이 숨 막히는 사회에 분노한다. 나는 분노한다. 고로 살아있다는 것이다. 분노해야 세상이 살아있다고 믿는다. 무엇이 정의이고, 진실이고, 희망인가? 그는‘시인의 영토’라는 제목의 작품에서“아무도 나를 읽을 수 없다네”, “나의 시는 어둠을 아는 장님이 읽고/절망 너머를 볼 줄 아는 자만이 읽는다네”라고 털어놓는다.
전기철 시인의 정서와 세상을 보는 눈은 어쩜, 한국전쟁 후 갓 태어난 50년 출생자들의 가슴앓이의 일단인지도 모른다. 전기철 시인은 1954년 전남 장흥에서 태어나 89년 <심상>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나비의 침묵’, ‘풍경의 위독’,‘아인슈타인의 달팽이’,‘로깡땡의 일기’등이 있다.
글, 사진: 박상건(시인. 언론학박사. 섬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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