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가 있는 풍경 20] 박형진作, ‘다시 들판에 서서’
눈물 뿌린 후 새봄에 돋는 새싹처럼
걷이 끝난 들판에 누군가 서서
눈물 뿌리지 않는다면
새 봄에 돋는 싹이 어찌
사랑일 수 있으랴
수수깡 빈 대궁인 채 바람에 날리며
잿빛 산등성이 등지고 기인 그림자 끄는
네 몸뚱이, 죽어
또 죽어 땅에 몸 눕히면
구름만 덮일 뿐 모두 다 떠나가는데
계절의 끄트머리에 누군가 서서
함께 비 젖지 않는다면
어찌
썩어 다시 생명일 수 있으랴
- (박형진, ‘다시 들판에 서서 2’ 전문)
변산반도 모항은 한적한 어촌 마을이다. 시나브로 바닷물이 동구 밖을 첨벙대는 곳이다. 그래서 어느 시인은 모항에 가면 바다를 보듬고 하룻밤을 잘 수 있다고 노래했던 것. 뒷동산에는 천연기념물 호랑가시나무 군락지가 있고 100년 넘은 팽나무가 마을을 껴안고 있다.
박형진 시인은 바로 이 마을에 산다. “시골에서 농사지으며 평생 땅을 파먹고 살아왔지만 어인 일인지 빚만 늘어간다”고 투덜대면서도 “사람과 흙은 서로 육화되는 것인데, 사는 것이 어려울수록 글쓰기도 따라 치열해져야 할 텐데, 그러지 못해 안타깝다.”면서 “세상이 온통 가벼움으로 치닫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농사꾼으로서 내 철학이 부재한 듯 하다”고 자연에 대한 겸허함을 토로하기도 했다. 그래서 새해는 더욱 열정적으로 농사짓기와 글짓기를 하고 싶단다.
그는 천상 농사꾼 시인이다. 모항에서 칠남매 중 막래로 태어났고 초등학교 밖에 안 나왔지만 1992년 <창작과비평> 봄호로 등단, 빼어난 농촌시와 산문으로 꽤 많은 독자를 거느리고 있다. 시집 제목이 ‘바구니 속 감자싹은 시들어가고’, 산문집 이름이 ‘호박국에 밥 말아먹고…’이고, 자식들 이름도 푸짐이, 꽃님이, 아루, 보리라고 지을 정도로 농촌 삶을 천부적으로 타고났다.
세상이 어렵네, 어렵네 할수록 그이의 삶과 시와 철학이 떠오른다. 척박한 시골을 한번도 떠나지 않은 채 그 환경을 일구어 보듬고 가는 삶이 남다르기 때문이다. 초기에는 농촌현실에 대한 슬픔과 분노를 격렬하게 내뱉는 시를 발표했지만, ‘다시 들판에 서서’라는 시집(당그레刊)에서는 농부로서 가장으로서 직면한 현실 문제에 대해 트이고 완숙한 시야를 내보인다. 자연에 대한 겸허, 자연과 어깨동무하려는 삶, 가족과 이웃에 대한 애정이 잔잔히 흐르고 있다. 이 시대와의 화해의 몸짓이라고나 할까.
그래서 “걷이 끝난 들판에 누군가 서서/눈물 뿌리지 않는다면/새 봄에 돋는 싹이 어찌/사랑일 수 있으랴”라고 노래한다. “계절의 끄트머리에 누군가 서서/함께 비 젖지 않는다면/어찌/썩어 다시 생명일 수 있으랴”라고 노래한다.
그렇다. 봄소식은 그냥 훌쩍 우리 곁에 당도하는 게 아니리라. “수수깡 빈 대궁인 채 바람에 날리며/잿빛 산등성이 등지고 기인 그림자 끄는” 모습으로 찬바람 언 손 호호 불던 겨울을 가로질러 당도하는 것이리라. 이성부 시인의 ‘봄’처럼 “싸움도 한 판 하고,/지쳐 나자빠져 있다가//먼 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처럼 그렇게 올 것이다. 봄은 그렇게 다시 선 들판으로 올 것이다.
박상건(시인. 계간 섬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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