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송 없는 마을’, 자연으로 돌아가자
지난해 전국 법원에 접수된 정식재판 건수는 175만건이다. 매년 증가추세이다. 대법원이 펴낸 2009년도 사법연감에 따르면 전국 법원에 접수된 본안사건수는 2006년 170만4,716건에서 2008년 175만3,088건으로 늘었다. 분야별로 민사사건이 408만33건(64.3%)로 가장 많았고 형사사건(203만6,250건, 32.1%), 소년보호사건(5만1,92건, 0.8%), 행정사건(3만2,123건, 0.5%) 등이 뒤를 이었다. 한 월간지가 전직 판사 41명을 대상으로 사법에 대한 국민의 신뢰수준을 묻는 설문조사 결과 “신뢰하지 않는 편이다”라는 답이 53.7%에 이르렀다.
우리는 왜 이 신뢰하지 않는 법 기둥에 이처럼 기대어 사려고 하는 걸까. 민주사회는 사회적 기본권이라는 것이 있다. 인간다운 생활을 위하여 일정한 국가적 급부와 배려를 요구할 수 있는 권리이다. 그 권리는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 사회보장수급권, 교육을 받을 권리, 근로의 권리, 노동3권, 환경권, 보건권 등이다. 기본권 보호 배경은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전하면서 각종 모순과 폐단 즉, 부의 불균형, 사회적 빈곤 확대재생산, 노사대립 등의 해소를 위해 국민은 국가에게 개개인의 최소한 인간다운 생활과 평등 실현을 의지한다. 인간다운 생활의 권리 주체는 당연히 국민이고 자연인이다.
이런 상식선에서 볼 때 국가가 국민에게 소송을 제기한다는 보도에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더 걱정은 정부 산하기관, 자치단체가 법을 남용하고픈 유혹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라는 우려이다. 또한 일부 국민들은 “국가도 하는데”라면서 몰상식한 법 남용으로 각진 우리사회의 마지막 보루인 공동체 문화마저 갉아먹는 바이러스로 전락할 우려도 있다. 만인의 평등을 실현하지 못하는 법 조항은 약이 아니라 독이고 부조리를 수술하는 칼이 아니고 무기로 돌변한다.
실제 지난 8월 25일 한 교회 목사와 미국 신학대학 교수 등 59명이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 국장과 현충원 안치를 취소해 달라는 행정소송이 제기했다. 한마디로 우리 상식과 도의가 갈 때까지 가버린 것이다. 소송도 소송 나름이다. 고인의 업적에 대한 논의는 차치하더라도 인간이 갖춰야 할 최소한 예의도 법을 빙자해 내동이친 것이다. 그렇게 백주대낮 보무도 당당히 전직 대통령에 소송을 낼 수 있는 자유민주주의 공간을 만들어준 고인에게 몇 평의 무덤도 허락할 수 없을 정도로 대한민국 법치주의가 철면피한 것일까.
다른 사례도 있다. 한 전직 교사는 음주운전 교통사고로 대법원에서 유죄 확정판결을 받았다. 국가공무원법에 따라 당연 퇴직 후 법원에 복직소송을 제기하고 헌법재판소에 위헌제청을 신청했다. 결과는 각하. 다시 헌재에 위헌심판 재심을 청구했다. 결과는 각하. 다시 헌재의 각하결정이 위법하다며 헌재결정 무효청구소송까지 냈다. 법원도 따라야 하는 헌재 결정을 자신의 주장 관철을 위한 지렛대로 법을 악용한 것이다. 이게 만인의 평등조건인가.
이런 세태는 급기야 별을 많이 단 사람(전과자)일수록 판검사, 변호사보다 법 상식이 월등한 것으로 통하고 법을 유린하기까지 한다. 그래서 법조계에는 재소자를 판사, 검사, 변호사와 함께 ‘법조4륜’이라는 우수개 소리가 있다. 어디 그 뿐인가. 2007년 위장전입으로 1,500명이 입건됐는데도 국회 청문회에서는 사과 한마디로 구렁이 담 넘어가듯 넘어가지 않던가. 법의 잣대를 뛰어 넘는 우리사회 곡예사들, 지식인의 그 이중성 앞에서 이탈이아 속담 “법률이 생기면 이를 어기는 음모가 뒤따른다.”라는 말을 되새김질케 한다.
