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가 있는 풍경 12] 유치환 作, '그리움' | ||||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임은 뭍같이 까딱 않는데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날 어쩌란 말이냐 -(유치환, ‘그리움‘) 파도가 그리운 계절이다. 청마 유치환 시인은 바닷가 통영에서 태어났다. 이 시를 읽노라면 파도가 주는 아름답고 슬기로운 이미지에 푹 빠져든다. 누군가 그리워 어쩔 줄 모르는 파도이면서 수없이 부서지며 끝내 묵묵히 스러지는 물보라의 이미지로서의 파도. 폭풍주의보 내린 무창포에서 만난 파도를 아직 잊지 못한다. 요동치며 밀려오고 갯바람에 회오리치던. 어민들은 이미 포구에 묶인 배들을 마을 안쪽으로 되돌려 놓은 텅 빈 바다에 슬픈 음악처럼 그렇게 연이어 밀려오던 파도소리. 파스칼의 말마따나 “이 무한한 공간의 영원한 침묵”만 남겨둔 채, 우주의 미물은 침묵할 수밖에. 그렇게 포구에 서서 온몸으로 물보라를 뒤집어썼다. 사태의 심각성을 느끼며 방파제를 빠져나와 바라다 본 저만치 붉은 등대. 등대는 물보라를 맞으면서도 안개바다를 향해 불빛을 깜박였다. 거센 파도를 수없이 받아내면서. 파도는 등대의 밑뿌리에 부딪치기를 반복하며 그저 부서지는 것이 아니다. 때로 아무 것도 걸치지 않고 마음껏 소리 내지르고 싶은 인간 군상처럼, 이 바다도 한번쯤 죄들끼리 마음껏 소리치고 싶었을 게다. 부서지는 것은 새로운 창조의 몸부림이다. 인간은 자꾸 채워가지만 바다는 파도로 비워낸다. 비워낸 자리를 다시 푸른 파도로 채찍질한다. 그리고 하얗게 물보라 친다. 부서지는 것들이 낮게 낮게 밀려온다. 낮은 곳에 살아야 높은 곳에 오르는 것이 힘들다는 것을 알고, 어두운 곳에 있어 봐야 밝은 곳으로 향하는 것이 눈부시다는 것을, 파도는 안다. 그 영혼의 번뜩임이 ‘깃발’이 되어 나부낀다. 서로 엎드려 다음 풍랑의 길이 되어주는 파도. 파도는 역사의 줄기처럼 보인다. 접힌 것은 펴면서 밀려오는 파도 앞에서 나, 누군가를 위해 여태 길이 되어주지 못했거늘, 길을 펴주며 살지 못했거늘,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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