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섬은 여의도에 딸린 한강의 하중도(河中島)이다. 하중도는 하천이 구불구불 흐르다가 흐르는 속도가 느려지거나 흐르는 물줄기가 바뀌면서 퇴적물이 하천에 계속 쌓여 생긴 섬을 말한다. 이런 하중도는 한강의 여의도, 밤섬이 대표적이다.
밤섬은 마포대교 하류와 서강대교가 관통하는 곳에 위치한다. 면적은 24만 1,490㎡. 해발고도는 3.0~5.5m이다. 밤섬(栗島)은 섬 모양이 밤처럼 생겼다고 해서 ‘밤율’자를 써서 한자어로 ‘율도’라고도 부른다. 본디 고립된 섬이었으나 여의도가 점점 넓은 하중도로 발달하면서 서로 이어졌다. 기반암은 매우 단단한 바위층이다. 섬의 동부와 서부의 하식애(河蝕崖), 즉 하천의 침식작용으로 생긴 언덕은 ‘작은 해금강’이라 불릴 정도로 경관이 아름다웠다.
밤섬은 퇴적물이 계속 쌓여가면서 매년 섬의 면적이 넓어지고 있다. 홍수 등으로 팔당댐 방류량이 1초에 약 5,000톤 이상일 때에는 대부분 범람하고, 호안, 즉 물로 인한 침식을 방지하기 위하여 비탈면에 만든 시설물 아래는 뻘과 모래, 자갈 등이 대부분이다. 밤섬은 홍수 때는 여의도와 함께 거의 침수되다시피 했다. 그리고 홍수가 끝나면 강 밑바닥 모래가 수면위로 떠오르는, 이른바 ‘풀등’이 형성돼 긴 백사장이 펼쳐지기도 했다.
|
|
|
▲ 한강 밤섬. ⓒ서울시 제공. |
1968년 여의도 개발로 파헤쳐져
조선시대 때 밤섬은 약 300만평의 모래밭이 형성됐다. 그때 밤섬은 서강 쪽에 가깝고 여의도는 영등포 쪽에 가까웠다. 여의도는 1916년부터 비행장으로 사용됐고, 광복 후에도 1958년 김포공항이 세워지기 전까지는 민간 및 군용기지로 사용됐다. 하지만 홍수 때 백사장이 침수되어 밤섬 고지대의 주민들의 교통이 차단되면서 고립되기 일쑤였다.
이후 밤섬은 여의도를 개발하면서 당시 김현옥 서울시장의 지시에 따라 한강하구의 확장으로 유수를 좋게 하고, 여의도 제방의 축석을 위한 잡석 채취를 위해 1968년 2월 폭파, 해체됐던 비운의 섬이다. 즉, 폭파한 밤섬 골재를 가지고 현재의 윤중제(섬둑)를 만든 것이다. 그렇게 밤섬은 윤중제의 밑거름이 되면서 대부분 사라졌다.
이보다 훨씬 이전 밤섬의 유래를 더듬어 보면, 서강(西江)에 가까웠던 탓으로 정조 13년(1789년)에 발간된 호구총수에는 한성부 서강방 율도계라는 이름으로 기록돼 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여의도와 함께 고양군 용강면 여율리가 되기도 했다.
<대동지지>에 의하면 서강 남쪽에 있는 한 섬으로 섬 전체가 수십 리의 모래로 되어 있으며 거주민들은 부유하고 매우 번창한 편이었다고 기록돼 있다. 특히 경치가 아름다워 <서울명소고적>에서는 율도는 일직이 마포팔경을 읊은 글 가운데에서도 ‘율도명사’(栗島明沙)라 불릴 정도였다. 그만큼 맑은 모래가 펼쳐져 한강 물 빛깔과 섬의 풍치가 참으로 신묘하고 아름다운 조화를 이뤘다.
조선시대 때는 뽕나무 심어 잠업 성행
조선시대 기록 중 성현(成俔)의 <용재총화>에 따르면 율도(栗島)는 조선 초기부터 뽕나무를 심어 잠업이 성행한 지역이었고, 서울 장안에 뽕잎 값이 비쌌을 때 밤섬에서 뽕을 대기도 했다.
밤섬에 관한 풍습은 <명종실록> 명종 11년 4월 조(條)에 기록하고 있는데, 섬 주민의 생활방식이 문란한 것으로 비쳐져 있다. 아마 외부와 교통이 제한되면서 남의 이목을 덜 의식했기 때문으로 짐작된다.
<동국여지비고>에서는 고려 때 귀양 보냈던 섬이었으며 도선장으로 백사장을 건너 인천으로 가는 중간지대인 샛길 역할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