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박상건의 ‘한강 섬을 걷다’ 17] - 저자도

섬과 등대여행/한강의 섬

by 한방울 2010. 6. 23. 13:51

본문

압구정 아파트 건설로 사라진 옥수동 섬

[박상건의 ‘한강 섬을 걷다’ 17] - 저자도

 

                                                      박상건(섬문화연구소장)

 

 

반포 서래섬 맞은편에는 크기가 118,002㎡나 되던 저자도(楮子島)가 있었다.

정확한 위치는 성동구 옥수동과 금호동 4가 앞 한강상류 지점이다. 청계천이 중랑천과 합쳐져 서남쪽으로 꺾여 한강으로 흐르면서 한강 본류와의 사이에 생긴 섬이다. 섬 가운데에는 언덕과 백사장이 있었다.

 

서울시 자료에 따르면, 섬의 이름은 닥나무가 많다는 데서 유래됐다. 일명 ‘옥수동 섬’ 또는 삼각섬으로 불렸다. 1925년 을축년 대홍수로 모래와 자갈만이 쌓이게 되었고, 1970년 이후 강남지역 개발로 섬의 형태조차 사라졌다.

 

 

▲ 반포대교 밑을 지나는 유람선. ⓒ박상건

 

옛날 저자도는 금호동과 옥수동 남쪽 한강에 있었던 모래섬이었다. 1970년 초에 이 섬의 흙을 파다 압구정 아파트 건설과 개발에 사용하여 지금은 물속에 잠겼다. 경치가 좋아 선경을 이루던 저자도는 일찍부터 기우제를 지냈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저자도는 해마다 홍수에 씻겨 겨우 옥수정 쪽에 모래섬이 되었고, 강 건너 압구정도 빈터만이 남아 전일의 풍경과는 크게 달라져 갔다. 이 모래섬은 여름 장마철이면 완전히 물에 잠겼으며 주로 여름철에 금호동(무쇠막)에서 나룻배로 건너 다녔고 섬과 압구정 사이에 물길을 샛강이라 부르기도 했다.

 

1965년 전까지는 강변에서 수영과 물놀이를 했고, 1960년경에는 주민 아낙네들이 빨래터로도 이용했다. 하지만, 청계천에서 생활하수 등 더러운 물이 흘러내려와 강변 쪽은 시커멓고 이후 강물 전체가 오염되어 이용할 수 없게 되었다.

 

배밭이 많았던 압구정과 섬 사이엔 물이 얕게 흘러 샛강이 있었고, 주민들은 샛강과 강변 및 섬에서 여름엔 수영을 하거나 무수막에서 나룻배로 옥수동 섬으로 건너가 텐트를 치고 피서를 하고 겨울에 강물이 얼면 썰매와 스케이트를 즐겼다. 그리고 서해안 밀물과 썰물이 저자도에까지 영향을 미쳤는데, 6ㆍ25 이후 1960년대까지 한남동 외인주택에 사는 외국인들이 옥수동 모래섬에서 수상스키와 모터보트를 탔다.

 

 

▲ 반포 한강공원 쉼터. ⓒ박상건

 

 

1968년 현대건설이 신청한 저자도 건너 압구정지구의 매립면허 면적은 175,002㎡평이었다. 당초에 매립 목적은 ‘건설공사용 콘크리트 제품 공장 설치대지 조성 및 강변도로 설치에 일익을 담당’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으나, 이후 실시계획 인가과정에서 택지 조성으로 변경됐다.

 

당초 면허면적보다 24,792㎡ 정도가 제외지 쪽으로 더 많이 매립되어 문제가 제기됐으나 이후 한강하류부의 수리모형 실험결과에 비추어 ‘지장 없다’는 결론이 나와 1971년 10월 23일 건설부가 원상회복의무 면제조치를 서울시에 지시했고, 이후 1973년 3월 29일 준공인가가 나왔다.

 

당시 총 매립면적은 158,910㎡이었고, 그중 제방 4,667㎡과 도로 22,005㎡은 국가에, 잡종지 132,236㎡은 현대건설에 귀속하게 됨에 따라 오늘날 압구정동지구 아파트단지가 조성됐다.

 

현대건설이 압구정동 공유수면 매립과정에서 압구정동과 성동구 옥수동 사이 물위에 떠 있는 듯 있어 왔던 저자도의 흙을 파 매립용 토사로 사용함으로써 하중도(河中島)의 하나가 없어졌다. 그런데 이 섬이 사유지였던 관계로 이후 지주와 현대건설 간에 10년에 걸친 송사(訟事)가 있었다.

 

원래 저자도는 한강 본류와 중랑천의 물줄기가 만나는 관계로 생겨난 삼각주로 토사의 퇴적으로 조성됐다. 1930년경만 하더라도 동서 2000m, 남북 885m나 되는 118,002㎡에 이르는 섬이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고려 조선시대에는 등성이도 있었고, 넓은 밭과 집들이 들어선 특유한 섬 풍경을 이루고 있었다. 섬 풍경이 이러한지라 고려 말의 한종유(韓宗愈)는 별장을 짓고 노후를 보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세종이 이 섬을 둘째 딸 정의공주(貞懿公主)에게 하사하여 공주의 아들 안빈세(安貧世)가 물려받았다. 이후 조선 말기에 이르러 철종의 부마인 박영효(朴泳孝)에게 하사됐으나, 박영효가 갑신정변에 가담해 한때 몰수됐다가 되돌려 받기도 했다. 그 후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사리퇴적으로 경작이 불가능해졌고, 1937년경에는 사리채취 허가신청이 있었는데 지목은 전과 잡종지로 표시됐다.

 

 

* 이 글은 인터넷서울타임스(http://www.seoultimes.net)에도 실립니다.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