법은 윤리의 최저선이다. 그래서 루소는 일직이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설파했다. 진정 ‘고독한 산책자’였던 루소는 자연 속에서 완벽한 행복과 선을 체감한 후 섬 바깥 세계의 불행과 악의 문제를 환기시켰다. 섬에서 찬란한 빛에 몰입하며 황홀감을 느꼈던 루소에게 고통의 늪은 타자에 의한 사회의 그늘이었다. 그 그늘은 인간이 인위적 의식으로 만든 구조이고 그 결과물은 부조리였다. 그래서 루소는 인위적 문화를 버리고 문명의 원천인 고향, 자연으로 회귀를 역설했던 것이다.
지금 우리네 뻑뻑한 삶도 사랑도 결국 각종 제도와 법으로 우리 스스로를 인위적으로 옭아맨 올가미 탓이 아닐까. 그것에 스스로 짓눌려 더욱 힘들어하는 것은 아닐까. 문화는 함께 작동할 때 진정한 생명력을 갖는다. 그러나 법으로 평등을 이야기하면 또 다른 불평등 해소를 위해서 또 다른 영역을 구분하는 제도와 법을 만들게 되고 인간과 인간의 하나 됨이 아닌, 인간과 또 다른 인간집단, 인간과 자연을 구분한 이분법 논쟁만 가열시킨다.
루소의 자연주의와 일맥상통한 동양철학이 노자사상이다. 노자는 산 정상에서 한 방울의 물이 아래로 흘러 내려가는데 이 한 방울 물이 계곡을 차오르면 다시 아래로 흘러 내려가는데 이는 새소리 낙엽 지는 소리까지 채우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서로의 하모니를 이루면서 비우기를 반복하는 물줄기는 평야의 젖줄이 되고 마침내 바다로 이르는데 이를 도(道)라고 일렀다. 물은 그렇게 서로 배려하며 비우고 그 빈자리를 채우면서 흘러간다. 다툼이 없으니 허물이 없다.
자연이란 태초에 조물주 손에서 나올 때부터 선했다. 다만 인간의 손에 넘어와서 악이 된 것이다. 루소의 이런 주장은 물이 아래로 흘러가는 것 같은 성(性)이 바로 선(善)이라는 맹자의 일성과도 일맥 소통한다. 행복하게 하는 것이 선이 아니고 선한 것만이 행복이라는 독일 철학자 피히테 역시 이런 물 흐르듯 흘러가는 세상을 설파했다. 무엇을 자꾸 만들어서 행복을 이야기할 것이 아니라 자연 그대로 선과 양심의 꽃이 만발하고 폭죽일게 해야 한다.
루소는 말했다. 자연은 절대로 우리들을 속이지 않는다고. 우리들 자신을 속이는 것은 바로 우리들이라고. 자연에는 결코 오류가 없다. 법이 변화무쌍하게 변하기를 반복한다. 인간은 자꾸 무엇을 구분하기를 좋아한다. 선과 악, 어둠과 밝음, 위와 아래 등 수직의 삶을 산다. 자연은 늘 그 자리에서 생성과 소멸을 반복한다. 비우고 버리면서 수평을 이룬다.
자연의 극치는 사랑이다. 자연은 사랑에 위해서만 접근할 수 있다. 훌륭한 예술작품이 자자손손 전승되는 것은 자연에 대한 모방의 결과 때문이다. 자연에 더 가까이 다가가려는 인간의 원초적 정서가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산수 그늘 아래 동그만 마을 풍경이 자리한다. 그곳에 평화로움과 정서가 물결친다. 자연과 이웃 공동체 그늘이 만든 포근함과 신뢰감이 안정감으로 자리한다. 그런 근원은 덕이며 믿음은 덕의 밑뿌리이다. 논어에서 덕은 외롭지 않다고 말했다. 외롭지 않으니 반드시 이웃이 있다. 물 있는 곳이 멀면 가까운 곳에 불을 끄지 못하듯 인간의 마을도 이웃에 있어야 한다. 오죽하면 우리 속담에 먼 사촌보다 이웃이 낫다고 했겠는가. 영국 속담에도 이웃이 좋으면 모든 일이 즐겁다고 했다. 스페인 속담에도 좋은 집을 사기보다 좋은 이웃을 얻으라고 했다.
소송 지상주의에 젖어 두고두고 후회스러울 인간의 발자국을 남기지 말고 이웃사랑에 굶주리는 삶을 살아보자. ‘범죄 없는 마을’처럼 대한민국 최초, 최고의 ‘소송 없는 마을’의 역사를 창조해보자. 풀뿌리 민주주의에 길이 남을 ‘소송 없는 시군(市郡)’, 그런 진정성으로 이제 우리 자연으로 돌아가자.
박상건(시인. 성균관대 언론정보대학원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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