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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건의 ‘한강 섬을 걷다’ 9] - 여의도 ① 최초 비행장 모래섬

섬과 등대여행/한강의 섬

by 한방울 2010. 5. 17. 1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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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초 비행장이 있던 모래벌판 섬
[박상건의 ‘한강 섬을 걷다’ 9] - 여의도 ①
박상건 섬문화연구소장 pass386@hanmail.net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에 속한 여의도 면적은 8.48㎢. 여의도의 ‘여(汝)’는 ‘너’, ‘의(矣)’는 어조사로 ‘네 마음대로’ ‘너의 것’ 등을 뜻한다는 설과 ‘너른 벌의 섬’, ‘너벌섬’으로 불렀다는 설이 있다.

이 가운데 가장 유력한 설은 ‘너벌섬’ 유래이다. 여의도의 ‘여(如)’는 ‘너’이고, ‘의’는 원래 옷 ‘의’(衣)자이므로 ‘의=벌’의 뜻으로 결국 ‘너벌섬’, ‘너른 모래벌판 섬’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아무튼 한강 물이 오랫동안 퇴적작용에 의해 모래가 쌓이고 쌓여 생긴 섬, 여의도는 조선시대엔 말 목장이었다. 그래서 여의도 모래벌판을 ‘양(養)’자에 ‘말’자를 붙여 ‘양말벌’이라고도 불렀다.

현재 국회의사당 자리에는 50m가량 높이의 양미산(양말산)이 있었는데, 그 앞 섬 안쪽에 있다고 해서 ‘안양말벌’이라고 했다. 이 야산은 국회의사당을 지을 때 흙을 깎아서 둑을 쌓는 데 이용했다.

 

 

 

▲ 여의나루 길. ⓒ박상건

 

양과 염소 기르고 재첩 캐던 섬

<대동지지>, <동국여비고>에는 양말벌에서 양이나 염소를 많이 길렀다고 기록돼 있다.

<대동지지>에는 “여의도는 밤섬 서쪽에 있는데 맑은 모래벌판이 육지에 닿아 있고 여기에서 양을 놓아기른다”, <동국여지비고>에는 “여의도는 예전에 목장이 있어서의 양 50마리, 염소 60마리를 놓아기른다”고 기록돼 있다.

 

 

 ▲ 여의나루 한강변. ⓒ박상건

 
개발 이전 여의도에 거주했던 한 주민이 <한겨레>와 인터뷰한 자료에 따르면, 백사장에서는 민들레, 냉이를 캐서 나물을 무쳐먹고, 밤섬과 서강 사이를 흐르던 한강가에서 소쿠리로 재첩과 조개를 잡아 끓여먹었단다. 비가 오고 나면 한강철교 아래로 물고기를 잡으러 갔는데 팔뚝만한 잉어도 자주 잡혔단다.

여의도는 그런 모래섬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천혜의 생태섬이었지만 가난과 전쟁으로 점철되던 당시 사람들에게, 특히 개발론자들에게 여의도는 쓸모없는 땅이었다. 그래서 ‘네 마음대로’ 섬이라는 뜻에서 ‘너섬’으로 불렀다는 설이 있다.

여의도에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것은 해방 뒤의 일이다. 해방 전에는 일본군 비행장이 있던 탓에 주변에 민간인들의 주거가 금지됐다. 해방 직후 미군정은 양말산 기슭에 20평 남짓한 살림집 50채를 지어 만주와 일본에서 귀국한 50가구를 살게 했는데 이들이 여의도 첫 정착민이다.

여의도는 1916년 9월 일제가 간이비행장을 건설함으로써 비행기지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1922년 12월 안창남의 모국 방문 비행도 이곳에서 실시됐다. 1945년 광복군의 이범석 장군이 귀국한 곳도 여의도 비행장이었다.

1936년 김포 비행장이 새로 건설된 후에도 여의도 비행장은 존속했고 8·15 광복 후에는 미군이 한때 사용하기도 했다. 즉, 여의도는 우리나라 최초의 비행장이었던 셈이다.

누군가는 해방 후 한국 공군의 발상지로 명명하기도 한다. 현재 성남의 서울공항이라고 불리는 부대가 바로 이곳 여의도에 있었던 부대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여의도 한복판에는 비밀 지하 벙커가 설치됐고, 일부 언론이 발굴 보도하기도 했다.

 

* 이 글은 인터넷서울타임스(http://www.seoultimes.net)에도 동시에 연재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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